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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417)

122화

엘레인이 배고픔에 괴로워하자, 로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근방에 새로 생긴 가게가 있다던데 거기로 가시겠습니까? 디저트도 판다고 하던데….”

“난 찬성!”

디저트라는 말에 두 눈을 번쩍 뜬 엘레인이 굽혔던 허리까지 쫙 펴며 활기차게 외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꾸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사람이 화색 만연한 얼굴로 그리 외치니 라칸의 얼굴이 더욱 이상해졌다.

“아까 그림 그려놓은 것도 그렇고 디저트 엄청 좋아하나 보네.”

“그러는 너는? 디저트 안 좋아해?”

“뭐, 치즈로 만든 거라면….”

라칸이 어물거리며 답하자, 깔끔하게 물건들을 챙긴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갑시다. 이러다가 점심시간 다 지나가겠습니다.”

“앗. 그럼 안 되지.”

엘레인이 재빨리 뒤를 따르고 라칸도 서둘러 그림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러다 멈칫.

“야! 너 그림 안 가져가?”

크게 소리쳤지만, 이미 저만치 가버린 엘레인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머리를 긁적인 라칸은 엘레인의 그림도 함께 챙긴 뒤 외쳤다.

“너희들 자꾸 나 버리고 갈래!”

***

로엔이 안내한 가게는 새로 생겼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주 깨끗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서둘러 가게 안에 착석한 그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하씨. 냄새 맡으니까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아.”

“라칸 너…. 안 그런 척하더니 배가 많이 고팠구나?”

테이블에 볼을 비비며 하는 말에, 축 늘어진 귀를 구경하고 있던 엘레인이 피식 웃었다.

엘레인의 시선이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린 라칸이 입을 삐죽였다.

“오늘 아침 굶고 왔거든.”

“웬일입니까. 하루 세끼는 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던 사람이.”

“그런 게 있어.”

라칸이 대답을 회피하자, 때마침 음식이 완성됐다. 김이 폴폴 나는 음식을 담아온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고소한 치즈 그라탕과 크림 파스타 그리고 디저트 세트A 나왔습니다.”

라칸 앞으론 치즈 그라탕이, 로엔 앞으로는 크림 파스타가. 그리고 엘레인 앞에는 각종 디저트가 가득 쌓여 있는 3단 트레이가 놓여졌다.

각각 포크와 스푼을 쥐고 군침을 삼킨 아이들은 우렁차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의 시작을 알렸다.

“으음~ 이거 엄청 맛있다!”

“이것도 정말 맛있습니다. 면의 익힘과 크림의 농도가 아주 딱 맞아요.”

“우걱우걱.”

각각 감탄사를 연발하며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맛을 탐미하는 세 아이.

아이들끼리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이목을 집중했던 손님들은 복스럽게도 먹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걸쳤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지는 모습.

그때 한참 파스타를 먹던 로엔이 손을 멈추고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누님. 정말 식사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응? 난 이게 식사하는 건데?”

달콤한 딸기 타르트를 우물거리며 그리 말하는 엘레인. 그에 라칸 또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 게 어떻게 식사가 돼? 이렇게 뜨끈한 걸 먹어야 속이 든든하지.”

“라칸 형님.”

“어?”

“방금 그 발언… 진짜 아저씨 같았습니다.”

“야 이씨!”

두 아이가 또 티격대기 시작했다.

디저트를 오물거리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엘레인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꼭 라네즈랑 아르닐 같네.’

그렇다. 시도 때도 없이 싸우는 게 마치 그 두 사람을 떠올리게 만든다.

살짝 욱하는 기질이 있는 라칸은 라네즈. 말투부터 행동까지 상당히 어른스러운 로엔은 딱 아르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절로 떠올랐다는 것은….

‘어쨌거나 사이가 참 좋다는 뜻이구만.’

싸우면서 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비록 그 두 사람은 매우 험하게 놀긴 했지만…. 엘레인은 괜히 흐뭇해지는 것을 느끼며 환하게 웃었다.

“됐고 얼른 먹기나 하지?”

“아앗.”

“…….”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는 살벌한 목소리에, 목에 힘을 주며 싸우던 두 사람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제야 알아챈 것이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심지어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진 로엔이 재빨리 그들에게 인사를 했고 라칸 또한 빨개진 얼굴로 그라탕을 입에 집어넣다가 입천장을 다 데고 말았다.

“학, 헉 뜨것…!”

“어휴. 조심해서 먹지.”

속내가 깊은 것과 별개로 역시 애는 애다.

쯔쯧 혀를 찬 엘레인은 얼른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천천히 좀 먹어.”

“고, 고맙다.”

벌컥벌컥 물을 마셔 입천장을 식힌 라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리니, 절로 몸이 축 늘어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의 시선 또한 떨어진 뒤.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던 라칸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 그러지? 아직도 입천장이 아려서 그런가?’

디저트를 다시 먹으려던 엘레인은 갑자기 심각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라칸이 조용히 뇌까렸다.

“와, 이거 이렇게 짓는 거 아닌데.”

“응? 뭐가?”

그리 되묻자, 라칸이 혀를 쯧 차며 말했다.

“여기, 홀의 공간이 넓잖아? 보면 이 기둥이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형태야. 심지어 2층 건물이니까 지붕만이 아니라 한 층의 하중을 이 기둥이 버텨주고 있어. 그렇다고 이 기둥의 자재가 엄청 튼튼한 것도 아니라서 지금 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상태야. 이런 건 지진이 나면 바로 무너져버린다고.”

잘못 들었나 싶어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설명을 듣던 엘레인은 핫! 소리를 내며 정신을 되찾았다.

“뭐야. 너 그런 것도 알아? 건축에 대해 따로 공부한 거야?”

“아니. 그냥 척 보면 아는 건데.”

“너 진짜 대단하다.”

이 친구. 보면 볼수록 범상치 않은 녀석이다.

이게 바로 진짜 천재라는 건가….

경이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뻔했다.

“방금 뭐라고 했니?”

코앞까지 다가온 사장님이 부들부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것을 잘 듣지 못해 다시 한번 설명하라는 뜻으로 해석한 라칸이 가슴을 쭉 내밀며 재차 말했다.

“아저씨. 이 건물 어떤 건축업자한테 맡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사기당한 것 같네요. 여기에 사용된 건축 자재는 가구 만드는 사람들도 잘 안 쓰는 엄청난 싸구려라고요.”

라칸은 이 사장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당연하지만 아주 순수한 의도로. 다음에는 이런 사기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담아.

하지만 사장님께서는 그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는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방긋 웃고 있는 라칸과 어색하게 웃고 있는 두 아이를 향해 외쳤다.

“요놈의 꼬맹이들이! 어디서 재수 없는 소리를 막 하고 있어!”

“으앗!”

“도망쳐!”

사장님이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왁왁 소리를 질렀다.

실로 깜짝 놀랄 목청에, 아이들은 식사를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갔다.

그리고 조용해진 식당 안.

다시 문이 열리고 고개를 빼꼼 내민 로엔이 슬그머니 음식값이 든 주머니를 놔두고 다시 도망쳤다.

“…….”

이 와중에도 정직한 아이의 도덕성에,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내던 사장님은 벙찌고 말았다.

우수수 꽂혀 들어오는 손님들의 시선은 덤이다.

***

“어우…. 십년감수 했네.”

엘레인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짚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무 급하게 뛰쳐나온 탓에 방금 먹었던 것이 역류할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헐레벌떡 돈을 두고 온 로엔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휙 째려보았다.

“라칸 형님! 형님 때문에 우리까지 쫓겨났잖습니까!”

“왜? 난 맞는 말을 했을 뿐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게 주인이 있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합니까?”

“쳇. 난 그냥 이대로면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라칸이 투덜거렸다.

상당히, 매우, 아주 직설적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라칸은 가게 주인에게 충분한 충고를 해주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지는 오롯이 가게 주인 몫이겠지.

“하여튼 나는 이런 집 절대 안 지을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된 집만 지을 거야.”

“그 말은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거야?”

“맞아. 난 건축가가 될 거야. 그리고 세상에 내 이름을 알리는 거지. 위대한 수인 건축가. 캬~ 멋지지 않냐?”

엘레인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저런 멋진 꿈을 갖고 있다니. 절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면 학교에 다니는 게 낫지 않아? 가령 마로니에 아카데미라던가… 그런 곳에 가면 많이 배울 수 있을 텐데.”

“학교?”

“응. 우리 오빠도 거기서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어.”

졸업식 날 오르칼의 모습을 떠올린 엘레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라칸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어.”

“오, 그럼 바로….”

“근데 할아버지가 허락해줄지 모르겠다.”

“어?”

엘레인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뭔가 데자뷔 같은데, 기분 탓인가?

로엔을 보며 잠시 머리를 갸우뚱했던 엘레인은 이번엔 꽤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노마스족 수인들은 전통을 매우 중시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 입장에선 노마스족이 대대로 일구어온 것들을, 라칸 또한 이어받기를 원하는 거겠지.

혈족 중시 경향이 강한 이들이니 더욱 품에서 놓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엘레인은 라칸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 그의 어깨를 진중하게 토닥였다.

“아마 손자가 진심으로 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할아버지도 허락해주실 거야.”

“맞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는데, 엘레인 누님이 얘기하신 대로 진심을 전달하니까 흔쾌히 허락해주셨습니다. 형님도 자기 자신을 믿고 꼭 진심을 전달하세요.”

최근 라칸과 흡사한 일을 겪었던 로엔이 옆에서 거들었다.

라칸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파이팅을 외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자신감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아. 한번 얘기해 볼게.”

“후기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말 나온 김에 나 바로 얘기하러 가볼게. 너희 둘 진짜 고맙다.”

“그런 건 허락을 받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엘레인이 그리 말하자, 라칸이 빵 터졌다.

“그것도 그러네.”

키득키득 웃으며 중얼거린 라칸이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좋은 소식 가져올 테니 내일 다시 보자!”

“힘내!”

“파이팅입니다!”

아이들의 응원에 맞춰 뒤돌아선 라칸의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

라칸과 기분 좋게 헤어진 두 사람은 공작가로 돌아오는 길에 담소를 나누었다.

주제는 당연히 라칸.

엘레인이 걱정스레 말했다.

“라칸이 잘 할 수 있을까?”

“그 형님. 좀 그래 보여도 꽤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서 꼭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엘레인의 도움을 받았던 로엔과 달리 라칸은 오롯이 혼자서 할아버지를 설득해야 한다.

옆에서 도울 수 없기에 고군분투할 그가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라칸을 보아온 로엔이 저리 말하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일단 제 방으로 같이 가시겠어요? 물건 정리하고 바로 제대로 된 밥을 먹으러 가죠.”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식사 도중 쫓겨나서 배 속이 허전했던 참이다.

고개를 끄덕인 엘레인은 로엔과 함께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헉. 이게 뭐야?”

“아…?”

로엔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외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가 방 한쪽을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잠깐만. 설마 저거 화방 앞에서 봤던 그거 아니야?”

“그렇군요. 할아버지께서 제게 선물을 주고 싶었나 봅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그분이 보통 선물을 저렇게 큰 걸로 줘?”

“그건 아니지만…. 아! 아마 저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

엘레인의 물음에 로엔은 벽면 가득 장식하고 있는 검들을 가리켰다.

그에 말없이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로엔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비싸고 좋은 것.”

“아?”

“다른 말로 이럴 땐, 플렉스 했다고 하던가요?”

여상스럽게 하는 그 말에 엘레인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를 보며 생각하기를.

‘황궁만큼 공작가의 스케일도 만만치 않구나….’

이 세계 최강자들의 자본 싸움에 엘레인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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