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417)

142화

해악의 정령을 퇴치한 이후.

녀석에게 당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신성력을 퍼부어도 일어나지 않던 사람들이 잇따라 정신을 차리자, 황궁에는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하지만 황제는 이번 일에 대해서 따로 조사를 진행할지언정 공론화하는 것을 불허했다.

황궁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을 남들에게 숨기고 싶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각종 고통을 호소하기는커녕 몸 상태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기서 엘레인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아니, 다들 악몽을 꾼 건 그렇다 쳐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엘레인의 말에 위블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에 적힌 내용대로 해악의 정령에게 물린 자들은 다들 열병을 앓으며 악몽을 꿨다.

각자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악몽의 내용은 천차만별로 달라졌지만, 미스터리하게도 깨어나기 전에 그들이 보았던 것은 똑같았다.

엘레인은 마치 물음표를 형상화한 듯한 얼굴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근데 거기서 왜 제가 나와요?”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는지 엘레인의 얼굴이 아연하게 질렸다.

해악의 정령에게 당한 사람들의 증언은 모두 똑같았다.

평소에 무서워하는 것들이 왕창 나오는 끔찍한 악몽 속에서 나타난 한 줄기의 빛.

바로 엘레인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꿈에 현신하여 무시무시한 악몽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흐음. 다른 건 몰라도 여왕이 된 황녀님께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천사의 날개를 가진 황녀님께서 노래로 온갖 부정한 것들을 정화하는 꿈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 꿈속의 황녀님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정말이지 궁금하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물려 보는 건데….”

“진심이세요…?”

“허허. 당연히 농담이지요.”

엘레인이 질겁하자 위블렌이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들이 악몽의 끝자락에서 황녀님을 뵌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황녀님께서 해악의 정령을 해치우는 과정이 그들의 꿈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엥? 그게 가능해요?”

“해악의 정령은 정신계 정령이니까요. 사람들 몸에 퍼트려 놓은 녀석의 기운이 본체의 상태에 따라 이변을 일으킨 거겠지요.”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아마 위블렌이 해악의 정령을 해치웠다면 사람들의 꿈속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래도 지나가는 길마다 제 얘기가 들려오는 건 좀 그래요.”

“다들 고마워서 그러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조금은 즐겨 보시지요.”

‘그게 그럴 수가 없으니까 문제죠.’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이번 일이 일어난 원인을 따지자면 자신이 단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몽에서 구해줬다는 이유로 자신을 추앙하고 있으니….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다.

무안함과 낯부끄러움에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인 엘레인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전 이만 가볼게요.”

“2황자 저하의 병문안입니까?”

“네. 깨어났다고 해서요.”

이상하게 라네즈는 다른 사람들보다 2시간이나 늦게 깨어났다.

그의 꿈에서는 엘레인이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꾸는지 도통 일어나질 않는 그가 걱정되었다.

황제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리러 갔을 때도 계속 라네즈 생각이 나서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을 정도다.

“아마 괜찮을 거로 생각되지만, 황녀님께서 가시면 좋아하시겠지요.”

“그럴까요?”

왜 그런 위험한 단지를 가져왔던 거냐고 화내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엘레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꼬맹아, 미안해!”

“엥?”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엘레인은 입을 헤 벌렸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무릎을 꿇고 양손을 꽉 맞잡은 채 안절부절못하는 라네즈.

그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접착제로 붙인 듯 엉성하게 붙어 있는 단지를 가리켰다.

“일단 최대한 원래 모양을 살려서 붙여 봤는데… 괜찮을까?”

“오빠…. 설마 일어나서 저걸 다 붙인 거야?”

“으응. 이거 너한테 엄청 중요한 거라면서.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절대 고의로 깬 건 아니야. 제발 믿어주라.”

라네즈는 매우 간절하게 말했다.

마치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동생에게 미움받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

너무나도 애달프고 구슬픈 모습에 엘레인은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다, 당연히 믿지. 그리고 엄연히 잘잘못을 따지자면 단지를 깬 오빠가 아니라 그걸 가져와서 원인을 제공한 나야.”

“무슨 소리야? 너는 그걸 조사하고 싶어서 여기로 가져온 거라며? 그러니까 잘못한 건 그걸 깬 내가 맞지.”

“그러니까 이건…!”

엘레인은 발끈해서 ‘이건 누가 뭐래도 내 잘못이라니까?’라고 외치려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대결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잘못했다고 외치는 꼴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에휴.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럼 나 용서해주는 거야?”

“애초에 오빠한테 화나지도 않았어. 그 뱀 같은 것도 없어졌으니까 이젠 걱정하지 마.”

“다행이다.”

라네즈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엘레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머뭇대며 여동생의 손을 꽉 잡아 오는 라네즈.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던 엘레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를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근데 오빠도 꿈에서 나 나왔어?”

“엉? 어떻게 알았어? 실은 꿈에서 네가 날 버리고 떠나가서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몰라….”

“뭐? 그게 오빠의 악몽이었어?”

“맞아. 완전 악몽이었어. 웬 얼굴만 번지르르한 게 너를 홀라당 낚아채서 결혼하는데, 떠나지 말래도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가더라.”

“겨, 결혼?”

내 나이 열두 살인데 웬 결혼?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한편, 악몽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네즈는 아니었는지 그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물었다.

“꼬맹아. 너 설마 만나는 남자 있는 건 아니지?”

“오빠…. 의심하기 전에 내 나이를 생각해 줄래? 있어도 단순한 친구겠지.”

“그래도 혹시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놈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내가 사지를 전부….”

“사지를 뭐 어쩌겠다고?”

찌릿. 노려보는 시선에서 말실수를 깨달은 라네즈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불쌍하게 끙끙거리는 그를 흘겨본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많은 적들을 몰살하고 다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소드 마스터가 어릴 때 이렇게나 팔불출일 줄은 나도 몰랐지.’

냉혈 기사 카론도 점점 잔소리꾼이 되어가는 것 같고….

“…응? 카론?”

“예. 부르셨습니까?”

“헉!”

멍하니 중얼거리던 엘레인은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나타나는 카론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야!?

참고로 방에 돌아가 있겠다고 했던 약속을 대차게 어겼던 엘레인이었다.

엘레인이 없는 걸 확인하고 바로 황궁 이곳저곳을 찾으러 다닌 건지, 운 좋게도 라네즈의 몸을 살피고 황제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리러 가기 전까지 그를 보지 못했으나….

“이야기는 모두 끝나신 겁니까?”

싱긋 웃는 얼굴이 이렇게나 무서워 보일 수가 있는 거였나.

엘레인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난 죽었다!’

***

결국, 그날 엘레인은 장장 세 시간 동안이나 카론에게 안전 수칙과 그것을 꼭 지켜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다음날. 진이 빠져서 영주성으로 돌아온 엘레인은 책상 위에 엎어져 웅얼댔다.

“카론은 내게 너무 버거워.”

“카론 경께서 영주님을 괴롭혔습니까?”

“그렇긴 한데 내가 약속을 안 지켜서 그런 거라….”

“그렇다면 영주님이 잘못하신 거군요.”

으으.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다!

딱 잘라서 말하는 집사의 말에 의기소침해진 엘레인은 꾸물꾸물. 손을 움직여 턱을 괴었다.

“그래서… 도로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어?”

“예.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땅 다지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페른 영지와의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표현할 정도니 엄청나게 오래 걸릴 작업은 아니다.

엘레인은 흡족한 얼굴을 하며 다음 지시를 내렸다.

“거기서 베어낸 나무랑 박혀 있던 돌들도 한곳에 다 모아 놨지?”

“예. 영주님 말씀대로 제재소에 팔 것과 제지소에 팔 것들로 따로 분류하고, 돌 역시 도로와 숲 사이를 분리,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비슷한 크기로 잘 쪼개어 놓았습니다.”

“완벽하네. 바닥에 깔 화강암, 세트(sett)는 상인들한테서 사는 걸로 하고 슬슬 쪼개놓은 돌들로 경계선을 만들자. 아! 세트는 같은 크기로 통일해야 해!”

“알겠습니다.”

집사는 영주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드는 의문.

집사는 궁금한 것을 바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외관에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사실 마차가 다니기 수월한 길이 목적이라면 단순한 흙길이어도 된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다지고 방해가 되는 나무와 돌을 치우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길이 되니까.

하지만 엘레인은 그 이상을 바라고 있다.

경계선의 구분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바닥에 돌을 깔거나 그 크기가 일정하기까지 해야 하는 건 좀 의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필요 없는 일처럼 보인달까.

하지만 엘레인의 생각은 달랐다.

“당연하지. 내가 만들 도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니까.”

“예? 그 돌길에 뭔가 다른 용도가 숨어 있는 겁니까?”

“응. 우선 굳이 같은 크기로 통일하고자 한 건 그게 외관상 예쁘니까!”

아….

맥이 빠지는 대답에 집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엘레인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그런데 집사 아저씨. 내가 도로를 만든 이유가 뭔지 기억나?”

“물론이지요. 마법사를 통해 석재를 운송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신 석재를 들여올 길을 만드는 것이잖습니까.”

“바로 그거야. 근데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 놓은 길 위로 무거운 석재를 운반하는 도중 비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야 진흙 바닥이 움푹 패이고 종국에는 바퀴가 빠지는… 아!”

드디어 깨달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집사의 모습에 엘레인이 방긋 웃었다.

“맞아. 꼭 비가 오지 않더라도 결국엔 수많은 마차가 오가는 와중에 길이 망가져서 이동에 방해가 될 거야. 하지만 단단한 돌로 만들어 놓으면 앞서 말한 문제들을 사전에 막을 수가 있지.”

“과연….”

“뿐만 아니야. 돌 사이의 틈이 양옆의 도랑으로 물을 즉시 배수해줘서 비가 올 때 별다른 조치도 필요하지 않아. 말굽도 울퉁불퉁 흙길을 걷는 거랑 달리 안정감이 높아서 미끄러지는 일도 훨씬 줄여 줄걸? 마차의 탑승감도 더 좋아질 거고 말이야.”

“허어.”

집사는 크게 감탄했다.

수도의 몇몇 곳에는 그런 식으로 돌길이 깔려 있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미관상 이유로 그리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비가 오면 흙탕물이 되는 거리는 언제나 골치를 썩이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외에도 이렇게나 많은 이점이 숨어 있을 줄이야….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참으로 아는 것이 많은 영주님의 모습에 집사는 크게 감복했다.

‘과연 누가 저분을 고작 열두 살 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집사는 자신의 우둔함을 반성하며, 영주님을 모시는 데에 어울리는 집사가 되기 위해 더욱더 정진하고자 다짐했다.

“페른 영지랑 거리가 그리 먼 것도 아니니까 서로 산책로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아. 고색창연한 게 왠지 엄청나게 멋질 것 같지 않아?”

“양옆으로 숲이 늘어져 있으니, 사계절을 즐기기에 확실히 좋겠군요.”

“가을로 넘어가면 엄청나게 예쁠걸!”

형형색색으로 물든 나뭇잎! 아름답게 흩날리는 낙엽!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엘레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렇게 보면 또 그 나이대 또래 같은데….’

집사는 양파처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영주님의 매력에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서 영주님이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지 다시 한번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즐거운 담론을 나누던 와중.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 하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저… 영주님.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누구?”

“보부상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보부상? 그들이 왜 날 찾아왔지?

짐작되는 게 전혀 없는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답했다.

“일단 들어오시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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