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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139/417)

139화

“엘프어가 적힌 단지 말씀입니까?”

엘레인의 이야기를 들은 위블렌이 놀라 반문했다.

도로 공사로 헤집은 땅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엘프어가 적힌 단지가 튀어나오다니.

듣도 보도 못한 사례에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확실해요. 책에서 봤던 엘프어랑 똑같이 생겼어요.”

“허어. 그렇다면 최소 고대 유물급 가치를 지니고 있겠군요.”

엘프가 인간들 앞에서 모습을 감춘 지는 고작 몇백 년이지만, 신비로운 종족이 남긴 족적이라는 점에서 몇천 년 전 고대 유물급의 가치를 지닌다.

물론 몇백 년 전에도 그렇고 역사상 인간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엘프어를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에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

푸른 마탑주 위블렌을 제외하면 말이다.

참고로 그 또한 엘프들과 함께 살았던 것은 아니기에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그에게 엘프어를 가르친 적이 있기에 그들의 언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

“흥미가 동하는군요. 하도 오래전에 배운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면 기억이 날 겁니다.”

“휴. 다행이다.”

혹여나 발생할 최소한의 위험성을 배제하고픈 엘레인이었기에 위블렌의 참여가 기꺼웠다.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가요! 단지는 내 방에 있어요.”

“허허허.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어디 도망가지 않는답니다.”

위블렌은 로브 자락을 잡고 이끄는 엘레인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띠웠다.

그는 엘레인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최근 들려오던 소식에 대해서 말했다.

“그나저나 큰일을 겪었다고 하던데, 괜찮으십니까?”

“큰일이라면 그 납치 사건…?”

“예. 그것 때문에 황궁이 발칵 뒤집혔었지요. 황제 폐하께서 잘 처리하신 것 같지만 저하께서는….”

그리 말한 위블렌은 엘레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놈들을 잘 처리한 것과는 별개로 엘레인이 겪었던 일은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겉으로 의연한 척을 해도 황녀님은 겨우 열두 살.

그녀가 겪었을 고초에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내가 직접 납치당한 것도 아닌데요 뭘. 그리고 오르칼 오빠가 도와준 덕분에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카론도 옆에 있었고요. 그치?”

뒤에 딱 붙어서 따라오던 카론은 엘레인의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위험한 상황은 많았다.

황녀님의 얼굴에 무려 상처도 났었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상황에 카론의 눈썹이 축 처졌다.

“황녀님. 다음부터는 절대 위험한 곳으로 뛰쳐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자. 여기 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찍어주십시오.”

“엥?”

맞장구를 쳐주기는커녕 갑자기 훅 들어오는 카론의 호소에 엘레인은 당황했다.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얼른 약속해 달라고 종용하는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위블렌이 침음을 흘렸다.

“허어. 이 친구 말을 들어보니 상당히 위험한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만?”

“아, 아니에요. 지금 카론이 오버하는 거예요.”

“황녀님. 이건 오버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드리는 말씀으로 당시 상황은 매우 위험….”

“저기, 카론!”

이대로 가다가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은 분위기에 엘레인이 황급히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 지금 마카롱 먹고 싶은데, 마커 아저씨한테 만들어 달라고 부탁 좀 해줄래?”

“알겠습니다.”

위블렌을 힐끔 본 카론은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무려 마탑주가 곁에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지.

카론을 보낸 엘레인은 그제야 한숨을 돌린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허허. 아주 좋은 호위 기사를 두었군요. 아주 믿음직스럽습니다.”

“에휴.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가끔 너무 과보호해서 난감해요.”

“그의 사정도 고려해주시길. 황녀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긴 하네요….”

알고는 있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되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머쓱해진 엘레인은 뺨을 긁적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꺄아악—!

“…….”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엘레인과 위블렌의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설만큼 공포에 가득 찬 그 목소리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엘레인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바, 방금 그거 베일리 목소리 아니에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군요.”

위블렌의 말을 들은 순간 엘레인은 반사적으로 수상한 단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희게 질린 얼굴로 외치기를.

“빨리요! 베일리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몰라요!”

“신속의 마법을 걸겠습니다.”

황궁 내에서 텔레포트는 금지다.

그 대신 속도를 향상시켜주는 마법을 건 위블렌과 엘레인은 재빨리 복도를 뛰었다.

이윽고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한 엘레인은 망설임 없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베일리!”

“화, 황녀님!”

베일리의 이름을 외치며 들어선 엘레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베일리와 그런 그녀 가까이에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누군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멍하니 있기를 잠시.

홀린 듯 그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한 엘레인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외치고 말았다.

“라네즈 오빠?”

얘가 왜 여기 있어? 게다가 왜 쓰러져 있는 거고?

화들짝 놀라 다가가니, 베일리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엘레인의 옷자락을 잡아 왔다.

“황녀님 어떡해요? 황자님이… 황자님이…!”

놀란 것은 베일리도 마찬가지인지 말하는 내내 위태롭게 숨이 넘어갈 듯했다.

그나마 여기서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위블렌.

그간 쌓인 연륜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그는 신속하게 라네즈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고 그의 심장께에 귀를 갖다 대거나 맥박을 재며 생사 여부를 확인했다.

“으음….”

“어, 어때요? 우리 오빠 괜찮은 거예요?”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기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맥박이 좀 느려지긴 했지만, 숨은 제대로 쉬고 계시거든요.”

“하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엘레인은 마찬가지로 크게 안도한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외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깔끔했던 방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

단지가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라네즈가 기절해 있는 상황은 누가 봐도 큰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베일리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꽉 쥐고는 엘레인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게… 실수로 단지를 깨트리는 바람에 어쩌지 하면서 조각을 치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뱀이 나타났어요.”

“검은 뱀? 혹시 단지 안에 뱀이 있었던 거야?”

“워낙 정신이 없었던지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단지가 깨졌을 당시 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베일리의 말에 엘레인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단지 내에 없었던 거면 밖에서 들어온 거란 말인데, 황궁에 뱀이 돌아다닌다는 게 더 말이 안 됐다.

하루 종일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는 물론이고 기사들이 수시로 주위를 순찰하고 있는 데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 바로 이곳 황궁이니까 말이다.

물론 사람이라는 게 모두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엘레인의 본능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라네즈 오빠는 왜 기절한 거야?”

“저를 구해주다가 뱀에게 그만….”

“설마 물렸어!?”

결국, 베일리가 눈물을 똑똑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죄책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엘레인은 그런 베일리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라네즈의 몸을 살폈다.

그녀의 설명대로 발목에 잇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한 엘레인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2황자 저하를 단번에 기절시킨 뱀이라면 독사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등을 쓸어주는 것이 효과가 좋았는지, 베일리의 눈물이 차츰 잦아들었다.

아직 완벽하게 진정된 건 아니지만, 엘레인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베일리. 사제들이랑 의원들 좀 불러와 줄래? 만약 진짜 독사라면 라네즈 오빠가 위험해.”

“…얼른 불러올게요!”

씩씩하게 눈물을 닦은 베일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나갔군.’

사실 엘레인이 베일리를 내보낸 데에는 진짜 목적이 따로 있었다. 베일리가 있으면 정령의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던 탓이다.

엘레인은 더 지체할 것도 없이 운디네에게 부탁해 라네즈의 몸속을 정화시켰다.

그런데 웬걸.

“말도 안 돼. 운디네의 정화가 안 먹혀요.”

“아무래도 단순한 독이 아닌 모양이군요.”

-무우….

운디네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볼을 부풀렸다.

운디네는 엘레인과 함께 오랜 수련을 통해서 웬만한 것들은 전부 정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몸속에 더럽고 불길한 기운이 저토록 활개 치고 있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어떡하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엘레인이 운디네와 함께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깨어진 단지 조각 하나를 들어 올린 위블렌이 미간을 좁혔다.

“황녀님. 잠깐 이것 좀 감정해 봐도 될까요? 어쩌면 힌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맞아. 혹시 그 검은 뱀이 거기서 튀어나왔을지도 모르니까… 부탁할게요!”

확실한 대처 방법이 없는 지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해야 했다.

엘레인은 위블렌을 도와 깨어지고 흩어진 조각을 맞추며 그가 편히 엘프어를 해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으윽….”

“오빠!?”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엘레인이 다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깨어났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끙끙 앓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위독해진 상태에 엘레인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리고 그 순간.

“해독했습니다!”

“정말요?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엘레인의 물음에 위블렌은 하얗게 센 수염을 슥슥 쓰다듬었다.

“이건 고대 정령을 봉인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겁니다. 엘프들이 만든 아티팩트인 셈이지요.”

“고대 정령? 대표적으로 알려진 4원소 정령이랑 다른, 그 애들 말이에요?”

“역시 황녀님이십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고대에는 4원소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정령들이 존재했지요. 희귀한 만큼 그 수가 아주 적은 데다가 계약하기가 아주 어려웠지만 말입니다.”

“근데 왜 그런 고대 정령을 여기에다 봉인한 걸까요?”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그 검은 뱀은 정신계에 해당하는 해악의 정령이랍니다.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는, 쉽게 말해 악령에 가까운 존재이지요. 그리고….”

“그리고?”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위블렌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여기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해악의 정령에게 물린 자들은 악몽과 열병에 시달린 후 보통 열흘 안에 죽게 된답니다.”

“말도 안 돼!”

엘레인은 경악했다.

열흘 안에 라네즈가 죽는다니!

믿기 힘든 현실에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해결 방법은요? 그것도 적혀 있어요?”

“천만다행히도 직접 본체를 소멸시키면 깔끔하게 해결된답니다. 다만 신성력 혹은 정화만 통한다고 하며 너무 힘이 막강해지면 그조차도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한마디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놈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마 엘프들이 봉인을 택한 이유도 놈의 힘이 너무 막강해졌기 때문일 터.

엘프들처럼 놈을 봉인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없는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빠르게 녀석을 토벌해야 했다.

“봉인의 여파로 힘이 약해졌을 테니 충분히 정화가 가능할 겁니다. 놈이 힘을 회복하기 전에 얼른 찾아야 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우리만으로 이 넓은 황궁을 뒤지긴 힘들어요. 우선 아빠한테 말씀드리는 편이….”

쿠당탕—!

“으아악!”

“도망쳐!”

그 순간 저 멀리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엘레인과 위블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서, 설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두 사람은 소리가 들려온 복도로 지체없이 뛰어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걸까.

“이럴 수가.”

엘레인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한바탕 난리가 난 듯 복도에 널브러진 수명의 사람들과 공황 상태에 덜덜 떨고 있는 사람들.

해악의 정령이 쓸고 간 곳은 공포라는 이름의 족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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