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마치고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와중. 엘레인은 믿기 힘든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뭐? 측량사가 납치당한 것 같다고? 누구한테?”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안내를 마치고 복귀하려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서 되돌아가 보니 이런 쪽지가….”
혹여나 날아갈까 봐 걱정됐는지 아주 친절하게도 쪽지는 돌멩이로 고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쪽지를 확인한 시종은 곧바로 데니를 찾았지만, 정말 납치해간 게 맞는지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쪽지를 건네받은 엘레인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보아라! 플로스 영주여.
네놈의 측량사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
측량사를 살리고 싶나?
그렇다면 이곳 숲의 버려진 오두막으로 500골드를 직접 가지고 와라.
기한은 하루. 만약 기사들을 대동하고 온다면 바로 측량사를 죽이겠다.
추신. 끝이 아니다. 진짜 요구사항은 위의 사항을 모두 지켰을 때 말하겠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쪽지를 읽고 난 감상은 어처구니없음이다.
기사들을 대동하지 말라는 조건은 그렇다 쳐도 500골드가 진짜 요구사항이 아니라니.
돈 외에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일단 찔러나 보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하기 위함?
뭐가 됐든 좋지 않은 상황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자, 뒤에서 쪽지의 내용을 함께 확인한 카론이 살기를 줄줄 흘렸다.
“제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안 돼. 나 보고 돈을 직접 가지고 오라고 했잖아. 기사가 오는 건 안 된다고 적혀 있어.”
“기사 혼자가 아니라 ‘기사들’이라고 적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보통 기사가 아니라 황녀 저하의 직속 호위 기사입니다.”
“어…. 그놈들이 그걸 구분할 정도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정 그렇다면 갑옷을 벗고 시종 옷으로 갈아입겠습니다. 설마 놈들이 고작 시종에게까지 겁을 먹고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지요.”
카론의 말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간 크게 플로스 영주이자,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데 고작 시종에게 쫄지는 않을 테니까.
‘나 혼자 가겠다고 하면 엄청 화내겠지.’
운디네가 있어서 엘레인 혼자서도 충분하지만, 변장까지 해가며 황녀님을 지키고자 하는 카론이었다.
그런 그에게 ‘혼자서도 잘해요!’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가는 엄청난 잔소리가 뒤따라올 게 분명했다.
“알았어. 그 정도면 들키진 않겠지. 카론이 곁에 있으면 든든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 믿음에 꼭 보은하겠습니다.”
엘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론이 살기 가득한 눈을 곱게 휘며 허리춤의 검집을 꽉 잡았다.
만나면 곧바로 양단해버리겠다는 듯 살벌한 기세에,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검을 가지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이 검은 너무 눈에 띄는군요.”
흐음. 어떡한담.
카론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 집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대신 이 단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품 안에 숨겨놓으면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요.”
“오. 좋은 단검이로군요. 감사합니다.”
“???”
무기가 없는 것보단 역시 있는 게 낫지.
카론과 집사가 흡족한 시선을 주고받는 동안 엘레인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단검 거래 현장을 바라보았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엘레인이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기, 집사 아저씨? 왜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거야…?”
“아. 이건 예전에 캐시 양이 호신용으로 사용하라며 선물로 주었던 겁니다. 집사라면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해서 바로 설득당해버렸지요. 그때 이후로 가끔 훈련하면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허.”
“…….”
집사의 말에 엘레인은 입을 뻐끔거렸다.
어쩐지. 나이가 들면서 노쇠하기는커녕 혈색이 더 좋아진 것 같더라니.
뿐만 아니라 집사의 체격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좀 더 커져 있었다.
그것이 훈련의 성과라는 것을 깨달은 엘레인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보통 단검을 선물로 주나?
호신용으로 사용하라고 준 거니까 의도가 이상한 건 아닌데…. 덕분에 몸도 더 건강해지신 것 같고.
아니, 그래도 역시 나이 든 할아버지께 ‘당신 몸 하나는 잘 간수해야죠.’라며 단검을 선물로 주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이거 노인 학대 아니냐고.
복잡한 생각에 엘레인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반면 집사의 단검을 이리저리 확인하고 품에 잘 갈무리한 카론이 쪽지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단순한 산적이나 도적 무리인 것 치고 상당히 고압적인 말투로군요.”
“내가 보기에도 단순한 도적 무리는 아닌 것 같아. 목적이 돈은 아닌 것 같고.”
애초에 이 근방엔 도적 무리가 돌아다닐 수 없다.
제국 어딘가에 도적이나 산적 무리가 나타났다 하면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에 바로 황제의 명령하에 소탕당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베네딕트 제국은 놈들이 가장 기피하는 장소가 되었다.
군사력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플로스 영지가 이토록 평화로운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테러 집단? 그놈들이 벌써 기어 나온 걸까? 아니면 광신도 집단이라든가….’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어쨌든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다.
감히 측량사를 납치한 것도 그렇고 그를 인질로 삼아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레인은 주먹을 콱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녀석들이 요구한 500골드. 바로 준비해줘.”
“놈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순순히 들어줄 생각은 없지. 그래도 일단 안심은 시켜야 하니까.”
“과연 허를 찌르고 실을 꾀하려는 계책이로군요.”
카론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한 말씀 올렸다.
“황제 폐하나 황자님들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될까요?”
“나한테 볼일이 있다는데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야 없지. 그리고 카론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황녀님….”
엘레인의 말에 깊이 감복한 걸까?
카론이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결연에 가득 찬 얼굴로 외쳤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녀님을 꼭 지키겠습니다!”
“그러니까 목숨까지는 걸지 말래도….”
* * *
시간이 흘러 약속 당일.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 속. 엘레인과 카론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뭐야. 밖에는 없나 본데?”
“아무래도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네. 들어가자.”
엘레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곁에 있는 카론과 머리 위의 운디네가 든든하긴 하지만, 그래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안전을 기하는 편이 좋을 터.
느릿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위를 경계하면서 걸어간 엘레인은 낡은 오두막 앞에 서서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썩고 문드러진 나무가 내는 기분 나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딱딱하게 굳은 채로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시커먼 내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그곳에서 여러 명이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한두 명이 아니었어.’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긴장감을 놓지 못한 엘레인은 저도 모르게 카론의 옷자락을 꼭 쥐고 말았다.
그에 카론은 잘게 떨리는 엘레인의 손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살포시 덮어주었다.
“드디어 왔군.”
“얼른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있나?”
안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밝은 바깥과 달리 내부는 어둠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니 그새 어둠에 적응한 눈이 내부를 밝혀주었다.
‘새까만 복면과 옷을 입은 남자가 중앙에 세 명. 그리고 뒤쪽에 다섯?’
중앙에 있는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체형이 풍만하거나 말랐다.
딱 봐도 저들 중에 의뢰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엘레인은 순순히 놈의 말에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뒤쪽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중앙에 선 남자들과 달리 뒤쪽에는 근육으로 뒤덮인 듯 튼튼한 체격을 가진 복면인이 서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그토록 찾고 있던 남자가 낡은 의자에 앉아 축 늘어져 있었다.
‘데니!’
안쓰럽게도 그는 온몸은 포대기에 꽁꽁 묶여 있었다.
축 늘어진 몸이 그동안의 고초를 보여주는 듯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복면인들이 엘레인의 시선을 가리듯 데니의 모습을 그 커다란 몸으로 감추었다.
뻔히 보이는 의도에 입술을 앙다문 엘레인은 오두막의 중앙까지 걸어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쯧.”
풍만한 체형의 남자가 그런 엘레인을 향해 혀를 차며 불만을 토로했다.
“옆에 뭔갈 붙이고 왔군.”
“시종이야. 딱 보면 알잖아?”
“흠. 뭐 생긴 걸 보면 칼 한번 못 잡아본 얼굴이긴 하군. 그런데 하필이면 시종이라니. 아무리 혼자 오는 게 무서워도 그렇지, 너무 쓸모없는 녀석을 데려온 거 아닌가?”
하하하!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어 재끼는 모습에 카론의 주먹이 꽈악 쥐어졌다.
당장이라도 단검을 뽑아내어 놈들의 목에 쑤셔 박을 것 같은 분위기.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엘레인은 다급히 제 손을 덮고 있는 그의 손을 역으로 덮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일을 그르치면 안 돼.’
‘…죄송합니다.’
엘레인의 눈짓에 재빨리 정신을 다잡은 카론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마터면 놈들의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목을 썰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아무리 황녀님을 조롱하는 놈들을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도 그렇지, 얕은 인내심 때문에 황녀님을 곤란하게 해선 안 됐다.
“후우.”
마음의 안정을 찾은 카론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를 눈꺼풀 안으로 감추자, 그것을 겁먹은 것이라 착각한 납치범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우리 말만 잘 들으면 해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라.”
“그래서 돈은 가져왔나?”
“여기 있다.”
카론이 들고 있던 커다란 주머니를 바닥에 던지자 금화가 우수수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 무게가 엄청난지, 썩어 문드러진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상당한 굉음이 발생했다.
“…….”
공중으로 치솟는 먼지 사이로 잠시 움찔한 남자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뒤쪽에 있는 복면인에게 턱짓을 했다.
“확인해 봐.”
“예.”
불려 나온 남자가 흩어진 금화를 모으고 낡은 테이블 위에서 숫자를 세었다.
이윽고 총 500개의 금화를 확인한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흥. 당연히 그래야지.”
엘레인은 코웃음을 치는 남자를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돈을 주긴 했지만,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후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들에게 좋은 협상인으로 남는다는 것은 호구로 기억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오늘은 잘 넘어간다고 해도 분명 상습적으로 같은 일을 벌일 거야. 그러니까 놈들의 정체를 밝히고 단숨에 일망타진해야 해.’
우선 중앙에 있는 놈들 중 하나가 의뢰인 본인이거나 그와 관련된 자임은 틀림없다.
다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당장은 모르겠지만, 카론과 엘레인이 힘을 합쳐서 복면을 벗겨내면 될 터.
하지만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다.
적어도 측량사의 신병을 확보할 때까지는 저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그래서 내게 요구할 게 뭔데?”
“흐음. 아까부터 말이 짧군.”
“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든 놈들한테 고운 말이 나갈 리가 없잖아.”
“…뭐, 상관없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풍만한 몸체의 남자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말하기를.
“커험. 꼬맹이 영주,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그냥 도로 공사를 취소하고 예전처럼 조용히 살면 돼. 그렇게 하면 측량사는 무사히 돌려주지.”
“뭐? 돈을 주면 측량사를 돌려주기로 했잖아!”
“최소 조건을 갖추면 죽이지만 않는댔지 돌려준다고 하지는 않았다만?”
부들부들.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 맞은 엘레인은 바짝 약이 올랐다.
그에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하게 물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측량사의 목숨? 아니면 도로 공사의 취소?
이미 정해져 있겠지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황녀의 모습이 그렇게나 통쾌할 수가 없다.
남자. 아니, 노클리 자작은 엘레인의 얼굴처럼 새빨간 루비를 호 불며 옷으로 닦아냈다.
‘황녀라더니 별거 아니군. 이렇게 쉽게 꼬리를 말아서야.’
노클리 자작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 엘레인의 눈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정확히 노클리 자작의 씨알 굵은 루비 반지로 향해 있었다.
‘돈을 요구했는데 값비싼 반지를 끼고 있다? 게다가 저 거만한 말투 하며 전혀 부족하게 살아온 것 같지 않은 거동 하며…. 이거 아무리 봐도 최소 귀족 같은데.’
근데 귀족이 왜 이런 괴상한 요구를 하는 걸까?
…생각해 보자.
우선 놈들은 일차적으로 측량사를 납치해서 도로 공사의 진행을 방해했다.
그리고 그를 인질로 잡아 도로 공사가 취소되길 간절히 원하고 있고 말이다.
도로 공사의 방해. 그리고 귀족처럼 보이는 의뢰인.
‘…솔직히 이게 진짜라면 정말 유치하고 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엘레인은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놈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맹랑하게 질문했다.
“도로 공사를 취소하면 너희들한테 무슨 이득이야?”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시나?”
“궁금하잖아. 아니면 말하기 좀 그런 거야? 그냥 솔직하게 등 좀 따시고 배도 좀 불러진다고 말해도 되는데. 남의 불행을 먹고 살면서 말이야.”
“이, 이놈! 감히 우리를 우롱하는 거냐!”
“어? 성질내는 거 보니까 제대로 찔렀나 보네?”
씩씩 성을 내는 놈들을 보며 엘레인은 확신했다.
지방의 몇몇 영지에는 통행세를 받는 게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페른 영지와 플로스 영지의 도로가 이어진다?
더 이상 여행객들은 디저트 축제를 즐기기 위해 다른 영지로 우회할 필요가 없게 된다. 게다가 통행세까지 물지 않으면 더더욱 이쪽 도로만 사용하려고 들겠지.
자, 그렇다면 말이다.
그 도로가 이어지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귀족이 누구인지는 딱 나오지 않는가?
“너희들 우리 영지 근방에 있는 영주들이구나!”
엘레인이 외치자, 앞에 나와 있던 영주들이 크게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서둘러 입을 연 노클리 자작은 말까지 빠르게 더듬었다.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이미 다 들켰는데 그만하지?”
“빌어먹을 계집이!”
확신에 가득 찬 눈빛에 노클리 자작은 주먹을 떨었다. 저기까지 추리를 했다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도 시간문제.
하지만 말이다.
“들켰다니 어쩔 수가 없군.”
“자수하기로 한 거야?”
“무슨 소리! 너희들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
노클리 자작은 훨씬 더 깔끔하고 뒤탈이 없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어차피 목격자도 없는데 굳이 위험 요소를 살려놓을 필요가 없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노클리 자작은 엘레인을 척 가리키며 웃었다.
“괜히 머리를 굴리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죽여라!”
“자, 자작!?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녀는 황족이오!”
“우리 정체가 들통난 이상 어쩔 수 없소! 뭘, 아무리 황제라 해도 목격자가 없으면 우리인 줄 모를 터. 뭣들 하느냐! 어서 저것들을 싹 없애버려라!”
의뢰주의 외침에 가만히 서 있던 복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심인가.’
이런 일을 아예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말 자신을 죽이려 들다니.
어처구니없음 반, 긴장감이 반쯤 맴돌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런 엘레인의 앞을 가로막은 카론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단번에 양단할 기세로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런데.
“?”
“뭐, 뭐야?”
숨 막히는 압박감을 내뿜던 복면인들이 사정거리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달려들기는커녕 멀뚱멀뚱 서 있는 모습에 카론의 눈이 가늘게 좁혀질 무렵. 갑자기 등을 돌린 그들이 영주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당황한 노클리 자작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누가 봐도 저쪽으로 붙어버린 듯한 모습에 입술을 덜덜 떨자, 복면인들이 칼을 겨누며 말했다.
“황족 살해는 계약서에 없는 내용입니다만.”
“뭐라? 그래서 지금 우릴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를. 그것도 황족을 해할 수는 없지 말입니다.”
확실히…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베네딕트 제국 내에서 황족 시해를 시도한단 말인가?
제국 황제는 목격자가 없더라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고 딸의 복수를 하려고 들 것이다.
고작 돈 몇 푼에 일가친척에 사돈의 팔촌의 목숨까지 날아갈 판이다. 제정신이라면 지금 빨리 황녀의 편으로 갈아타야 했다.
리더처럼 보이는 이가 그리 말하자, 나머지 복면인들이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뜬금없이 전개되는 상황에 엘레인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들이 우리 편으로 갈아탔다는 거지…?’
“아무래도 상황이 역전된 것 같군요.”
“뭣!”
엘레인의 생각에 확인사살을 하듯, 잠깐의 정적을 뚫고 카론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말 그대로 역전된 상황.
예상에도 없던 상황에 영주들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이, 이제 어떡합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않았어!”
공포심에 사로잡힌 그들은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복면인들 때문에 숨이 다 막혀왔다.
궁지에 몰린 노클리 자작은 결국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패를 꺼내 들었다.
“오, 오지 마!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이 녀석의 목숨은 없어!”
품에서 꺼내든 날카로운 단검을 인질에게 겨누자,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요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해했던 엘레인도 그 광경에 화들짝 놀라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그 손 안 떼?”
“닥치고 뒤로 물러서!”
다가오려는 그녀에게 빽 소리친 그는 점점 더 단검을 인질 가까이에 갖다 대었다.
“이 녀석의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움직여도 좋다. 그리고 꼬마 영주. 이 녀석을 구하고 싶나?”
엘레인이 말없이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노클리 자작이 이빨을 씨익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이 측량사 대신 네가 인질이 되어주어야겠다.”
“그게 무슨!”
카론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놈을 쏘아보았지만, 놈은 그저 웃을 뿐이다.
‘저 계집을 이용해서 이곳을 탈출하겠어!’
우선 지켜줄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안전하게 탈출하는 게 중요하다.
노클리 자작은 머리가 있을 법한 곳을 덥석 움켜잡으며 커다란 자루에 닿은 단검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 누굴 인질로 잡겠다고?”
노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가 낡아빠진 오두막 내부를 웅웅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자루.
화들짝 놀란 노클리 자작은 그 반동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