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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417)

119화

발론드 공작은 세상 진지한 얼굴로 캔버스를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보았던 단순 스케치가 아닌, 색채까지 완벽하게 마친 그림.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면밀히 살펴보던 공작이 내린 평가는 하나였다.

“아름답군.”

“…….”

황태후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림에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 심미안이 있는 척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자기 얼굴을 보고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오라버니가 심히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손끝이 오그라들고 있는 줄 모르는 발론드 공작은 계속해서 망발을 내뱉었다.

“여기 이 코 좀 봐라. 아주 날렵한 것이 종이도 베어 가를 것 같지 않냐?”

“뭐어. 그렇군요.”

“여기 이 눈은 또 어떻고? 부리부리한 눈에 카리스마가 절로 넘치는 걸 보니 우리 손주가 나를 아주 제대로 보고 있었구나!”

여동생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화자찬에 열기를 더해갔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기분에 찻잔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무렵.

금색의 화려한 액자에 넣어야 하니 마니 중얼거리던 발론드 공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그렇지. 집사!”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나 또한 손주에게 선물을 주어야겠지.”

“무슨 선물을 주려고요?”

드디어 멈춘 일방적인 수다에 환호한 황태후는 짙은 호기심을 보였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발론드 공작은 까칠한 턱을 긁적였다.

“흐음. 사실 뭐가 좋은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말인데 동생아. 너는 뭐 좋은 생각이 있냐?”

“결국, 떠넘기는 겁니까…. 뭐, 그림과 관련된 거면 다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림이라…. 그럼 집사! 화방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걸로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잰걸음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발론드 공작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시 캔버스를 들여다보며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리도 좋습니까.”

“당연하지. 손주 녀석이 어릴 때부터 나를 동경해왔다는데 어찌 안 좋겠냐.”

“선물도 꽤 마음에 든 것 같은데요.”

“그것도 당연한 거고. 너도 황녀님께서 뭔갈 선물해주면 그게 뭐든지 간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냐? 아니, 선물 받은 적이 없으니까 잘 모르려나.”

“허 참. 왜 모릅니까? 저도 그 기분 잘 알고 있습니다.”

발론드 공작의 도발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고 만 황태후가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올렸다.

생화로 만든 귀여운 꽃반지에 발론드 공작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무려 네 살배기 때 제게 선물해주었지요. 우리 아가는 어렸을 때부터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지극했답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결국, 발론드 공작은 두 손 두 발 들었다.

말 그대로의 항복 선언.

서로 누구의 손주가 더 잘났느냐의 싸움이 드디어 끝을 맺은 것이다.

어떤 일에서든 최선을 다해 승리를 쟁취하려 드는 그가 먼저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태후가 내심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발론드 공작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손주의 목소리.

“할아버지. 잠시 들어가도 됩니까?”

“어? 아, 얼른 들어오거라.”

허둥지둥 캔버스를 쿠션 뒤에 숨긴 그가 재빨리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로엔과 사이좋게 손을 잡고 들어온 엘레인이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발론드 공작님. 잠시 로엔이랑 같이 외출 좀 하고 올게요.”

“음? 어딜 가려고 그럽니까?”

“로엔이 쓸 물감 사러요. 할머니, 다녀와도 되죠?”

“물론이지.”

황태후가 흔쾌히 허락했다.

반면, 왜인지 모르게 뒷전으로 물러난 것 같다 느낀 발론드 공작은 잠시 구시렁거리더니 꽤 섭섭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말이야. 공작님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

뜬금없는 혼잣말에 엘레인은 물론이고 로엔과 황태후의 시선이 쏠렸다.

턱을 괸 채 여동생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그는 한심하다는 그 시선에 움찔 몸을 떨며 딴청을 피웠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후. 아가야? 할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드리려무나.”

“하, 할아버지…?”

예상치 못한 주문에 잠시 머뭇거리며 그리 말하자, 발론드 공작이 학을 떼며 말했다.

“누가 그런 걸 원했다고. 커흠! 너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황태후는 오라버니를 가증스럽게 쳐다봤다.

그렇게 말할 거면 최소한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는 것은 숨기면서 말하든가.

사실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모습이 아주 꼴 보기가 싫었다.

“저 그럼 계속 공작님이라고 부를게요.”

“크흠! 아니, 뭐 그러라는 소리는 아니고요.”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 전 이만 나가볼게요.”

“그래. 잘 다녀오려무나. 기사들은 꼭 데려가고.”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엘레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로엔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후 둘만 남게 되자 황태후는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오라버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꼴값을 떠는구나.”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별말 안 했습니다.”

“그래?”

연신 히죽거리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못 들은 발론드 공작은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웃었다.

골때리는 모습에 황태후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핏줄이 아니라고 배척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주 친손녀처럼 대하는군요.”

“아, 아니. 그건 직접 만나기 전에나 그런 거고!”

“그래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지셨습니까?”

“그야 뭐….”

발론드 공작은 방금 떠나간 엘레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엘레인을 조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황제가 입양했다고 했기로서니, 아스터 왕가의 핏줄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엘레인은 고작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그것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먼 친척을 위해 용감하게 나섰다.

그리고 로엔을 생각하는 엘레인의 그 따스한 마음은 고집불통인 그의 마음에도 선명하게 전달되어 짙은 흔적을 남겼다.

결국, 그의 고집을 꺾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언제까지고 남처럼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냐.”

“후후. 저는 오라버니가 생각을 고쳐먹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보아하니 언제고 내 생각을 바꿀 만한 아이이던데 무얼.”

“그 말씀은 ‘그것’을 엘레인에게 줄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뭐? 아니, 그거랑 이거랑은 완전히 다른 얘기지!”

은근슬쩍 물어보는 말에 화들짝 놀란 발론드 공작이 버럭 성질을 냈다.

그에 황태후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간이고 쓸개고 줄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아직도 우리 손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 아니. 그 아이한테 빚을 진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아직 어린애잖냐. 우리 가문에서 내려오는 귀중한 가보를 아직 어린아이에게 맡기는 건 좀 그렇지.”

“후우. 정말 쉽지 않군요.”

“됐고 얼른 그 이야기나 하자고. 애초에 우리가 저번에 만난 이유도 그것 때문이잖아.”

“노마스족 말이지요?”

황태후가 한숨을 쉬며 묻자 발론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천 명으로 늘었더군.”

“식구가 늘었군요.”

“그래. 그런데 목초지가 부족해서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어쩌면 약탈을… 더 나아가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어.”

발론드 공작가를 찾아온 노마스족은 수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그들이 무려 천 명이나 모였으니, 웬만한 중소 규모의 영지는 손쉽게 박살 낼 수도 있다.

예전엔 셋이었던 목초지가 영지 개발로 인해 하나로 줄어들었으니, 그들이 분노할 건덕지는 충분했다.

“잠시만요. 그들이 그러지 않을 거란 건 오라버니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보통이라면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거지. 내가 그 족장 녀석을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아?”

“당연히 알지요. 그 친구한테 말 걸기 무서워서 저를 부른 것도 알고 말입니다.”

“무, 무섭다니! 내가 그 녀석을 왜 무서워해? 그냥 껄끄러워서 그런 거거든!”

여동생의 말에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그가 강력하게 반박했다.

황태후가 보기엔 다 똑같은 말이었지만, 어쨌든 발론드 공작은 헛기침을 한 뒤 괜히 무게를 잡았다.

“어쨌든 그 녀석이 오면 잘 좀 부탁한다고.”

“어쩔 수 없지요.”

여동생의 말에 발론드 공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대신 제가 도와주면 ‘그것’을 우리 손녀에게 이전하는 것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줬으면 합니다.”

“…뭐, 생각은 해 볼게. 생각은.”

실로 미지근한 반응이었지만, 황태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밖으로 나온 엘레인은 로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근데 말이야. 기사들 안 데려가도 돼?”

황태후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엘레인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지난번 플로스 영지 가출 사건도 있고 해서 괜히 몸을 사리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우리 가문의 기사들은 밖에도 산재해 있거든요.”

“오. 과연 기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는 거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쑥스럽네요.”

로엔이 붉게 물든 뺨을 긁적였다. 그의 얼굴엔 자기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잔뜩 묻어났다.

엘레인은 수줍게 볼을 붉히는 로엔을 흡족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아, 실은 나가기 전에 먼저 누님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 여기서 제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도 될까요?”

“친구?”

“네. 저 다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로엔이 작은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야 상관없는데…. 근데 저 다리 진짜 예쁘다.”

엘레인은 작게 환호를 내질렀다.

하얀색에 가까운 오밀조밀하게 작은 돌들로 이루어진 다리는 작았지만 아주 예뻤다.

마치 동화 속 요정들이 이용할 법한 작고 귀여운 다리.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더욱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그런 다리였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던 엘레인은 개울 아래에 무언가가 쫑긋 솟은 것을 발견했다.

“저건 강아지 귀…?”

쫄쫄쫄. 개울가의 물이 흐르는 소리와 가까워질수록 뾰족하게 솟은 새하얀 귀는 더욱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귀의 주인과 얼굴을 마주친 순간.

“뭐야. 수인 처음 보냐?”

“엥? 수, 수인이라고?”

그의 말에 엘레인이 놀라 소리쳤다.

북방에나 있을 수인이 왜 여기에…?

라는 의미로 외친 말이었으나,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인 수인 소년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로엔의 말.

“아, 형님. 먼저 와계셨습니까?”

“뭐? 그 친구라는 사람이 수인이었어?”

“흥.”

또 한 번 깜짝 놀라 묻자, 수인 소년이 팔짱을 낀 채 엘레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냐, 이 꼬맹이는? 새로 사귄 친구야?”

“제 친척으로 엘레인 누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라칸 형님. 아, 그러고 보니 두 분은 동갑이시군요?”

“뭐? 이 꼬맹이가 나랑 동갑이라고?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불량스럽게 눈을 치뜬 그가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봤자 엘레인과 같은 꼬맹이라서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엘레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 방금 들었다시피 난 엘레인이라고 해.”

“라칸.”

어허. 근데 이 녀석, 은근히 말이 짧다?

상당히 시건방진 녀석의 행동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엘레인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근데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흠?”

그때 라칸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는 로엔.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던 찰나 라칸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궁금해?”

“아, 응. 대체 뭔데 그래?”

라칸은 말 대신 손바닥을 슥 내밀었다.

그리고 하는 말.

“궁금하면 500 쿠퍼.”

“?”

아무래도 로엔의 친구는 정말 양아치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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