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황궁에 도착한 엘레인은 눈앞의 상황에 무척 당황했다.
지금쯤 일로 바쁠 황제와 적색 마탑주와 함께 있다던 오르칼이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군.”
“엘레인!”
황제와 오르칼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꽤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뜨거운 햇볕에 노출된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빠? 오르칼 오빠? 두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요?”
“우리 엘레인이 온다고 해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지. 거기서 별일은 없었고?”
“그렇긴 한데….”
황태후가 미리 언질을 준 걸까?
힐끔 돌아보니 황태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내 딸을 도운 수인 건축가인가?”
그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황제가 라칸과 레눔 부자를 보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회의에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황태후가 전달한 편지에는 수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엘레인이 직접 선택한 자들이니 인성이나 실력 면에서 별다른 심사가 필요 없겠지만, 그럼에도 아버지 된 자로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필요는 있는 법.
갑작스레 쏘아져 오는 싸늘한 눈빛에 잔뜩 긴장한 두 수인은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운 채 고개를 숙였다.
“네, 넷!”
“베네딕트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당황했지만 잽싸게 답하는 라칸과 침착하게 예를 갖추는 레눔.
깍듯한 그들의 행동에 매끈한 턱을 매만지던 황제는 만족스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당히 예의가 바른 친구로군. 이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도록.”
황제의 명령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갑자기 주위에 인간 벽이 생성되자 수인 부자는 당황했으나, 이내 엘레인에게 눈인사를 한 후 조심스레 시종들의 뒤를 따라갔다.
대부분의 수인들이 제멋대로인 데다가 난폭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과 달리 상당히 협조적이고 얌전한 모습.
그제야 안심이 된 황제는 엘레인을 돌아보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가자.”
“엥? 어디로요?”
“착한 일을 했으니 선물을 받아야 하지 않나.”
이건 또 뭔 베스타클로스가 착한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말이지?
황제가 멀뚱멀뚱 서 있는 엘레인을 잡아 부드럽게 이끌자, 안 그래도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와 있던 라네즈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르닐이 끼어들었다.
“나는요? 나도 일 도와줬는데!”
“바보 형. 지금 그게 문제야? 아버지가 엘레인을 낚아채 가고 있잖아!”
“헉…! 에, 엘레인은 이제부터 우리랑 놀 거란 말이야. 이제 겨우 시간 났는데,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순서는 지켜야지!”
“흐음.”
두 아들의 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걸까?
걸음을 멈춘 황제가 쌍둥이 형제를 슥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라네즈. 거기 가서 일을 돕기는커녕 방해만 했다지?”
“…어?”
“어디 보자. 황좌를 닦을 때가 된 것 같은데….”
“그것만큼은 절대 싫어어!”
움찔 굳은 라네즈가 그대로 등을 돌리더니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아르닐은 점차 멀어지는 쌍둥이 형을 매우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자신만만하게 콧대를 세웠다.
“저는 확실히 도움이 됐습니다.”
아르닐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닐은 무려 새로운 물길을 뚫어내는 아주 중대한 작업을 홀로 해냈다. 라네즈처럼 떨궈내기란 요원했기에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뭐,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오르칼.”
“예.”
엘레인을 향해 만면 가득 웃음을 짓고 있던 오르칼이 정색하며 아르닐을 바라보았다.
흠칫. 아니나 다를까 살짝 움츠러드는 아르닐을 향해 오르칼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희들과 노는 것이 엘레인에게 보상을 주는 것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 그야….”
“믿을 수가 없네. 설마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던 거였나? 아무래도 나와 깊은 면담이 필요하겠….”
“아, 알았어. 나중으로 미루면 되잖아!”
빽! 소리친 아르닐이 라네즈와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도망갔다.
첫째 형님과의 오붓한 면담이 그리도 싫었던 것일까.
아주 질색팔색을 하며 공중으로 도망치는 아르닐의 뒷모습에 오르칼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모든 방해꾼이 사라졌군요.”
“아주 잘했다. 과연 내 뒤를 이을 재목이야.”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던가.
서로 힘을 합쳐 쌍둥이 형제를 몰아낸 부자는 자연스럽게 엘레인의 양손을 하나씩 차지했다.
참으로 죽이 잘 맞는 모습.
엘레인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그 보상이라는 게 뭐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람.’
뭔지는 몰라도 범상치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엘레인은 궁금증도 함께 삼긴 채 두 사람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황궁 정원.
엘레인은 원래 알고 있던 황궁 정원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황궁 정원 옆에 뭐가 생겼네? 근데 이상하다…. 발론드 공작령이 생각나는 건 왜지.’
엘레인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원 구석에서 조용하고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빠. 저 사람들은 대체 뭐예요?”
“음? 아, 신경 쓸 것 없다.”
“네? 하지만….”
누가 봐도 저건 실려 가는 것 같은뎁쇼?
엘레인은 온화한 이곳 분위기와 달리 세상 긴박한 저쪽 상황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심지어 실려 가는 사람의 복장을 보아하니 요리사나 파티시에 직종인 게 분명하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아주 무더기로 이송되고 있는 건 무척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닐까?
‘뭐, 황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후죽순 물음표를 쏟아내던 엘레인은 이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러는 것도 아닐 거고 무려 제국의 대빵이 괜찮다고 하는데 계속해서 걱정하는 것도 그렇다.
엘레인은 보이는 것과 달리 정말 별것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황제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게 뭐예요?”
“과자로 만든 집이다.”
“어….”
엘레인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훌륭하다, 우리 황녀님!]
[장하다, 우리 황녀님!]
하나같이 낯부끄러운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펄럭이는 곳 뒤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집에서 달콤한 향기가 솔솔 풍겼다.
새로운 건축물인 줄 알았던 것은 놀랍게도 과자로 만든 집이었던 것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엘레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이거 언제 만든 거예요?”
“어제 만든 거니 걱정하지 마라. 아직 바삭바삭할 것이다.”
“아하.”
친절한 황제의 답변에 엘레인은 일종의 감동을 느꼈다.
그제야 아까 사람들이 무더기로 실려 갔던 이유를 깨달은 까닭이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하루 만에 이 커다란 집을 만들 수 있겠어?’
그런데 그것을 우리 황궁 소속 파티시에들이 해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결과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어쩌면 제국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으로 길이 남을 수도.
하지만 말이다.
그 대가라고 해야 할까…. 황제의 무리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파티시에들은 과로로 장렬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엘레인은 황망한 시선으로 달콤한 과자집을 흘겨보았다.
눈앞의 아름다운 집이 파티시에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달콤한 냄새가 더할 나위 없이 씁쓸하게 변해버렸다.
그러므로.
“이건 좀….”
난 절대 저거 못 먹어. 아니, 안 먹으면 그게 더 죄인이려나?
난데없는 상황에 엘레인은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엘레인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자, 황제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혹,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드물게 당황한 황제가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마법으로 특수 처리한 것이다. 초콜릿이 녹을 일은 물론이고 개미와 벌떼들이 꼬일 일도 없지.”
“헉! 마법사들도 갈아 넣은 거예요?”
“…음.”
뭔가 자꾸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튀어나온다.
황제가 곤란한 듯 침음을 흘리자,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오르칼이 기회를 포착한 사람처럼 불쑥 끼어들었다.
“있잖니, 엘레인. 내가 준비한 것도 따로 있어.”
“어? 오르칼 오빠도?”
엘레인이 놀라 묻자 오르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딧불이 꽃이라는 건데, 적색 마탑주랑 같이 개발한 품종이야. 여기 이건 시험으로 피워낸 꽃이고 이건 씨앗 주머니. 가지고 가서 영지에 심어 봐.”
“우와! 이거 진짜 예쁘다.”
반딧불이 꽃을 받아들인 엘레인이 활짝 웃었다.
꽃잎이 살짝 투명한 것이, 마치 실크 재질의 하얀색 옷을 보는 느낌이다.
자신이 준비한 선물과 천지차이로 보이는 반응에 황제는 더욱 당황했다.
“…그런 못 먹는 것보다는 과자의 집이 더 좋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저건 너무 큰걸요? 예쁜 집을 굳이 먹어서 없애기도 그렇고.”
쿠궁. 선물을 받은 엘레인이 맛있게 먹어줄 것을 기대했던 황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표정도 저 씨앗을 받을 때가 더 좋아 보이니….
엘레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욱 기울어져 있는지는 누가 봐도 뻔했다.
“흠흠.”
그때 오르칼이 헛기침을 하며 황제의 시선을 끌었다.
황제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오르칼이 여상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가 이긴 것 같군요.”
씨익. 짓는 미소는 며칠 전 황제가 지었던 미소와 퍽 닮아있었다.
* * *
씨앗을 품에 안고 방으로 돌아온 엘레인은 가장 먼저 라칸을 찾았다.
“어때? 방은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너무 넓어서 뛰어다녀도 될 정도야.”
라칸은 이 공간이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입을 헤벌쭉 벌리며 꼬리를 붕붕 흔드는 것이 신이 난 강아지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심지어 레눔은….
“아저씨 뭐해요?”
“아, 이음새의 처리나 건축 양식을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역시 장인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지 배울 것이 많군요.”
차분하게 쭈그려 앉아 방구석을 바라보고 있던 레눔이 쑥스럽게 볼을 붉혔다.
그나마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라칸처럼 꼬리를 주체할 줄 몰라 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표정은 사춘기의 그것과도 닮아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가 지어지게끔 했다.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요. 혹시 따로 불편한 건 없어요?”
“이미 충분한 편의를 누리고 있습니다.”
“맞아! 오래 있기엔 부담스럽겠지만…. 어차피 조만간 아카데미로 떠날 거니까.”
말을 끝마친 라칸은 잠시 엘레인의 눈치를 보았다.
일단 아카데미로 보내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살아갈 거처도 걱정되고 말이다.
“아카데미 건은 걱정하지 마. 수인족이 제국에서 수학할 수 없었던 건 지금껏 이종족이 인간 사회에서 활동한 전례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아빠가 내일 있을 회의에서 법을 개정한다고 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 할아버지를 설득해준 것도 그렇고 정말 네가 아니었음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야.”
“뭘 또 진지하게 분위기 잡고 그래. 친구를 돕는 건 당연한 거지.”
“친구….”
엘레인의 말에 감동을 받은 걸까?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고 격렬하게 꼬리를 떨던 라칸이 결심한 듯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있잖아. 처음 널 만났을 때 못 되게 대한 거 미안해.”
“별로 못되지도 않았는데 뭘.”
“아니야, 나 엄청 까칠하게 대했어. 그래서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그, 그래?”
“응. 그러니까 세계 최고의 건축가가 돼서 돌아올게. 그리고 너희 영지에 꼭 이바지할 거야. 난 은혜를 배로 갚는 수인이거든.”
아버지한테 그렇게 배웠어.
라칸이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레눔이 ‘자랑스럽다. 내 아들!’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건 꽤 고마운 발언인걸.’
마찬가지로 라칸의 말에 흐뭇함을 느낀 엘레인이 빙긋 웃었다.
안 그래도 실력 좋은 건축가를 구하고 있던 와중, 뛰어난 실력을 지닌 그들이 자진해서 플로스 영지에 도움이 되고자 하다니….
엘레인으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