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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138/417)

138화

엘레인의 눈이 데룩 굴러갔다.

회귀 전 엘프들의 이유 모를 호의를 받으며 그들의 마을에 초대도 받아본 엘레인이었기에 대충 엘프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몇백 년 동안이나 엘프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냥 새로운 타입의 고대어인가 하며 넘어가겠지.

카론의 타당한 질문에 잠깐 말문이 막혔던 엘레인은 이제는 단골이 된 변명을 했다.

“아, 아스터 왕국의 비밀 서고에서 본 적이 있어.”

“아스터 왕국에 왜 그런 것이….”

“거긴 뛰어난 정령사가 건국한 왕국이잖아. 그러니까 엘프에 대한 관심이 많았겠지.”

정령을 다루는 데에 발군인 자들을 꼽자면 단연코 엘프라고 할 수 있다.

무려 몇백 년 동안이나 교류는커녕 이제는 멸종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도는 그들이었지만, 동화책이나 오래된 역사서에는 그들이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검술만 바라보고 산 카론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았다.

확실히 신빙성이 있는 엘레인의 말에 카론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곧바로 의심을 거두었다.

‘하긴 아무리 황녀님의 외모가 출중하여도 엘프일 리가 없지. 나도 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덤덤한 얼굴의 카론이 속으로 주접을 떨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이놈의 입은 왜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해가지고 진이 다 빠지게 만든담.’

어쨌든 잘 넘어가서 다행이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자고 연신 입조심을 되뇌며, 엘레인은 손가락을 들어 단지를 가리켰다.

“일단 챙겨가자. 뭔지 모르니까 뚜껑은 열지 말고.”

“알겠습니다.”

엘레인은 조심스레 단지를 끌어안는 카론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엘프어가 적혀 있으니 최소한 고대 유물급 값어치를 가지고 있겠네.’

도로 만들겠다고 땅 좀 엎었다고 상당한 양의 꽁돈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수입이니만큼 엘레인의 기분도 날아갈 것처럼 좋아졌다.

하지만 유물을 팔기 위해서는 저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혹여나 엄청난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일 수도 있고, 반대로 엄청나게 위험한 것이어서 남들에게 못 팔게 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엄청 수상하게 생겼지.’

종이 같은 재질로 덕지덕지 겉을 싸매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신경 쓰인다. 마치 무언갈 봉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뚜껑을 막 열어보기엔 조금 찝찝했기에 그 전에 자세한 조사가 필요했다.

“가져가서 정확한 감정을 맡겨 봐야겠어.”

“하지만 엘프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거라면 나한테 맡겨. 이런 쪽으로 빠삭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거든.”

엘레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엘프’ 하면 자동적으로 생각나는 사람.

간만에 블루를 찾아가 봐야 할 듯하다.

***

카론과 함께 황궁으로 복귀한 엘레인은 일단 방에다가 단지를 고이 모셔 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베일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이거 절대 손대면 안 돼. 안에 어떤 게 있는지 나도 모르니까. 알겠지?”

“히잉. 오자마자 벌써 가시는 거예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푸른 마탑주님 데리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여기서 기다려줘. 저 단지 좀 잘 봐주고. 알았지?”

“넵. 맡겨만 주세요!”

엘레인은 단지를 지킬 병사로 베일리를 꼽았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현재 앨리스와 캐시는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래도 베일리에게 물건을 맡기는 건 좀 불안하지만, 저 무거운 걸 들고 다니면서 위블렌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한곳에 가만히 두는 편이 나을 터.

엘레인은 ‘절대 만지면 안 돼!’라고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한 뒤, 카론과 함께 위블렌을 찾아 떠났다.

“황녀님도 참. 왜 이렇게 나를 못 믿으실까.”

혼자 남은 베일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앨리스와 캐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불안해하실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화려하면서도 수상함을 풀풀 풍기는 단지를 힐끗 바라본 베일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돌아오시기 전까지 아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지.”

흥흥흥~

베일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쥐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윤이 나게 창문을 닦던 와중.

문득 저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기어코 황녀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세상에. 벌써 다녀오셨….”

“꼬맹이!”

환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린 베일리의 얼굴이 파삭 식었다.

그녀는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정색하며 입을 삐죽였다.

“에이, 뭐야. 2황자님이시잖아?”

“뭐야 너. 왜 날 보고 그렇게 실망하는 건데?”

주위를 휙휙 돌아보며 엘레인을 찾던 라네즈는 묘하게 기분 나쁜 그녀의 대응에 미간을 좁혔다.

베일리는 그런 그를 보며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야 황녀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요. 당연히 실망할 만하죠.”

“아, 그건 인정.”

“…인정하시는 부분인가요.”

베일리의 눈이 짜게 식었다.

엘레인의 시녀와 하녀에겐 유독 관대한 라네즈였기에 툭하고 던진 말이지만, 저렇게까지 담백하게 인정할 줄은 몰랐다.

말을 꺼낸 사람이 괜히 머쓱해지는 상황에 라네즈는 다시금 두 눈에 불을 켜며 주위를 살폈다.

“그래서 꼬맹이는 어디로 갔는데? 속일 생각은 하지 마. 꼬맹이가 황궁에 왔다는 걸 듣고 오는 길이니까.”

“나 참. 그런 걸 속여서 뭐 하나요? 그리고 황녀님이라면 잠깐 블루를 데려온다고 외출하셨어요. 금방 돌아오신다고 했으니까 급한 거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 그럼 잠시 실례할까?”

베일리의 제안에 라네즈는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조심스레 문을 닫고 들어왔다.

누가 봐도 부끄럽고 또 수줍어하는 모습.

뜬금없이 왜 저러나 싶어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베일리는 이내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이 없을 때 방에 들어오시는 건 처음이네요?”

“다, 다, 당연하지! 여동생 방에 멋대로 들어오는 건 비신사적인 행동이니까!”

“흐흐흐. 그럼 이거 한번 보실래요? 황녀님이 네 살배기 때 그렸던 건데 가족들한테 보여주기는 부끄러워서 꼭꼭 숨겨 두고 있던 거랍니다?”

“허업! 그, 그런 걸 내가 막 봐도 되는 거야?”

“에이, 뭘 빼고 그래요. 원래 주인 없는 방에서는 이런 걸 발굴해서 노는 게 국룰이라고요.”

“그런 법 들어 본 적 없는데….”

라네즈는 그렇게 태클을 걸면서도 베일리가 펼친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감동!

“허억. 설마 우리 가족을 그린 거야? 이, 이건 나고?”

“후훗. 이때부터 황녀님의 가족 사랑은 남달랐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라네즈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네 살배기 무렵 엘레인의 귀염 뽀작한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베일리를 돌아보았다.

“혹시 다른 그림도 있어?”

“으음. 안타깝게도 황녀님이 그리신 그림은 이게 끝이랍니다.”

“아쉽네….”

라네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베일리는 크게 실망하는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뭐, 그림만 그렇다는 거지 다른 것도 많아요.”

“오오! 빨리 보여줘!”

“잠시만요. 그게 어디에 있더라….”

베일리가 테이블 옆을 지나쳐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런 그녀를 졸졸 따라가던 라네즈는 문득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화려한 단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단지.

라네즈는 그것을 톡톡 건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못 보던 게 있네. 이게 뭐야?”

“네? 뭐가…. 아! 그거 만지면 안 돼요!”

“어, 어?”

화들짝 놀란 라네즈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라네즈의 무릎이 테이블을 세게 강타하고 말았다.

그 결과.

와장창—!

손을 뻗어 잡을 새도 없이 단지가 바닥과 맞닿으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안에 있던 검정색 기운이 휙하고 튀어나왔지만, 두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 입을 떡 벌린 베일리는 뒤늦게 숨을 토해냈다.

“허억. 그걸 깨면 어떡해요!”

“네가 깜짝 놀라게 해서 그런 거잖아! 그, 근데 이거 꼬맹이한테 중요한 건가…?”

“절대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엄청나게 중요한 거겠죠. 난 몰라….”

베일리가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미 부서진 것. 되돌릴 수는 없기에 우울했지만, 그럼에도 조각은 제때 치워야 했다.

혹여나 황녀님이 다치면 안 되니까 말이다.

“어떡해. 황녀님께서 잘 지켜보고 있으랬는데.”

“미안…. 고의가 아니었어.”

라네즈가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를 해왔다.

여느 귀족이라면 시치미를 뚝 떼고 제 잘못이 아닌 척할 테지만, 라네즈는 황자인데도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만, 위아래가 나누어진 계급 사회에서 윗사람이 아랫것에게 그러는 건 유별난 일.

여기서 베일리는 아니라고 황송해해야 할지, 아니면 사과를 받아들여야 할지 아리송했다.

결국, 쭉 내밀었던 입을 다시 오므렸지만 말이다.

“저도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근데 서로 잘못했으니까 황녀님도 화를 반으로 나눠서 내지 않을까요?”

“…어? 그런가?”

아르닐이 봤으면 ‘바보 형에 바보 베일리가 만나니 죽이 척척.’이라는 말을 내뱉을 대화를 나누며, 라네즈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치우는 거 도와줄게.”

“괜찮아요. 저 혼자 해도 돼요.”

“내가 다칠까 봐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 이렇게 마나를 덧씌우면 손이 베일 일도 없거든!”

“아니,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서 그러는 건데요.”

베일리가 정색하며 말했지만, 라네즈는 사양하지 말라며 조각 하나를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샤아악—!

“꺅!”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 연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 내밀며 베일리에게 달려들었다.

희끄무레하지만 뱀의 형상을 한 듯한 그것에 깜짝 놀란 베일리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대로 가다간 팔을 물릴 터.

두 눈을 꾹 감고 곧 닥쳐올 고통을 대비했으나….

퍼억!

캬아악—!

라네즈의 주먹에 얻어맞은 놈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바닥에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 것과 달리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분명 감각이 있었는데….”

라네즈가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며 인상을 찡그렸다.

베일리는 꾹 감았던 눈을 끔뻑이며 그런 라네즈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바, 방금 그거 뱀 아니었어요? 황궁에 웬 뱀이 있지!?”

심지어 그 뱀이 엘레인의 방에서 나왔다.

그 사실에 안 그래도 살벌했던 라네즈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께 알려야겠어. 귀신이든 뭐든, 꼬맹이의 방에 정체 모를 위험한 녀석이 나돌아다니는 꼴은 절대 못 보지.”

라네즈는 확신했다.

놈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이번 일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음을 말이다.

녀석은 기척을 지우는 기술이라도 있는지 아무리 기감을 확장해도 느껴지는 바가 전혀 없었다.

베일리를 공격하는 놈을 내친 것도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순간적이지만, 놈의 검정색 몸뚱어리가 눈에 보였으니 망정이지, 그조차 아니었다면 멍하니 서 있다가 엘레인의 소중한 하녀가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뻔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상에 라네즈는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내며 베일리의 등을 밀었다.

“너도 나가. 놈을 잡기 전까지 여기는 위험….”

콰악—!

순간 섬뜩한 소리가 들리며 라네즈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손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던 베일리는 곧바로 이상함을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화, 황자님!?”

베일리의 비명 소리와 함께 라네즈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제기랄.”

방심이 불러온 참사.

열린 창문 너머로 유유히 사라지는 검은 형체를 마지막으로 라네즈의 시야가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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