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쯔쯧.”
지형을 완벽하게 바꾸는 데에 성공한 아르닐이 질질 끌려가는 쌍둥이 형을 보며 혀를 찼다.
이후 공중에서 우아하게 착지한 그는 라네즈를 향해 손인사를 하고 있는 엘레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나 다 했어.”
“엥? 벌써?”
아르닐은 어깨를 으쓱이며 반대쪽을 가리켰다.
콰아아아—!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소리만 들어도 시원한 물줄기는 새로 만든 길을 원래 자기가 지나가야 할 길인 것처럼 매끄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옆으로 확 꺾는 것이 아닌, 길게 곡선으로 쭉 빼놓았기 때문에 나무와 돌로 새로 쌓은 방둑은 별 무리 없이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엘레인은 질퍽한 바닥과 자갈들을 훤히 드러낸 기존의 물길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역시 아르닐 오빠야. 어떻게 몇 분 만에 이런….”
“저기, 엘레인?”
“응? 왜 불러?”
엘레인의 칭찬에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그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우물쭈물거리며 말하기를.
“아르닐이 아니라 아르 오빠라고 한 번만 불러주면 안 될까?”
“어… 아르 오빠?”
“후우. 보람차구나.”
아르닐이 대뜸 주먹을 꽉 쥐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동생에게 도움을 조금 줬을 뿐인데, 다섯 살 이후로 들어보지 못했던 애칭을 들을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값진 보상이 주어지자, 아르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혹시 뭐 더 필요한 거 있어? 말만 해. 내가 도와줄게.”
“아니, 괜찮아! 물길을 새로 만들어준 것만 해도 이미 엄청난 도움을 받았는걸.”
“그래?”
아르닐은 아쉬운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방해꾼도 없겠다. 실로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건만, 엘레인은 이미 큰일을 해낸 오빠를 더 힘들게 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쩌지?’
아르닐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렇게 되면 달콤한 보상인 ‘여동생의 애교’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
골똘히 생각하며 머릿속을 팽팽 돌리고 있는 그때. 레눔이 엘레인 곁으로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장 걱정했던 부분들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상황은 말 그대로 역전했다.
필요한 석재는 제 모양을 갖췄고 양도 충분하다. 거기다 물길까지 새로 만들었으니, 지금 당장 작업을 해도 전혀 문제없다.
단.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지금 숫자로 다리 완공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으음. 지금부터 밤낮없이 매달린다면 일주일 만에 완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엘레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현재 일꾼은 고작 세 명. 그들이 밤낮없이 도와주어야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에 완공이 가능하다니….
심지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6일밖에 없다.
비가 내린 직후인 전날은, 다리를 세울 공간의 측정과 설계도면 작성 및 검토. 그리고 채용 가능한 인부 물색과 자재를 옮기는 데 사용했으니까 말이다.
“막막하군요.”
“그러게요….”
앞서 모든 준비가 갖춰지면 뭐 하나. 일손이 부족한데.
엘레인과 레눔이 막연함을 느끼고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귀를 쫑긋거리며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르닐이 입꼬리를 들썩였다.
‘그런 거라면 내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르닐의 마법 활용법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린 시절부터 마나를 바람 원소로 바꾸어 부드럽게 문을 닫는 등,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테크닉을 보여주기도 했으니까.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중력 마법인 리버스 그래비티를 이용해 자재들을 옮겨주면, 고작 세 명의 인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공사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일주일은 무슨.
놀고먹고 쉬면서 해도 약 3일이면 끝나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거절하지 못하겠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울 것이다.
비록 방금 전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르 오빠는 그늘에 앉아서 푹 쉬어야 해!’라고 말했던 여동생이었지만(대체 언제?) 지금이라면 분명 허락해줄 터.
다시 여동생의 애교를 볼 생각에 히죽 웃고만 아르닐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
“레눔!”
“…?”
그 순간. 누군가가 아르닐의 말을 자르고 등장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레눔은 우르르 등장하는 노마스족 친구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하하. 당연히 자네 일을 도와주려고 온 거지.”
“나를… 도와?”
레눔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멋들어지게 웃으며 레눔의 너른 등을 토닥거렸다.
“사실 네가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건 예전부터 쭉 알고 있었어.”
“그래. 매번 일을 끝마치자마자 바로 게르에 쏙 들어가는데, 어느 누가 수상하게 여기질 않겠나?”
“매일 밤 자기 전, 레눔이 건축학 전공책을 읽고 있다는 건 족장님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
하얀 미소를 지으며 하는 친구들의 말에 레눔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자신의 아들, 라칸을 쳐다보자 그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뭘 이제 와서 쑥스러워하고 그러나?”
“그렇게 멀거니 서 있지만 말고, 얼른 일이나 달라고. 양들한테 밥 먹인다고 거짓말치고 이쪽으로 온 거란 말이다.”
“너희들 진짜….”
무뚝뚝한 레눔의 얼굴이 풀어지며 입꼬리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친구들이 족장에게 혼날 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돕기 위해 왔다고 하니 가슴이 찡해진 것이다.
“이 친구야. 그래도 양들 밥은 주고 왔어야지.”
“하핫! 그거라면 내 아들 녀석한테 시켰으니 걱정 말라고.”
“하하하.”
“호호호.”
감동의 물결이 넘쳐흐르는 공간 속.
모두가 훈훈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지만, 단 한 명. 아르닐만은 그러지 못했다.
“이건 뭐…. 내가 낄 자리는 없는 것 같네.”
일손이 고작 셋에서 스무 명 넘게 확 불어났다.
아르닐은 수인들 사이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엘레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레인의 칭찬. 독점 받기는 글렀네.’
일꾼이 늘어났으니 아르닐의 마법은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지금 끼어들면 그림이 이상하게 될 것이다.
그는 곧바로 일을 시작한 수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된 건가.’
분위기 파악을 할 줄 아는 아르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음? 바람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어허. 하늘도 우리를 축복하나 보네.”
기존에 일을 하던 인부들과 곧장 투입된 수인들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물러나고 시원한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오는 것에 무척 반가워했다.
당연하지만 한여름인 지금 이러한 기후 변화는 비정상적인 일이다.
놀란 엘레인이 옆을 돌아보자 간단하게 강가의 시원한 공기를 끌어다 은은하게 퍼트리던 아르닐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왜?”
아르닐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사람들과 수인들은 더욱 쾌적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분위기 메이커는 바로 아르닐.
엘레인은 숨은 공로자인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아르 오빠.”
“…뭘 이런 걸 가지고.”
시치미를 떼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르닐의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쾌적한 공간에서 왁자지껄하게 자재를 나르고 기초 공사를 시작하는 그들.
그렇게 수인들과 인간들이 처음으로 만든 합작. ‘협동과 화합 다리’의 위대한 탄생이 막을 올렸다.
* * *
그로부터 3일 뒤.
레눔의 요청에 따라 긴가민가한 얼굴로 양 5,000마리를 이끌고 온 족장 필립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다리를….”
깔끔하게 완공된 다리 앞에는 레눔과 라칸. 그리고 황태후와 엘레인이 있었다.
이제 막 일주일 기한 중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저렇게 완벽한 다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필립은 여유롭게 웃고 있는 그들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아치형 다리를 보고 하얗게 센 염소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겉보기에만 완벽해 봤자 소용없어!”
“후후. 과연 그럴까요?”
“그, 그 웃음은 뭔가? 자네가 아무리 내 친구라도 다리가 무너져서 양들을 잃으면 그 수만큼 전부 청구할 거야!”
“공과 사는 철저해야 하는 법. 그거야 당연한 거지요. 얼른 양들이나 풀어보시지요.”
“끄응.”
거래가 성사됐던 그날의 불안함이 불현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필립은 긴장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았다.
‘양 5,000마리가 한꺼번에 지나가도 멀쩡한 다리?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다리가 긴 만큼 버텨야 하는 하중도 늘어난다.
기본 자재들만 해도 무게가 엄청날 텐데 심지어 튼튼하게 짓는답시고 무거운 돌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뭘 그리 걱정하나. 이건 내가 이긴 것과 다름없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필립은 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쪽을 향해 손짓을 하자, 사방에서 양을 포위하듯 서 있던 노마스족 수인들이 컹컹! 소리를 내며 양들을 자극했다.
그러자.
메에에에—!
우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양들이 다리를 향해 뛰어간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필립.
10미터. 5미터. 1미터…!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온 양들이 석재를 밟는 순간!
메에에에—!
“이, 무슨…?”
그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눈에 힘을 주던 필립이 입을 떡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흥분한 양들이 땅이 울릴 정도로 힘차게 떼를 지어 뛰어가는데도 다리는 흔들림 하나 없었으니까 말이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광경.
필립은 눈앞의 상황이 너무나 어이가 없고 또 황당무계하게 느껴졌다.
장렬하게 무너질 거란 생각과 달리 무척 깔끔하고 안정적으로 양 수천 마리가 폭포의 건너편으로 건너가 버렸다.
여유롭게 반대편의 목초지로 뛰어가 풀을 먹으며 신나게 뛰노는 양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만들어낸 레눔과 라칸.
그들의 천재적인 건축 실력에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엘레인이 크게 외쳤다.
“성공이야!”
“나, 나 방금 온몸이 막 떨리고… 으!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네.”
엘레인의 외침에 라칸이 가슴 가득히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글썽거렸다.
뿐만 아니었다.
“와아아!”
“이봐, 레눔! 믿고 있었다고!”
“축하해, 라칸!”
언제 왔는지, 노마스족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려와 기뻐하며 축하했다.
그들의 환호성에 멍하니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필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호통을 쳤다.
“이놈들! 일 안 하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게야!”
“으아악! 족장님 뿔났다!”
“도망가자!”
“컹컹!”
개구쟁이 아이들이 신이 나서 어른들의 뒤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수인들은 뒤로 조금 물러나기만 할 뿐 여전히 멀뚱멀뚱 필립과 그 뒤의 일행을 쳐다보았다.
필립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때.
“이제 됐죠?”
필립의 하얗게 센 눈썹이 들썩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라칸 또래의 아이가 말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리 완공 사실을 알리기 전, 황태후가 미리 소개시켜줬기 때문에 저 아이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필립은 억울한 얼굴로 황태후의 손녀인,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뭐가 말이냐?”
“라칸이요. 이번 거래에서 우리가 이기면 제국에서 수학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필립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다리를 완공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저 작은 아이였다.
고집불통 발론드 공작에게서 석재를 얻어내고, 엄청난 기사를 데리고 와 돌을 깎게 만들었으며, 대단한 마법사를 고용해서 물길을 만들어낸 것까지….
거처에서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데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역시 황태후가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필립의 입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몰라!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
“네…?”
너무나도 뻔뻔한 대응.
누가 발론드 공작과 친구 아니랄까 봐, 보이는 반응도 참으로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