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417)

140화

큰일이다.

사방에 힘없이 널브러진 사람들을 보고 엘레인은 더욱 조급해졌다.

해악의 정령은 황궁에서 잃어버린 힘을 모두 되찾을 심산인지 보는 눈도 상관 않고 복도에 있는 사람을 한꺼번에 노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피해자가 계속해서 속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놈의 토벌은 불가능에 점차 가까워질 터.

녀석이 더 많은 힘을 회복하기 전에 어떻게든 찾아내서 정화를 시켜야만 했다.

‘진정하자. 그나마 다행인 건 비명 소리로 자기 위치를 계속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야.’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엘레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래층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현 상황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지만, 애석하게도 그 상황이 엘레인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

엘레인은 위블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탑주님.”

“암요. 안 그래도 필요하실 것 같았습니다.”

위블렌이 허허 웃으며 신속의 마법을 걸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괴성이 난무하는 곳.

조리실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 * *

한편 엘레인의 부탁으로 주방장 마커를 찾아간 카론은 조리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뭔가 많이 바뀐 것 같군요.”

“아. 사실 최근에 리모델링을 좀 했거든요. 예쁘죠?”

“예쁘긴 하지만… 하얀색은 때가 잘 타지 않습니까. 관리하는 게 힘들 것 같은데.”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흐흐흐.”

마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팔짱을 낀 채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잔뜩 콧대를 세우며 말하기를.

“마법부에서 특별히 손을 써주셨다~ 이 말입니다.”

“마법부에서 말입니까?”

“네! 황궁 내에서 제 디저트를 좋아하시는 분 1위는 황녀님이신데 2위는 단연코 마법부 사람들이거든요. 머리 쓰는 일에는 당분 섭취가 필수라고 했던가…. 어쨌든 예전부터 쌓아왔던 인연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왔지 뭡니까.”

마커는 클린 마법이 걸린 행주를 들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3황자님께서 개발했던 마법 빗자루에서 착안하여 만든 마법의 클린 싹싹. 더러운 것은 물럿거라 행주! 콩알만 한 마나석을 가지고도 1년을 내리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가성비를 자랑한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줄줄이 읊는 자랑에 카론은 입을 다물었다.

도와 달라는 의미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이는 일상인지 동료 요리사들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디저트를 만들 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쓸데없는 TMI까지 남발할 것 같은 분위기에 결국 그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마카롱은 언제?”

“아! 내 정신 좀 봐. 안에 필링만 짜 넣으면 되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호다닥 달려가는 마커를 보며 카론은 침중해졌다.

황녀님께서 방금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다음부터 싫은 내색을 보이면 일단 입을 다물어야겠다.

안전에 대한 잔소리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음?”

가만히 서서 필링 짜는 모습을 구경하던 카론은 갑자기 부르르 떨리더니, 공중으로 붕 뜨는 행주의 모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아, 마침 더러운 게 생겼나 봐요. 저 녀석의 성능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그렇군요. 그런데 행주로 바닥도 닦습니까?”

“에이 카론 경도 참. 바닥은 걸레로 닦아야죠.”

마커는 농담하지 말라며 하하 웃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말에 그는 곧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 마법 행주는 왜 저쪽으로 갑니까?”

“엥?”

카론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오 이런 세상에!

공중으로 뽈뽈뽈 날아가던 행주가 바닥 쪽으로 사뿐히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저게 왜 저래?”

화들짝 놀란 마커가 행주를 잡기 위해 몸을 틀었다.

만약 카론이 앞에서 막지 않았다면 당장에 저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을 것이다.

“카론 경?”

스르릉—

의아함에 그를 부르자 돌아오는 것은 새하얀 검신이 뽑히는 소리였다.

조리실에서 사용할 리 없는 기다란 장검이 마나 등 아래에서 반짝이자, 여태 자기 일에 집중하던 요리사들이 히익!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가, 갑자기 검은 왜!?’

‘우리가 뭐 잘못했나?’

조리실 내부에 짙은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구석으로 몰려든 요리사들과 검을 뽑아 든 채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카론. 그리고 기어코 바닥으로 내려앉은 행주까지.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바로 클린 싹싹 행주였다.

그런데.

캬아악—!

“뭐, 뭐야 저게!”

행주가 더러운 것을 닦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것에 닿은 무언가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까만색 연기가 커다란 뱀의 형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뽀득뽀득. 마치 접시를 닦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뱀의 비늘이 떨어져 나간다.

정체 모를 검은 뱀도 고작 천 쪼가리로부터 유효한 공격을 받을 줄 몰랐던 걸까.

분노에 가득 찬 눈을 번뜩인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행주를 꼬리로 쳐냈다.

“어어?”

그 순간 마커와 녀석의 두 눈이 마주쳤다.

해악의 정령은 뱀 앞의 쥐가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더니, 눈 깜짝할 새에 이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아악!”

깜짝 놀란 마커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저 약한 녀석은 자신에게 한입거리일 뿐일 터.

하지만 녀석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으니, 현재 마커의 앞에는 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기사가 있다는 거였다.

캬아악—!

“어딜!”

카론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들어 막아내자 놀랍게도 불똥이 튀었다.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생각보다 강력한 힘이 몰려들자 카론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앞서 많은 힘을 흡수한 녀석이었지만, 아직은 부족한지 순간적으로 카론의 힘에 밀려난 놈은 창문을 깨고 밖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사, 살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은 마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엉망이 된 주방을 울적한 눈으로 둘러보더니 카론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방금 그거 뱀 맞죠? 황궁에 웬 커다란 뱀이….”

“…보통 뱀이 아닙니다.”

카론은 검을 들었던 팔을 들어 주먹을 꽉 쥐었다 펼쳤다.

그래. 보통 뱀이 강철 같은 몸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괴력을 지녔을 리가 없지.

참으로 오랜만에 얼얼한 팔을 힐끗 내려다본 카론은 깨진 창문 밖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발소리.

“카론!”

“황녀님?”

신속의 힘을 빌려 빠르게 아래층으로 당도한 엘레인과 위블린은 난장판이 된 주방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안 돼! 한발 늦었어!”

“괜찮으십니까?”

실망감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고 하자 카론이 재빨리 달려와 부축했다.

엘레인은 왼쪽에 내려놓은 그의 검을 보다 말고, 카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론. 여기 검은 뱀이 나타났지?”

“예. 혹시 녀석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응. 그 뱀을 잡아서 정화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위험해져.”

“정화? 물리적인 힘은 통하지 않는 겁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해드리지요.”

자연스럽게 끼어든 위블렌이 카론에게 설명을 했다.

엘레인은 그의 옆에 비켜서서 엉망이 된 내부와 깨어진 창문을 보고 눈을 빛냈다.

‘저쪽으로 빠져나갔구나!’

엘레인이 내부를 살필 동안 이쪽도 대충 이야기를 마쳤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신성력과 정화의 힘으로만 대미지를 가할 수 있다는 거군요.”

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으로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던 뱀이 고작 행주에 닦였다고 괴로워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명 끝났지? 그럼 얼른 뱀 잡으러 가자!”

“안 됩니다.”

“어째서!?”

단호한 그의 대답에 엘레인의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카론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번뜩이며 딱 부러지게 말했다.

“신성력과 정화의 힘이 유일한 공격 수단이라면, 사제들이 놈을 잡으면 됩니다.”

“그래도 사람은 많을수록 좋잖아. 그리고 그 단지를 가져온 건 나니까 내가 책임지고 뱀을 잡아야 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황녀님께서 알고 가져온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저희에게 맡기는 편이….”

“좋아!”

“예?”

카론은 순순히 그러겠노라 답하는 엘레인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황녀님이라면 분명 절대 안 된다며 고집을 부릴 텐데, 이렇게 빨리 수긍했다는 사실이 의아한 것이다.

“그렇게 한다니까? 사실 나도 뱀은 좀 무섭거든.”

“아, 그런 거였군요.”

“대신!”

충분히 납득이 가는 내용이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엘레인이 사족을 달았다.

“카론은 지금 당장 우리 아빠한테 이 사실을 알려줘. 얼른 이 사실을 알려야 피해도 줄이고 뱀을 빨리 잡지.”

“그거라면 일단 황녀님을 방까지 모신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면 늦어! 지금도 밖에서 뱀이 사람들을 물고 있을지 몰라. 마탑주 할아버지가 대신 데려다주면 되니까, 카론은 걱정하지 말고 얼른 다녀와. 알겠지?”

“…….”

카론은 조용히 위블렌을 노려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인은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떼어내며 자꾸 뒤를 돌아보는 카론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빨리! 늦으면 안 돼!”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카론이 뛰기 시작했다.

엘레인은 순식간에 저 멀리 모퉁이를 꺾어 사라지는 카론을 보며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갔나? 확실하게 간 거 맞죠?”

“허허. 우직한 카론 경도 황녀님은 못 당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어쩔 수 없잖아요. 아마 계속 제 고집대로 한다고 했으면 한 시간 내내 훈계를 했을걸요?”

“진짜 그럴 것 같아서 무섭군요.”

위블렌이 어색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복도 밖으로 나가는 엘레인을 따라나서며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위치는 알아냈습니까?”

“헤헷. 운디네가 워낙 유능해서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면.

사실 엘레인은 위블렌과 함께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기 전, 창문 밖으로 운디네를 먼저 내려보냈었다.

혹시나 놈을 놓쳤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깔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녀석은 뒤에 운디네가 따라붙은 줄도 모르고 열심히 황궁 내부를 휘젓고 있었다.

눈을 감고 운디네의 위치를 확인한 엘레인이 방긋 웃었다.

“찾았다. 지금 황궁 정원 쪽으로 간 것 같아요.”

“그럼 황궁 정원 주변으로 결계를 치면 되겠군요.”

“부탁할게요.”

대결계를 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한 관계로 위블렌은 엘레인과 잠깐 헤어지기로 했다.

솔직히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황녀님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그였기에 해악의 정령 추적을 엘레인에게 맡긴 것이다.

서로 맡은 역할을 해내기 위해 헤어진 엘레인은 이후 소란스러운 황궁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달려 도착한 황궁 정원.

“여기구나.”

여름의 향기가 가득한 정원을 한참 가로지른 엘레인은 모퉁이 뒤에서 염탐하고 있는 운디네를 발견했다.

“운디네!”

-무우우!

짧은 헤어짐이었지만, 뜨거운 상봉을 마친 엘레인은 모퉁이 너머 운디네가 바라보고 있던 곳에 시선을 주었다.

“그 녀석은? 어디에 있어?”

-무헉!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건가?

화들짝 놀라 이곳저곳 살펴보던 운디네가 반대쪽 모퉁이 너머 담벼락을 바라보며 외쳤다.

-무우! 무무우!

거기구나!

엘레인은 재빨리 운디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캐시 언니?”

엘레인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휴식을 즐기고 있었는지, 두 눈을 감고 여름 장미의 향기를 느끼고 있는 캐시.

그리고 그 위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는 커다란 뱀.

해악의 정령.

‘저거 왜 저렇게 커!?’

사람 허벅지만 한 굵기를 지닌 뱀은 보기만 해도 질리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엘레인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달리, 캐시는 녀석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지 여전히 뙤약볕을 쬐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캬아악—!

몸을 웅크리며 기회를 엿보던 놈이 이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캐시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아, 안 돼! 캐시 언니!”

화들짝 놀란 엘레인이 모퉁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엘레인의 목소리에 캐시의 눈이 부릅뜨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키에엑—!

“예.”

단숨에 뱀의 모가지를 틀어쥔 캐시가 아무렇지 않게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기를.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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