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417)

125화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쳐 시선을 집중시킨 황태후가 빙그레 웃었다.

“자, 그럼 이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을 먼저 소개시켜줘야겠구나.”

황태후가 고개를 까딱이자, 뒤에 서 있던 집사가 뒷문을 열었다. 그러자 드러난 모습에 라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버지?”

“…반갑습니다.”

거대한 거구를 구부리고 자신의 키보다 작은 문을 조심스레 넘어온 레눔이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반면 여전히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라칸.

이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직접 공작가에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다.

황태후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 아버지를 살피는 라칸의 모습에 후후 웃었다.

“이 아이는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말이다. 거기다 이번 내기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기도 하니, 인사시킬 겸 공작가에 데리고 왔지.”

인자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라칸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레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는 기분이 좋았다.

들은 대로라면,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지지하는 쪽에 속하는 거니까.

“아버지. 감사해요.”

“으음.”

과연 과묵한 그의 아버지답게,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두 부자의 짙은 유대감에 엘레인은 황태후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황태후는 그런 엘레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까 말한 대로 이번 내기는 일주일 이내에 폭포 사이를 잇는 다리를 완공해 내는 것이 목표란다. 또한, 양 5,000여 마리가 한꺼번에 지나가도 버틸 수 있는 아주 튼튼한 다리여야 하는 게 조건이지.”

황태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레눔에게로 향했다.

레눔은 그런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후후.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아버지예요!”

믿고 있었다는 반응에 레눔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이 일의 중요한 문제점을 집어내었다.

“하지만 그만큼 튼튼한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석재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 안에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일손들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거네요.”

그리 말한 엘레인은 침음을 흘렸다.

돈.

석재를 구입하고 인부들을 고용할 금전.

물론 엘레인에게도 그만한 돈은 있다. 플로스 영지에서 지금껏 열심히 돈을 벌어놨으니까. 개발 비용으로 따로 빼놓은 것을 조금 가져다 쓰면 충분하겠지.

그러나.

‘문제는 내가 지금 맨몸으로 왔다는 거지.’

엘레인은 의기소침해졌다. 플로스 영지에 돈이 있으면 뭐 하나? 지금은 완전히 무일푼인데.

풀이 죽은 엘레인은 옷 안에 숨겨둔 목걸이를 슬쩍 매만졌다.

‘확 이 목걸이라도 팔아?’

듣기론 유명한 드워프가 제작한 목걸이라고 그랬다. 그렇다면 값어치도 꽤 나갈 텐데….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자금이 마련되지 않을까?’

참고로 엘레인은 몰랐지만, 그 목걸이는 이전에 황제가 선물로 준 것으로 운디네를 하급 정령으로 속일 수 있는 놀라운 아티팩트였다.

즉, 지금 엘레인의 생각을 황제가 알게 되면 망연자실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을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

그리고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엘레인은 옷 위로 도드라진 목걸이의 감촉을 느끼며 진지하게 이것을 팔지 말지 고민했다.

만약 황태후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입을 떼지 않았더라면 정말 팔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걱정 말거라. 돈이라면 내가 대주마.”

“네? 할머니가요?”

엘레인이 흠칫해서 물었다.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또 도움을 받다니.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심지어 앞으론 우리들이 알아서 해 보겠다고 외친 지 몇 분도 되지 않은 지금은 더더욱!

“괜찮아요. 여기 제 목걸이를 팔면….”

“어허. 넣어 두거라.”

“그치만….”

“그렇게 미안해할 것 없다. 이곳은 나의 집이고 우리 집에 다리를 놔주는 셈인데 못 해줄 건 또 무어냐. 오히려 이 일의 적임자는 나라고 생각한단다.”

엘레인이 목걸이를 꺼내 들자, 황태후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했다.

어차피 썩어 넘치는 돈.

황태후는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자. 그럼 돈 문제는 해결된 것이지?”

“그렇습니다.”

이로써 자금 문제는 해결됐다.

레눔이 한결 마음이 놓이는 얼굴로 답하자,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공작가의 집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돈 문제는 해결됐으나, 다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석재를 구입하기 위해선 상인이 와야 하는데, 이번 폭우로 다리가 무너져서 그들이 건너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부들과 조경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뿔싸.

생각해 보니 현재 발론드 공작령은 고립되어 있는 상태다.

이곳은 아스터 왕국의 레톤 영지와 달리 이동 마법진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무역상들이 이용하는 유일한 다리가 끊겨버린 상황.

집사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필요한 석재를 구입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인부들 대부분이 무너진 담과 지붕을 수리하기 위해 나간 상태입니다. 거기다가 공작령 내에 있는 조경사들은 며칠 전 다른 영지로 출장을 나간 상태라….”

“그럴 수가….”

엘레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런 건 돈이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황태후 또한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고는 인상을 굳혔다.

“큰일이구나. 이래선 작업을 할 수가 없겠어.”

일단 다른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가장 중요한 석재를 가져올 방법이 없다.

황궁의 마법사를 닦달해 봤자 무게에 따라 마나량의 소모 또한 비례하기 때문에 하루에 가져올 수 있는 석재량은 정해져 있다.

대충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약 한 달 동안 죽어라 돌을 날라야 하는 것이다.

‘어떡하지?’

엘레인의 얼굴이 단번에 침통해졌다.

시간도 촉박한데 가장 중요한 기본 재료를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렇듯 모두가 침울해하고 있을 때. 열린 문 뒤로 작금의 상황을 모두 파악한 발론드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등장했다.

“크흠. 그런 거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

엘레인이 부른 호칭이 마음에 든 것일까?

한 차례 입꼬리를 들썩인 발론드 공작이 다시금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 공작성에는 성벽 보수용으로 항상 여분의 석재를 쌓아 놓습니다. 그러니 그걸 가져다 쓰면 됩니다.”

“저, 정말요? 진짜 그걸 사용해도 되요?”

“물론입니다. 만약 모자라면 뭐. 성벽을 헐어도 됩니다.”

“넹?”

엘레인은 순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저 자신만만한 미소와 확고한 눈빛. 그리고 흡족한 황태후의 표정을 보면 잘못 들은 게 아닌 듯했다.

엘레인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성벽을 허무는 건 좀….”

“허어. 다리 하나 만드는 데에 얼마나 든다고. 가져가 봤자 티도 안 날 겁니다.”

아무래도 그는 진심인 듯했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말리는 것도 그렇고…. 결국 엘레인은 감사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재료 걱정은 덜었네요.”

“그렇게 고마우면….”

“네?”

“커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고마우면 할아버지라는 말 좀 자주 해 달라!’라고 말하려던 발론드 공작은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뒷말이 궁금했지만, 어쨌든 석재 문제를 해결한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이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됐네요.”

“인부는 제가 최대한 구해 보겠습니다.”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태후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오늘은 실측 및 설계도 그리기와 자재를 옮기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지요.”

본격적인 작업은 내일부터 시작.

자리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빛냈다.

* * *

다음날.

작업 장소에 도착한 엘레인은 집사가 구해온 인부들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분들뿐이에요?”

“죄송합니다…. 사람이 워낙 없어서.”

집사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구해온 인부는 고작 세 명. 이조차도 다들 집중 호우로 무너진 건물을 보수하느라 바쁜 인부들을 겨우 설득해서 빼내온 숫자였다.

“아니에요. 사람이 없는 건 집사님 탓이 아니잖아요.”

“황녀님….”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를 안심시킨 엘레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숫자로 과연 얼마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눈앞이 다 막막해지는 가운데, 세 명의 인부들과 함께 어제 옮겨 놓은 자재를 확인하던 레눔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생각보다 돌이 크군요. 다리를 만드는 데에 사용하려면 더 잘게 쪼개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만, 조경사들은 구하지 못했다.

고로 쓸 만한 재료로 만들려면 일일이 저 커다란 돌들을 쪼개야만 했다.

“하루에 몇 개 정도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100개 정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턱없이 모자라네요.”

가장 중요한 석재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커다란 문제를 안게 되자, 엘레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큰일이야. 물이 너무 불어서 작업할 수가 없어.”

로엔과 함께 다가온 라칸이 강물을 가리켰다.

전날 측정했을 때와 전혀 변함이 없는 물살. 그리고 불어난 물의 양.

여전히 기세를 줄이지 않고 힘차게 뻗어나가는 물줄기를 보며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문제가 해결되면 또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오는 것 같네.”

엘레인의 말에 모두가 깊이 공감했다.

그나마 석재는 쪼갤 수 있다고 쳐도, 불어난 물에서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강물이 불으면서 물살도 빨라졌기 때문에 아무리 거구인 레눔이라고 해도 곧바로 물살에 휩쓸려 폭포 아래로 처박힐 정도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선 안전하게 기다림을 택해야 하는데, 이만치 불어난 강물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려면 며칠은 걸릴 터다.

안 그래도 시간이 촉박한데 그걸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때 로엔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돌을 쌓아서 물줄기가 빠져나가는 부분을 한정되게 만든 뒤 작업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컨대 댐을 쌓자는 거구나?”

“예. 그렇게 하면 작업하기가 수월해질 겁니다.”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엔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안 돼. 물살이 너무 빨라서 댐이 무너질 수도 있고, 가령 괜찮다고 해도 저만한 크기의 강줄기를 모두 막으려면 돌이 너무 많이 필요해. 아무리 그래도 진짜 성벽을 허물 수는 없잖아?”

“그렇군요….”

엘레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로엔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라칸은 단번에 쪼그라드는 로엔을 힐끔 바라보며 새로운 방법을 말했다.

“그럼 물길을 새로 트는 건?”

“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차라리 그게 낫겠다. 안전에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엘레인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방법 또한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레눔이 착잡한 얼굴로 그 부분을 집어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모든 일손을 동원해도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이건 뭐. 어째 쉬운 길이 하나도 없네요.”

“끄응….”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후 새로운 방안이 두 개 정도 더 나왔으나, 새로 물길을 트는 것만큼 안전한 방법은 없었다.

‘어쩌지. 마탑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나…?’

마탑 마법사 여럿이라면 단시간 내에 충분히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 터.

돈이 상당수 깨지긴 하겠지만, 잠시 플로스 영지에 들르는 한이 있어도 이번만큼은 엘레인의 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좋아. 부르자.’

그렇게 결정을 내린 엘레인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꼬맹아!”

“엘레인!”

“엥?”

갑자기 들려오는, 여기서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엘레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휙!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빠들…?”

드디어 여동생을 찾은 두 황자가 세상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