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책상 앞에 앉은 엘레인은 마카롱을 우물거리며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 보자면, 우선 첫 번째 방법. 약 10여 년 뒤에서나 발견되는 철광산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략적인 위치만 알 뿐이지 확실한 위치는 알지 못하기에 마법사나 광맥 탐지 전문인을 고용해서 그 부위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
물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부근의 땅을 살 돈도 마련되어 있어야 하며, 초반 개발 비용이 상당하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고로 초반 자금이 없는 지금은 일단 스킵.
두 번째 방법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뒤에나 나올 법한 물건이나 아티팩트를 개발하여 특허를 낸 뒤 사람들에게 판매를 하는 것.
이 방법의 경우에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디어는 넘쳐나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다.
대충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안다면 아르닐이나 능력 좋은 마법사들에게 발명을 맡길 수 있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으으음. 어떤 게 좋을까….”
엘레인은 머릿속을 뒤져가며 끙끙 앓았다.
오늘의 유일한 간식. 달콤한 레몬 마카롱을 눈앞에 둔 채 고사를 지내고 있는 듯한 모습에 집사가 결국 타임을 외쳤다.
“영주님. 너무 일에만 집중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잠시 머리 좀 식힐 겸 이거라도 좀 보시겠습니까?”
“이게 뭐야. 책이네?”
“예. 보부상이 영주님께 드리는 선물인데 팬픽이라는 거랍니다.”
‘팬픽? 그게 뭐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어감이 좋다.
심지어 책도 여러 권이다.
양피지 대신 종이가 개발되면서 책값이 조금 저렴해졌지만, 그럼에도 비싼 카테고리에 속하기 때문에 조금 의외롭기도 했다.
“어디 보자. 책 제목이 숲의 요정?”
엘레인은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펴며 내용을 읽어갔다.
하지만 얼마 읽지도 않아서 엘레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집사 아저씨. 여기 주인공 이름이 나랑 같은데?”
“아마 여기에 있는 책 모두가 영주님을 주인공으로 한 걸 겁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엘레인이 화들짝 놀라 묻자 집사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듣기론 그 팬픽이라는 것은 특정 누군가를 동경하거나 따르는 사람들의 창작물을 뜻한다더군요. 그리고 저 책들은 모두 영주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쓴 책이고 말입니다.”
“뭐? 왜 나 같은 사람을 동경하고 그래?”
“아니, 영주님이 뭐 어때서 그럽니까! 오히려 저는 영주님 같은 분이기에 다른 이들도 따르고 동경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뭐지. 이게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감정 이입을 하고 볼 일인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엘레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집사는 여전히 두 눈을 뜨겁게 활활 불태우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열기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 엘레인은 다시금 팬픽이라는 책을 바라보았다.
숲속의 작은 엘레인부터 대상인 엘레인. 거기다 엘레인 여신 일대기까지….
음. 이건 왠지 절대 보고 싶지 않군.
손가락으로 집어 멀리 치워낸 엘레인은 곱아든 손가락을 잼잼 쥐었다 펴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
“어? 근데 이거 같은 책 제목도 섞여 있는데?”
“아무래도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어차피 같은 내용일 테니 하나만 골라서 보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어디 보자…. 아니, 잠깐. 나 열두 살인데 벌써 연애하고 있어?”
휙휙. 책장을 넘겨보던 엘레인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상대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 모를 멋진 왕자님.
참고로 여기서 엘레인은 구박데기 하녀로, 이름 모를 멋진 왕자님과의 풋풋한 사랑으로 인해 신분 상승을 누리게 되는 그런 동화였다.
워낙 짧은 내용인 데다가 그림까지 귀여운 훈훈한 동화라서 거부감은 없었지만, 집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허어. 어떤 간 큰 자가 감히 영주님을 하녀로 만든 건지 모르겠군요. 당장 찾아내서 요절을….”
“에이. 팬픽이라면서. 창작물인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됐어. 그나저나 진짜 같은 내용이네?”
“워낙 인기가 많아서 필사본이 많이 돌아다니는 듯합니다.”
“필사본?”
엘레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집사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영주님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이니 이것으로 로열티를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뭐? 그 말은 이 사람들한테 돈을 삥 뜯으라는 말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님을 상대로 쓴 글이라면 당연한 결과이지요.”
앞서 옹호했던 것과 달리 집사는 꽤나 괘씸한 얼굴로.
특히 구박데기 하녀와 왕자님 동화책을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돈이 궁해도 엘레인은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차라리 내가 정당하게 돈을 벌고 말지.”
“역시 영주님. 영주님의 천사 같은 마음에 이 집사는 또 한 번 탄복했습니다.”
“그, 그래. 근데 이것 외에도 똑같은 책이 몇 개 있네. 글씨도 다 다르고.”
“아무래도 필사본이니까요. 사람 손으로 직접 쓴 것이니 다 다를 수밖에요.”
“대단하네. 이 많은 걸 어떻게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 쓸 수가 있지? 진짜 힘들겠다.”
“그야 그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으니까요.”
“엥? 방법이 왜 없어?”
엘레인이 놀라 묻자 집사가 더 놀라서 되물었다.
“예? 그럼 뭐로 씁니까?”
“기계로 하면 되지.”
“…무슨 기계 말씀이십니까?”
의식의 흐름대로 답하던 엘레인은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아직 활자는커녕 타자기와 활판을 이용한 인쇄기도 없을 때지?
새삼 이 시기의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엘레인은 문득 머릿속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잠깐만. 다른 건 몰라도 활자 정도는 내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처음 발상이 어려운 거라고.
처음 활자가 개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탑의 마법사들은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대로 글자가 적히는 타자기와 활판을 이용한 압동식 인쇄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즉, 활자의 의의와 활판의 원리를 마탑주에게 알려주어 기계 제작을 요청한다면….
“영주님?”
엘레인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방싯방싯 웃었다.
이거 어쩌면 도로 공사를 단번에 끝낼 정도의 큰돈을 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엘레인이 아는 곳 중 물건을 가장 잘 만들어내는 곳은 어디인가.
따질 것도 없이 단연코 적색 마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폭죽에 대해 아이디어를 제공한 뒤로 지금도 꽤 짭짤한 로열티를 받아내고 있는 엘레인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우선 적색 마탑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인쇄기 제작을 맡긴다.
그리고 인쇄기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여하는 형식으로 값을 지불하게 하고 그중 몇 퍼센트를 로열티로 받는다.
물건을 만들 능력이 되지 않고 또 그것을 관리 유지할 기술도 없으니 처음부터 위와 같은 내용으로 마탑과 계약하는 편이 좋다.
앞서 특허를 받아온 활자와 계약서를 챙긴 엘레인은 위풍당당하게 적색 마탑주, 벤서를 찾아갔다.
“으아닛! 황녀님 아니십니까? 미리 연통을 주셨다면 제가 직접 찾아뵈었을 것인데….”
“괜찮아요. 오늘은 의뢰인으로서 온 거거든요.”
“호오. 의뢰라 함은 기대를 좀 해 봐도 되는 부분입니까?”
벤서의 눈빛과 기세가 달라졌다.
황녀님께서 네 살배기이던 시절.
폭죽이라는 엄청난 물건의 존재를 무지한 적색 마법사들에게 알려주신 이후, 적색 마탑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 떡상하였다.
설마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자, 엘레인이 수줍게 웬 나무 조각 따위를 떡하니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한번 자세히 살펴볼래요?”
하긴 황녀님께서 쓸데없는 것을 가져왔을 리가 없지.
그녀의 말대로 나무 조각을 건네받은 벤서는 그 끝에 양각으로 도드라진 제국어들을 보며 감탄사를 내비쳤다.
“오호라. 상당한 실력자가 양각을 한 모양이로군요. 이렇게 작은 글씨를 새길 수 있다니. 그런데 이건 뭐에 쓰는 물건입니까? 단순한 도장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지요.”
“여기다가 원하는 글자를 배치해서 홈에 끼워 넣어 볼래요?”
엘레인은 이번에 가로선으로 구멍이 줄줄이 뚫려있는 네모난 나무판을 내밀었다.
그에 벤서는 ‘세계 최강 적색 마탑주’라는 글자를 만들어내어 홈에 끼워 넣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잉크랑 넓은 트레이 좀 줄래요?”
엘레인은 군말 없이 준비물을 챙겨온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잉크 마개를 빼내었다.
“우선 그릇에 잉크를 붓고.”
쪼르르—
새까만 잉크가 은색 트레이 내부를 얕게 채운다.
엘레인은 그 위로 활판에 끼워진 활자를 그대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허어. 이건 또 신박한 도장이로군요. 그런데 이게 왜 필요한 겁니까?”
벤서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그 똑똑한 레드가 아직도 이 활자의 진가를 못 알아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엘레인은 뒤늦게 책상 위에 저 혼자 슥삭슥삭 움직이는 깃펜을 발견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은 굳이 손 아프게 글을 쓸 필요가 없구나!’
마법 한 번이면 다 되는 것을 뭣 하러 미련하게 팔 근육을 소모시킨단 말인가?
불편함 혹은 개선점을 따로 느끼지 못하는 그이니, 이 활자의 장점을 단번에 알아챌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도장이 아니라 활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활판을 이용해 찍어내면 일일이 필사를 하는 것보다 빠르게. 책을 왕창 만들 수 있죠.”
“한마디로 마법사가 아니어도 힘들이지 않고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거로군요.”
“바로 그거예요!”
엘레인이 환하게 웃으며 외치자 벤서의 입꼬리도 자동적으로 올라갔다.
처음엔 이게 굳이 필요한 건가 싶었는데, 확실히 일반인의 범주로 생각하면 엄청나게 획기적인 물건이다.
최근에 들어서서는 파티와 축제에 절대 빠지지 않게 된 폭죽.
그에 이어서 등장한,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고여 있는 문화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활자까지.
언제나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벤서지만, 황녀 저하의 한계는 도무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가 원하는 건 활자와 활판을 이용한 인쇄기를 만드는 거예요. 원하는 값을 설정해 놓으면 자동으로 계속해서 물건을 찍어내는 거죠. 가능할까요?”
“이런 대단한 물건을 우리 적색 마탑에 맡기겠다고 하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이번 일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역시 마탑주님! 여기, 이건 계약서예요.”
엘레인의 철저한 준비성에 다시 한번 놀란 마탑주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꼼꼼히 읽어보았다.
“흐음. 정해진 장소 내에서의 대여 방식이라. 이런 식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또 처음 알았군요.”
“이런 식으로 하면 지속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니까요. 결국은 인쇄기의 원리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벌어야죠.”
“하긴 기계를 팔면 빠르게 내부를 살펴 짝퉁을 만들려는 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겠군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도대체 이 황녀님께선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있는 걸까?
벤서는 감탄 섞인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가리켰다.
“근데 우리가 받아 가는 돈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에이. 저는 그저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뿐인걸요. 인쇄기를 개발하고 만드는 건 결국 적색 마탑 사람들이니까 저는 앞서 활자와 활판의 로열티만 받아 갈게요.”
“어쩜 이리도 마음씨가 고우신지….”
벤서는 크게 감복했다.
요즘 적색 마탑에 잘 들르지 않아 마음이 떠나간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번 일로 확실하게 알았다.
황녀 저하께서는 여전히 이 몸을 지지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는 것을!
“그래서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참고로 재질은 금속으로 하는 게 좋아요.”
엘레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계약서에 명시한 대로라면 필요한 금액의 50퍼센트를 이쪽에서 투자해야 한다.
모든 비용을 그들에게 부담하라는 건 순 날강도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어디 보자…. 우선 금속을 섬세하게 양각할 수 있는 조각사를 고용해야겠지요. 거기다 인쇄기 개발 및 기타 부품 가격과 인건비를 계산하면….”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던 벤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최소 500골드는 들겠군요.”
“최, 최소 500골드요?”
긴장한 낯으로 그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던 엘레인이 쩡하니 얼어붙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온 말이라는 게.
“혹시… 외상 안 되나요?”
“…….”
모양 빠지게 외상을 외치고만 엘레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제엔장! 이럴 줄 알았으면 마카롱 1일 1식이 아니라 아예 금지를 해야 했던 건데!
반면 벤서는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엘레인의 모습에, 무릎 위에 있던 손을 천천히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허윽!”
귀여움에 아주 제대로 치인 그는 속으로 추억 보관 장치를 애타게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아주 기가 막힌 생각.
“혹시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아르바이트 한번 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르바이트요?”
“어렵지 않습니다. 조만간 우리 마법사들 사이에 운동회가 열리는데, 우리 적색 마탑 팀에서 응원을 맡아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비용을 저희 쪽에서 처리하도록 하지요.”
“네? 정말 응원해주는 것만으로 모든 비용을 부담해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지요. 저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합니다.”
레드가 방긋방긋 웃었다.
마탑주 입장에선 고작 응원이 아니지만, 그걸 모르는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에요!”
“황녀 저하야말로 말 바꾸시면 안 됩니다. ‘꼭’입니다, 꼭.”
그때 엘레인은 알았어야 했다.
벤서가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까지 ‘응원’에 목을 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