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황녀님께서 레드 팀의 응원단장을 맡다니.
감히 누가 그런 상상을 하겠는가?
믿기 힘든 상황에 위블렌은 물론이고 블루 팀 모두가 쩡하니 얼어붙어 있던 그때.
사회자가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레인의 마음도 모르고 신이 나서 외쳤다.
“자, 그럼 크게 포효를 내질러주실까요!”
“…….”
순간 엘레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들 앞에서 동물 옷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치사할 것 같은데 여기서 사자 울음소리를 내라니.
평소의 엘레인이라면 절대 반대를 외치며 호다닥 자리를 피했겠지만, 지금 엘레인에게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마법사의 운동회날 응원 단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완수할 것.
만약 벤서와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인쇄기 개발 건은 완전히 물건너가 버릴 터.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엘레인은 최대한 느릿하게 동물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리며 살구색 젤리를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
그리고.
“크, 크와앙!”
“어헉!”
깜찍한 포즈와 사랑스러운 얼굴이 합쳐져 무시무시한 무기가 만들어졌다.
심지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하기라도 하려는 건지, 촬영팀은 엘레인의 얼굴을 추억 저장 구슬로 초근접하게 찍어내어 더 커다란 판 위에다가 실시간으로 대빵만 하게 비춰내는 정성까지 보여줬다.
그 결과.
“으헉!”
“이, 이건 완전 반칙…!”
관중석의 모두가 심장께를 움켜쥐고 일명 심쿵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 격렬히 저항한다.
귀여움의 극한을 치사량만큼 맛본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레드 팀이 준비한 비장의 수.
“이, 이겨라! 이겨라! 지. 상. 최. 강 레드 팀! 현. 존. 최. 강. 레드 팀!!!”
레드 팀 마법사에게 쪼끄마한 적깃발 두 개를 받은 엘레인이 그것을 좌우로 열심히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엘레인의 앙증맞은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귀와 꼬리는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던 관객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크윽…. 나도 핑크 라이온 갖고 싶어!”
“말도 안 돼. 이게 이 세상 귀여움일 리 없어!”
“이 광경을 평생 간직하고 싶어….”
“여보! 우리 아내가 기절했어요! 여기 사람 좀 불러 주세요!”
엘레인의 귀여움과 동물 옷의 콤보에 제대로 치인 사람들이 부정맥을 앓으며 여기저기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엘레인 큐트 파워.
그로 인해 여론이 뒤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 한 명 있었으니.
“어떻게 저분이… 황녀 저하께서 레드 팀에 있단 말인가, 벤서!”
겨우 충격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온 위블렌은 벤서를 찾으며 격분했다.
“그리고 황녀님은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 옷이 더 잘 어울린단 말이다!”
처음 호랑이 옷을 입혔던 위블렌은 감히 황녀님을 빼돌리고 거기다 근본 모를 사자 옷까지 입힌 벤서에게 끝 모를 분노를 느꼈다.
어째 아르닐을 빼앗긴 것치고는 꽤나 여유롭더라니.
이런 뒷공작을 꾸미고 있었나!
‘그런데 잠깐. 만약 3황자 저하께서 저 모습을 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위블렌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만약 3황자 저하께서 황녀님의 저 귀여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필시….
“아아, 엘레인…. 사랑스런 내 동생!”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위블렌의 고개가 끼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보고야 말았다.
꿀이 철철 넘쳐흐르는 눈을 끔뻑이며 당장이라도 레드의 진영으로 넘어가려고 애쓰는 아르닐의 모습을!
“저, 저하! 당장 저하께서 못 넘어가도록 막아라!”
“으어억. 무슨 힘이 이렇게 세십니까!”
“아악! 뼈 맞았어! 코뼈 맞았다고!”
지금 현재 여동생만 보이는 아르닐은 상당히 난폭했다.
자꾸 자신을 옭아매려는 자들을 저 멀리 밀쳐내려 했으나 워낙 잡아끄는 손이 많아서 그런지 도통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장 사랑스런 여동생에게 달려가서 꼭 끌어안은 뒤, 탐스러운 사자 갈기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해줘야 하는데!
왜 앞길을 막느냐!
“이놈들….”
화가 난 그가 결국 이 일대를 날려버리기로 결심한 듯 손끝에 마력을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경악한 위블렌은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황자 저하! 저하께서 이 대결에서 이기시면 황녀님께서 저하를 우러러보실 겁니다!”
멈칫. 아르닐을 움직이는 마법의 단어.
그 단어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자 거짓말처럼 아르닐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손끝의 마력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위블렌은 십년감수 한 얼굴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
“그러니까 지금은 꾹 참고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기다린 자에게 더 큰 보상이 있듯이. 지금 당장 달려가는 것보다 멋있는 모습을 잔뜩 보여주고 난 뒤에 찾아가면 황녀님의 반응도 사뭇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마탑주님 말씀이 옳아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다행히 아르닐은 당장의 꿀보다 나중의 응축된 꿀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위블렌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식은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스윽 훔쳤다.
그리고.
“벤서 네 이놈! 대체 어떤 감언이설로 황녀 저하를 모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대결에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다!”
“흥.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위블렌의 도발에 이제는 벤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코웃음으로 답했다.
중간에 낀 사회자는 그 둘을 연신 번갈아 보더니 흥미진진하다는 듯 밝게 웃으며 외쳤다.
“역시 뜨거운 라이벌답게 다들 화끈한 각오로 시작하는군요! 레드와 블루 팀! 과연 둘 중 승리를 차지하는 팀은 어디일 것인가! 마지막으로 플로스 영주를 독차지하는 팀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우와아아!”
시작부터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대치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면 레드 팀의 응원 단장을 맡게 된 엘레인은 멍하니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속으로 반문했다.
‘저기요. 왜 갑자기 제가 트로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거죠.’
이게 바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나가는 상황인 건가.
엘레인은 정말이지 울고 싶어졌다.
***
엘레인이 핑크빛 사자 후드를 사선으로 내리고 있을 무렵.
드디어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운동회의 처음을 장식할 경기 종목은 바로 손바닥 밀치기 게임.
엥? 아무리 운동회라는 깜찍한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경기 종목이 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각 팀의 선수가 한 명씩 나와 동그란 원판 위에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천천히 열리는 바닥.
화르륵—
휘이잉—
선수가 올라가 있는 동그란 원판을 제외한 모든 바닥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블루 팀의 뒤쪽에는 활활 타오르는 진짜 불구덩이가.
레드 팀의 뒤쪽에는 꽁꽁 얼어붙은 얼음 가시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살벌한 플로워가.
말 그대로 열화지옥, 빙추지옥 그 자체인 구덩이를 슬쩍 확인한 출전자들이 동시에 외쳤다.
“죽일 셈이냐!”
손바닥 밀치기 게임은 별로 준비할 게 없어서 상대 진영 구덩이에 벌칙을 깔아 놓기로 협의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건 벌칙치고는 너무 살벌하지 않나?
이 정도면 라이벌 의식을 넘어서 불구대천지원수를 보는 수준이다.
지옥 구덩이의 모습을 본 엘레인과 관중석 사람들도 살이 떨려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놀랍게도 사회자는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떨어지는 사람이 마법으로 잘 살아남는 것도 실력이지요! 자, 그럼 시합 시작!”
“우아악!”
시작과 동시에 멍 때리고 있던 블루 팀 마법사가 불구덩이로 떨어졌다.
모두가 경악에 가득 차 비명을 지르던 그때.
사회자의 말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었는지, 노련한 마법사는 불구덩이에 옷자락이 닿기 직전 윈드 마법으로 몸을 띄웠다.
“휴우. 다행이다.”
마법사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는 그러려니 했다.
이 몸의 놀라운 부동심과 판단력. 그리고 마법 실력에 감탄을 한 거겠지.
어이없게 졌지만 그렇다고 가오가 죽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멀거니 서 있던 사회자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저기.”
“왜 그러시죠?”
“머리카락 타고 있는데 괜찮으신지?”
“꺄아악!”
화르륵—!
그제야 제 머리가 홀라당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블루 팀 출전자가 황급히 머리 위로 물을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마법사.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그는 머리카락을 지키지 못했다.
“호오. 아주 대단한 마법사로군.”
“크으읏…!”
큰소리 뻥뻥 친지가 언제인데 처참한 꼴로 경기에 져버리자, 위블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황녀 저하를 제멋대로 꼬신 녀석에게 정의의 철퇴를 날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경기에서 이겨야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줄줄이 탈락하는 블루 팀 마법사들.
“첫 번째 경기는 레드 팀의 승!”
결국, 들려오는 사회자의 냉정한 외침에 위블렌의 몸이 휘청거렸다.
첫 번째 종목부터 우승을 넘겨주고 말다니.
앞서 응원단에서 진 것도 그렇고 출혈이 너무 크다.
심지어 이 녀석들. 황녀 저하의 귀여움에 헤벌쭉. 정신을 빼앗겨서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이 녀석들! 이번 경기에서 지면 한 달 내내 지원은 없을 줄 알아!”
“히익!”
“시정하겠습니다!”
황녀 저하께서 응원하는 모습을 헤헤거리면서 바라보고 있던 블루 팀 마법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외쳤다.
그제야 이쪽에서 시선을 떼고 제대로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에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으. 이제 첫 경기가 끝난 거야?”
절망적이다.
안 그래도 뙤약볕이라 더워 죽겠는데 운동회가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
벌써부터 녹초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자, 갑자기 시원한 냉기를 품은 바람이 엘레인의 앞머리를 간질였다.
“뭐지? 시원하다.”
기분 좋은 바람에 헤벌쭉 웃으며 몸을 맡긴 엘레인이 양손에 꼭 쥔 적기를 아까보다 힘 있게 흔들었다.
시원한 바람을 보낸 장본인.
레드 로브를 뒤집어쓴 뱅갈이 그런 엘레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 그럼 바로 다음 경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다음 경기 종목은 공 굴리기!
정확히 말하자면 비눗방울을 형상화한 공 안에 들어간 마법사가 직접 그 공 굴리면서 장애물을 피하는 경기다.
생각보다 어려운 경기여서 바람 관련 마법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가 관건!
더위가 사라지자, 나름 경기에 흥미를 가진 엘레인이 두 눈을 빛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우오오! 대단합니다, 레드 팀! 오로지 뜀박질로만 장애물을 통과하고 있어요!”
사회자의 말대로 레드 팀은 오로지 육체적인 힘만으로 가뿐히 장애물을 피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블루 팀이 그대로 질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모두가 잊고 있던 한 가지.
이번 경기는 블루 팀에서 스테이지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촤아악—!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며 블루 팀 마법사가 들어가 있는 투명한 공이 붕 떠올랐다.
그가 사용한 것은 바람 마법이 아닌, 물 마법.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낸 그는 마치 서핑보드를 타고 가듯 편안하고 우아하게 레드 팀을 앞질러나갔다.
“이 무슨… 크허업!”
심지어 그냥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그림을 만들어낼 생각이었는지, 옆을 지나가는 파도에 휩쓸린 레드 팀 마법사가 장외로 쭈우욱 밀려나 버렸다.
속절없이 저 멀리 나가떨어진 레드 팀 마법사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사회자에게 항의를 했다.
“경기 중 상대 팀을 방해하다니! 이번 경기는 무효입니다!”
물론 그 항의는 단번에 무산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자기 능력을 사용하는 거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는 조항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을 방해하지 말라는 조항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는 블루 팀의 화려한 독무대로 끝이 났다.
벤서는 이를 뿌득 갈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위블렌을 찌릿 노려보았다.
“치사한 놈. 재밌냐?”
“응. 아주 재밌네.”
위블렌은 그제야 인상을 쫙 펴고 희희낙락하였다.
하지만 이제야 서로 한 방씩 먹인 상황.
다음 경기는 단체전인 물건 멀리 던지기 게임으로, 이번에도 블루 팀이 꽤 유리해 보였다.
“물로 추진력을 얻으면 멀리 가겠지.”
“간다!”
푸화아악—!
그들의 예상대로 물건의 끄트머리에 물대포를 쏘는 형국을 만들어내자 동그란 쇠공이 멀리멀리 날아가 반대쪽 관중석 코앞에 떨어졌다.
거의 최상급 결과에 블루 팀 마법사들은 신이 났다.
그리고 그 시각 레드 팀에서는.
“발사 준비 완료됐습니다.”
“카운트 다운 시작.”
“3. 2. 1!”
“발사!”
푸슈우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비상한 레드 팀의 쇠공이 경기장을 가뿐히 넘어, 저 멀리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졌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블루 팀 마법사는 뒤늦게 레드 팀 마법사가 잡고 있는 대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야! 너희 그거 반칙이야!”
“맞아! 무기를 들고 오면 어떡해!”
운동회에서는 오로지 마법사의 기량만을 허용하는 대회.
무기를 갖다 쓰고 있는 지금 레드 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이건 제힘으로 만든 거니 상관없습니다만?”
“뭐라고?”
레드 팀 측 마법사가 안경을 ‘척’하고 올리면서 대답하자 블루 팀 마법사들의 이마 위로 핏줄이 솟았다.
그러나 사회자의 의견은 달랐다.
“인정합니다. 완성품을 가져온 게 아니라 재료를 가져와서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그 마법사의 기량으로 간주! 이번 경기는 레드 팀의 승리입니다!”
“말도 안 돼.”
“저걸 실시간으로 만들어냈다고?”
블루 팀은 물론이고 관중석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역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역시 신박한 아티팩트들을 줄줄이 만들어내는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다운 아주 놀라운 면모!
그렇게 점점 상황이 흥미진진해지는 한편. 엘레인은 성의 없이 깃발을 흔들며 딴생각에 빠졌다.
‘저기요. 그래서 여기 밥은 언제 주는 거죠?’
아침을 굶고 온 엘레인에게 이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