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엘레인은 슬슬 고파오는 배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하필이면 다음 대회 종목도 높이 점프해서 날개 달린 쿠키를 먹는 대회여서 그런지 군침이 절로 돌았다.
“맛있겠다.”
날개 달린 쿠키가 허공을 종횡무진하며 마법사들을 농락한다.
엘레인은 개중에도 초코칩이 알알이 박힌 쿠키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이대로 내 입으로 골인해줬으면 좋겠는데….’
엘레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열렬하게 소망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눈앞을 얼쩡거리던 쿠키는 마법사를 피해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야속하게 멀어지는 쿠키를 헤어진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배 속도 더 이상의 굶주림을 참지 못하겠는지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을 친다.
꼬르륵—
“배고프다.”
배고픔이 지나치면 서럽다고도 했던가.
엘레인이 한숨을 폭 내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자가 존재했으니.
“어? 3황자님. 지금 여기로 오시면 안 되는데….”
날아다니는 쿠키를 보충하고 있던 마법사가 당황해서 외쳤다.
하지만 아르닐은 그 목소리를 들은 체도 않고 쿠키가 든 바구니를 챙겨 엘레인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아, 안 돼! 쿠키 바구니가!”
뭐지. 쿠키 도둑이라도 나타났나?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머리통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그 얼굴은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중 하나. 바로 아르닐이었다!
“아, 아르닐 오빠도 여기 있었어?”
“응. 나 푸른 마탑 소속이잖아. 꼭 참가해야 한다고 해서 왔지.”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르닐은 여전히 푸른 마탑 소속이었지.
엘레인은 산뜻하게 미소 짓는 아르닐을 멍하니 올려보다 말고 그의 뒤편을 슬쩍 살펴보았다.
“왜 그래?”
“다른 가족들은? 설마 다 같이 온 거야?”
“아니. 바보 형은 수련한다고 훈련장에 박혀 있고 할머니랑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빠서 안 오셔. 애초에 내가 이 운동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따로 알리지 않아서 아마 모를 거야.”
“휴우. 다행이다.”
눈에 띄게 안도한 엘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르닐은 푸른 마탑 소속 마법사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가족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은 꼭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깜찍한 여동생의 모습을 저 혼자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진 아르닐은 싱글벙글 웃으며 엘레인을 바라봤다.
“근데 오빠.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적색 마탑주와도 사제관계를 맺고 있으니 여기에 있어도 상관없어.”
“그게 아니라 머리에 두른 그 머리띠. 지금 날개 달린 쿠키 잡으려고 출전한 사람들이 끼는 거 아니야?”
엘레인의 손가락이 아르닐의 새하얀 이마를 두르고 있는 푸른색 머리띠로 향했다.
그랬다. 아르닐은 지금 중대한 결투가 이루어지는 와중 전장을 이탈하여 엘레인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그것도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쿠키를 한아름 들고!
“배고프지? 이거 너한테 주려고 왔어.”
“우와! 쿠키잖아? 정말 내가 먹어도 돼?”
“물론이지. 우리 엘레인 배고프면 안 되니까 얼른 먹어. 체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꼭꼭 씹어서. 알았지?”
“응!”
아래에서 마법사가 쿠키를 돌려 달라며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아르닐의 사일런스 마법에 가로막힌 탓에 엘레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대회에 사용할 쿠키를 여동생에게 갖다 바친 아르닐은 옴뇸뇸 쿠키를 맛보는 엘레인을 보며 세상 환하게 웃었다.
‘경기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동생이 배를 곯는 걸 절대 못 보지.’
그리고 그런 풋풋한 남매를 지켜보던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고했다.
삑—!
“3황자 저하의 반칙패로 이번 우승은 레드 팀!”
“우와아아!”
얼떨결에 거머쥔 우승에 레드 팀이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반대로 블루 팀은 3:1이라는 처참한 점수판을 보며 잔뜩 침울해졌다.
“이럴 수가. 이번에는 우리 팀이 이길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돼…. 3황자님 레드 팀의 첩자였던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나왔지만, 위블렌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가장 망연자실하고 있는 사람은 단연코 그였으니까 말이다.
사회자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 흐느적거리고 있는 위블렌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방긋!
“어… 이대로 계속 가면 레드 팀이 이기는 게 불 보듯 뻔하군요!”
“크읏. 대놓고 뼈를 때리다니….”
알고 보니 이 자식이야말로 레드 팀의 첩자가 아닐까?
블루 팀의 멘탈을 박살 낼 숨은 첩자 같은 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완전히 그럴듯한 내용에 위블렌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저 동그란 뒤통수에다가 워터볼을 갈겨 볼까?
그런 위블렌의 위험한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사회자가 상당히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대로 레드 팀이 이겨버리면 재미가 없지요! 그러니 마지막 게임에서는 5점을 걸고 레드 팀과 블루 팀의 승패를 가르겠습니다!”
“뭐라고?”
순간 벤서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갑자기 게임의 룰을 멋대로 바꾸다니!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하자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관객들의 반응에 힘입어 어깨를 으쓱인 사회자가 이번엔 두 마탑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신 마지막 게임에서는 두 마탑주님께서도 참가해주셔야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후회 없는 대결을 하셔야 하잖습니까?”
“흐음.”
“커험.”
이렇게까지 자리를 깔아주는데 피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게다가 이번만큼은 예외로 마탑주인 자신이 직접 참가할 수 있다니….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니던가?
“알겠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간만에 힘 좀 써봐야겠군그래.”
레드 팀과 블루 팀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서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엘레인 또한 쿠키를 먹다 말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
“자! 드디어 마지막 경기입니다. 두 마탑주의 자존심을 건 매치! 과연 마지막에 미소를 지을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흥미를 돋우는 사회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굵은 밧줄 앞으로 그동안 경기에 참여했던 마법사들이 쭈우욱 늘어섰다.
상당히 많은 마법사들이 일렬로 서자, 레드와 블루 팀의 마탑주들이 가장 앞줄로 다가갔다.
이번 대결에서 이기는 자가 진짜 승자!
옆에서 조잘대는 사회자의 말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라도 한 건지 위블렌과 벤서의 두 눈에는 파랗고 새빨간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그럼 준비하시고!”
펑—!
사회자도 마법사였던 걸까?
그가 쏜 불꽃이 신호탄이 되어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줄다리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으라챠! 양측의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신체의 힘을 강화하고 있는 힘껏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양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
하지만 양측의 힘이 거의 동일한지, 중앙에 묶인 끈은 같은 자리에서 거의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하루 종일 밧줄을 부여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코앞에서 위블렌을 마주 보며 인상을 찡그린 벤서가 대뜸 마나서클을 회전했다.
그리고.
피유웅—
화르륵!
“아, 뜨!”
“으악 뜨거웟!”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마법사들이 몰려 있는 줄의 중앙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불똥을 만들어내어 블루 팀 뒤쪽으로 날려 보내는 것을 확인한 위블렌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 자식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 거지?”
“방금 우리 쪽으로 불똥을 튀겼잖나!”
“흥. 애초에 이 줄다리기 게임도 운동회 게임의 한 종목.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내비쳐서 이기는 것이 규칙이다.”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위블렌이 허허 웃으며 벤서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 은근한 눈빛에 괜히 기분이 더러워진 벤서가 인상을 찡그리자, 위블렌의 마나 서클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옴마야!”
“가, 갑자기 손이 미끈거려!”
이번엔 레드 진영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에 벤서가 눈썹을 까딱거리자, 위블렌이 휘파람을 불며 여상스럽게 답했다.
“단물을 좀 뿌려봤지. 일반 물이랑 달라서 좀 더 미끈거릴걸?”
위블렌이 개구지게 웃자 벤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마법들.
“우와… 이건 뭐. 운동회가 아니라 완전 전쟁이 따로 없네.”
“원래 다 싸우면서 크는 거야. 자, 여기 마실 것.”
“앗 고마워.”
엘레인은 아르닐이 손수 대령해준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눈앞의 장관을 구경했다.
여기저기 비명이 난무하며 난장판이 된 경기장.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하는 마탑주들이 참 잘들 논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엘레인이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어휴. 어쨌든 레드 파이팅! 레드 이겨라!”
정작 엘레인은 자본주의에 굴복한 모습이다.
***
전쟁 같던 마법사 대운동회가 끝이 나고 며칠 뒤.
적막감만이 가득한 회의실 내부. 언제나처럼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가 평소와 다른 대신들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다들 테이블에 꿀이라도 발랐나? 어째서 고개를 들지 않는 거지?”
“…….”
그의 싸늘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은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회의가 시작된 지 벌써 5분째.
슬슬 인내심이 바닥난 황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 얼굴이 그렇게도 보기 싫은 건가?”
움찔.
그것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흠칫 떤 대신들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개를 들지 않는 거지?”
“…….”
또 침묵이 흘렀다.
아까와 같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에 짜증이 난 황제는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바로 옆에 앉은 자를 바라보았다.
“거기 너. 당장 고개를 들어라.”
“예, 예에.”
하필이면 바로 코앞에 앉아서 불똥이 튄 대신이 온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제쪽을 바라보자마자 바로 쿵! 하고 다시 고개를 박는 대신.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황명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라.”
“으으….”
황제의 엄명에 대신이 파들파들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황제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쥐고 있던 펜을 반으로 뚝 부러트렸다.
그러나 대신들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님 뒤에 있는 저 초 거대한 사진.
그러니까 황녀님이 분홍색 사자 옷을 입고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는 정면 사진이 뙇! 하고 걸려 있어서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황제의 근엄한 표정과 산뜻 발랄한 황녀님의 사진이 너무나도 매칭이 안 돼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황제 딴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 이 순간 대신들은 일생일대의 시험대 위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내 안의 충성심을 시험하지 마라. 이 악마야!’
‘우리의 주군이 아무리 팔불출이래도 저 사진을 보고 절대 헤헤 웃지는 않을 거다!’
이처럼 대신들이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며 외무대신과 정보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대들… 여태껏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안 그래도 대신들의 이상한 파업 행위에 짜증이 나 있던 상황에서 지각한 주제에 당당히 들어오는 두 사람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황제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디 한번 변명이라도 해보라 눈짓을 하자, 초당당하게 앞으로 걸어온 정보대신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레드 팀에서 LA 굿즈를 만들어 판다기에 헐레벌떡 가서 구입을 하고 왔습니다.”
“LA 굿즈? 그게 뭐지?”
“바로 이겁니다.”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보대신이 바바리맨처럼 입고 있던 로브를 활짝 펼쳐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놀랍게도 분홍 사자 옷을 입은 엘레인 솜인형과 분홍 사자 키링 등. 엘레인과 관련되어 있는 물건들이 촤라락 달려 있었다!
“정보대신으로서 황녀님과 관련된 정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요. 가는 김에 황녀님 굿즈도 종류별로 쓸어올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핫!”
정보대신은 신이 나서 호탕하게 웃어 재꼈다.
황제가 어떤 눈으로 로브 안의 굿즈들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그것이 지각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
“하하하… 예?”
“벌로 그대가 가지고 있는 그 LA 굿즈라는 것을 모두 압수하겠다.”
“허, 허억!”
정보대신이 입을 떡 벌리며 절망했다.
황제는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은근슬쩍 자기 자리로 도망가려는 외무대신을 불렀다.
“어딜 가는 거지?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도 얼른 내놓아라.”
“이… 이럴 수가!”
정보대신과 외무대신은 사이좋게 절망했다.
고개를 숙인 채 겨우 시련을 이겨낸 대신들 역시, 눈앞에서 삥을 뜯는 황제의 모습에 또다시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