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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141/417)

141화

“?”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순간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이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캐시의 손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뱀 때문에 현실 부정도 못 하겠다.

‘아무리 피지컬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대도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엘레인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캐시에게 잡힌 검은 뱀을 바라보았다.

모가지를 잡혀 입도 벌리지 못하고 꾹 눌린 녀석은 왜인지 모르게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잔뜩 경계하고 있자 캐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뱀탕이 드시고 싶으신 겁니까?”

“어? 설마 그걸로 뱀탕을 만들려고?”

“독샘을 제거하고 푹 고아서 먹으면 나름의 별미가 됩니다. 어떻게…, 만들어드릴까요?”

“아, 아니!”

샤아앗—!

녀석도 그런 취급만큼은 사절인지 허공에 대롱 매달린 채 발악을 했다.

이윽고 캐시의 팔을 부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몸통으로 휘감고 힘을 꽉 주는 해악의 정령.

팔에 느껴지는 압박감에 한 차례 눈썹을 들썩인 캐시가 엘레인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실례지만, 잠시 눈을 감고 귀를 막아주시겠습니까?”

“아, 응.”

캐시의 카리스마에 움찔한 엘레인은 그녀의 말에 따라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러자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멀거니 들려왔다.

-무우우….

반면 캐시의 조언을 무시하고 눈을 가리지 않은 운디네가 파드득 몸을 떨며 엘레인의 뒤통수로 몸을 숨겼다.

등 뒤로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뜨고 싶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으나, 왠지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언가 처리를 끝내고 다시 나타난 캐시가 홀가분하게 말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어헙!”

천천히 눈을 뜬 엘레인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헛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무슨 짓을 당했는지 해악의 정령은 예쁜 리본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혀를 빼물고 기절해 있는 녀석의 새로운 스타일링에 동공 지진을 일으키기를 잠시.

캐시가 조금 뿌듯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뱀탕. 해드릴까요?”

“…사양할게.”

엘레인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녀석을 바라보는 캐시의 눈빛은 ‘황녀님의 몸보신을 위해 사용될 식재료’에서 ‘쓸데없이 커다랗기만 한 폐기물’로 전후가 극명하게 갈리었다.

살다 살다 악령에 가까운 정령이 불쌍하게 보일 줄이야.

녀석에겐 정말이지 불행하게도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잡았어? 뒤에서 노리고 있는 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보다는 사각에서 불길한 기운이 뭉쳐 있는 걸 느꼈습니다. 설마 그게 저를 공격할 줄은 몰랐지만요.”

“우와….”

저번에 운디네의 기운을 정확하게 캐치해 내더니 이번에는 해악의 정령이 내뿜는 불길한 기운도 정확하게 느꼈다.

물론 흡수한 사람들의 힘에 비례하여 그만큼 녀석이 가지고 있는 힘과 기운도 늘어났지만, 라네즈와 카론조차도 자연과 동화되어 투명화한 녀석을 바로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 캐시는 정령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운을 감지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엘레인은 실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탑주님!”

“허어. 이게 무슨 일인지….”

대결계를 치는 데에 성공한 마탑주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는 엘레인이 다친 곳 하나 없다는 것에 안심하며 리본 뱀을 쥐고 있는 캐시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엘레인이 두 눈과 귀를 꼭 막고 있을 때 공중에서 캐시가 뱀을 패대기치고 있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어찌나 찰지게 휘어잡는지 보는 내내 어후 소리가 절로 나왔더랬지.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의 귀가 아주 잠깐이지만 길어지는 것을 분명히 봤다.

‘먼 거리여서 착각일 수도 있지만, 만약 진짜라면….’

위블렌의 생각이 깊어졌다.

만약 그녀가 엘프라면 어째서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한 엘프들과 함께하지 않았는지, 또한 어째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인간 세상에 나와서 하녀의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위험천만한 고대의 정령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을 실력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궁금한 것은 많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았고 지금은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위블렌은 질문 세례를 퍼붓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고 리본 모양으로 묶인 해악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황녀님. 바로 진행하시지요.”

“어? 하지만 옆에 캐시가 있잖아.”

안절부절못하며 속삭이는 말에 위블렌이 허허 웃었다.

“사실 그녀에게는 말해주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황제 폐하의 생각은 다르겠지요. 캐시 양. 죄송하지만 자리 좀 피해주시겠습니까? 그 뱀은 놔두고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뱀의 정체나 그것을 두고 가라는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하건만 캐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녀가 멀리 떨어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위블렌은 이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해악의 정령 곁으로 다가갔다.

“호오. 이렇게 생겨서 이런 느낌의 힘이….”

고대 정령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위블렌은 꽤나 흥분했다.

진짜 뱀처럼 윤이 나는 피부는 만졌을 때 강철처럼 딱딱했고, 본능적으로 접촉을 거부하는지 그때마다 기절한 고대 정령의 몸에서 어둡고 칙칙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운디네가 힘을 쓸 때 느껴지는 청량한 기운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느낌이라 매우 신기했다.

반면 엘레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찔러보는 위블렌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깨어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리고 얼른 사람들을 구해야죠.”

“허허.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호기심은 더욱 왕성해지는지라….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멋쩍게 웃은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내 마나서클이 강렬하게 회전하며 푸른빛 네모난 큐브가 해악의 정령 주위를 감쌌다.

운디네는 그런 녀석의 주위로 포로롱 날아가 정화의 빛을 쏘아냈다.

캬아악—!

눈이 번쩍 뜨이는 고통에 해악의 정령이 발버둥 쳤다.

놈은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리본 모양으로 묶인 몸을 풀어내고는 정화의 빛이 잠깐 수그러든 동안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네놈들! 나를 가둔 엘프 놈들의 동료인가!

“뭐야, 말을 할 줄 알아?”

엘레인이 깜짝 놀라 물었지만, 위블렌은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정령사의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들리는 모양인데….

엘레인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을 깨달은 정령이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이쪽을 보았다.

그런데.

-정령아! 어째서 여기에 정령아가 있는 거지?”

“정령… 뭐? 그게 뭔데?”

-시치미 떼지 마라! 크으윽. 처음부터 정령아의 몸을 빼앗았다면 그 고생을 할 필요도 없이 바로 빌어먹을 엘프 놈들을 쳐죽일 수 있었을 텐데!

녀석은 매캐한 탄내가 나는 꼬리를 바짝 세우더니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뭘 오해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봉인한 엘프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진 것만은 확실하다.

엘레인은 탐욕스런 눈으로 제 몸을 훑어보는 해악의 정령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내 몸을 빼앗아서 엘프들을 뭐 어떻게 하겠다고?”

-크하핫! 겁에 질린 모습이 참으로 우습구나. 허나 그건 시작일 뿐이다. 가장 먼저 이 몸을 봉인한 귀쟁이 놈들의 숲을 태워버리고 그다음엔 인간들의 본거지를 하나둘씩 박살 낼 것이다. 이 세계를 이 몸이 군림하여 지배하는 거지!

이제 보니 오만의 정령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녀석은 쓸데없는 야망에 가득 차 있었다.

역시 해악의 정령. 온 세상에 민폐를 끼치려는구나.

저러니까 엘프들한테 봉인이나 당하지.

엘레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까부터 해주고 싶은 말을 꺼내었다.

“정말 대단한 꿈이구나. 근데 너 뭔가 잊고 있지 않아?”

-건방진 꼬맹이로군. 내가 뭘 잊고 있다는 거지?

“너 지금 갇혀 있잖아. 그 꼴로 세계 정복을 어떻게 한다는 건데?”

-…….

정말 잊고 있었는지 놈은 이빨을 드러내며 큐브를 깨부수려 들었다.

하지만 위블렌이 만든 결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녀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간! 나와 계약해 보는 건 어떤가?

“계약? 그래놓고 내 몸을 홀라당 빼앗으려고?”

-그, 그건 실언이었다! 너도 알잖나. 정령과 계약을 하면 계약자의 몸에 상처 입힐 수 없다는 것을. 한마디로 나처럼 강한 정령을 공짜로 부릴 수 있다는 거다.

“오. 그거 좀 끌리는데.”

엘레인이 턱을 매만지며 흥미를 보이자 녀석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멍청한 녀석. 이 몸은 정령계에서 추방당한 몸. 정령계의 계약 따위에 전혀 얽매이지 않지. 풀어주는 즉시 바로 빼앗아주마!’

해악의 정령은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엘레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세 치 혀를 놀려대었다.

-이 몸과 계약을 한다면 지금 당장 제국 정도는 거저먹을 수 있지. 좀 더 힘을 키운다면 세상을 발아래에 두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음, 그렇구나. 그런데 겨우 그것뿐?”

-뭣?

해악의 정령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제국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겨우라니?

하지만 녀석은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 이 제국의 황녀인데?”

-…….

낭패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땅도 크고 건물도 화려했다.

대충 짐작하곤 있었지만, 하필이면 눈앞의 꼬맹이가 제국의 황녀라니.

-그, 그래도 나중에 가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지 않나!

“별로.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어서.”

-이, 무슨! 너는 야망도 없는가!

“나 하나도 먹고 살기 바쁜데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책임지란 말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한테 네 능력은 별로 쓸모가 없네.

해악의 정령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살면서 이토록이나 자신의 능력을 폄하 당한 적이 있던가.

난생처음 받아보는 쓸모없는 취급에 석상처럼 굳어있을 무렵. 엘레인이 쯔쯧 혀를 차며 말했다.

“어쨌든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으니까 책임져줘야겠어.”

-자, 잠깐! 기다려!

“응, 안 돼. 자연으로 돌아가.”

애초에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잠깐 어울려줬던 건 해악의 정령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엘레인은 깔끔하게 놈의 외침을 무시하며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 전력을 다해서 정화!”

-안 돼!!!

-무우무우!

(돼!)

기다렸다는 듯 운디네가 나서자, 따뜻한 힘이 해일처럼 흘러나와 해악의 정령을 덮쳤다.

-캬아악! 이놈들!

환한 빛무리 속에서 해악의 정령은 갓 잡아 올린 장어처럼 팔딱거렸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

소멸을 코앞에 둔 해악의 정령은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계속 봉인되어 있을 걸!’

이제 와서 후회한들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

결국, 모든 것들을 정화 당해버린 해악의 정령은 끔찍한 괴성을 마지막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멍하니 연기처럼 흩어지는 녀석을 바라보던 엘레인은 그제야 어깨 힘을 쭉 풀었다.

“휴우. 다들 수고 많았어요.”

-무우!

실은 정화가 안 되는 건 아닐까 속으로 엄청 쫄렸는데, 다행히 아직까진 운디네의 힘이 통한 모양이다.

모두의 수고를 치하하자 운디네가 우쭐대었고 위블렌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황녀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아까 해악의 정령과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역시 안 들렸나 보다.

엘레인은 녀석과 했던 말을 떠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굳이 그대로 말해줄 필요는 없지.’

예를 들어 엘프들에게 가장 심한 욕인 귀쟁이라고 했다든가 그들의 숲을 가장 먼저 태워 없애버리겠다고 했다든가.

“그냥 세계를 자기 발아래에 두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자기랑 계약하면 세상을 주겠다나 뭐라나.”

“허어.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크나큰 재앙이 되었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죠.”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재앙이라…. 생각해 보면 3재앙이 일어날 때가 머지않았다.

물론 아직 몇 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8년이란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던 걸 생각하면 그리 먼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단지 안의 고대 정령. 지금 생각난 거지만, 회귀 전 아스터 왕국에서도 저런 게 하나 나왔었어.’

그때는 단지가 아닌, 청자기 안의 고대 정령이었지만 어쨌든 봉인되어 있다는 점에서 처지가 비슷했다.

‘근데 그거 어떻게 됐더라…?’

아, 생각났다.

왕자가 고대 정령의 봉인을 풀고 계약을 시도하려 했다가 실패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 3재앙이 터져서 고대 정령의 분노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었고 말이다.

아무리 고대 정령이라고 해도 그만한 재앙을 일으키다니.

당시엔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일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겠는데.’

어쩌면 그곳에 봉인되어 있는 정령도 해악의 정령처럼 좋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러겠지.

그래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엘레인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고 있는 게 없으니까.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수소문해서 그것을 딱 골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엘레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어쩔 수 없지. 재앙 대비를 좀 더 철저하게 하는 수밖에.’

영지를 좀 더 빨리 키워야 할 목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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