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마법사의 대운동회.
그곳에서 돌아온 엘레인은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수치사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
“으으. 창피해 죽겠네 증말!”
베갯머리에 얼굴을 묻은 엘레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눈만 감으면 이불을 뻥 차버리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흑역사가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조차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만들 만한 굉장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참고로 먼저 확실히 해 둘 게 하나 있다면, 그날 핑크빛 사자탈을 쓰고 이리저리 응원을 했던 모습은 가족 중에는 분명 아르닐만 알고 있었을 터였다.
당시 그를 발견한 엘레인은 무척 놀랐지만, 그래도 꽤 안심하지 않았던가?
다른 가족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심지어 아르닐 또한 가족들에게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하지만 엘레인이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그날 엘레인의 그 창피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르닐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한마디로 가족이란 틀 내에서만 생각한 나머지 경기장에 있던 마탑 마법사들과 관중석 관객들의 입소문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걸 왜 신문에 찍어놨냐 말이야…!”
대운동회에서 있었던 엘레인의 활약은 어처구니없게도 한 신문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덕분에 황가 사람들 모두가 그날의 일에 대해서 알아버렸음은 물론이다.
왜 불러주지 않았냐며 무척 아쉬워하던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하던 오르칼과 라네즈까지.
그들을 달래기 위해 그날 하루 동안 사자 옷을 또 한 번 입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흐아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얼굴에 몰린 열기를 식혀낸 엘레인이 몸을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집사 아저씨. 내가 갑자기 죽으면 사인은 수치사야….”
“세상에, 영주님!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가 옆에서 쭉 지켜보겠습니다!”
“…보통 이럴 때는 위로해야 할 타이밍 아닌가.”
엘레인은 세상 진지한 집사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면, 며칠 내내 영주님께서 우울해하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게 된 집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결심했다.
‘이것을 샀다는 사실은 무덤까지 들고 가야겠구나.’
그는 품 안에 있는 ‘요정 엘레인’ 키링을 더욱 깊숙이 숨겨 놓으며 굳게 다짐했다.
며칠 전. 적색 마탑에서 한정 판매 중인 엘레인 굿즈를 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도무지 그녀 앞에서 꺼내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이런 게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면 영주님께서 정말 수치사할지도 모르니까.
물론 엘레인에게 알리지 않겠다 뿐이지 집안의 가보로써 대대손손 물려줄 예정이다.
집사는 기운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려는 엘레인을 보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흠흠. 그나저나 무승부라니, 정말 놀라운 결과로군요.”
“아, 운동회 말이야? 사실 나도 레드가 이길 줄 알았어.”
엘레인의 등장 때문인지 레드 팀은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응원전에서도 그렇고 첫 번째 게임에서도 당당하게 승리를 차지했다.
그 뒤로 블루 팀의 맹활약 때문에 점수를 내어주긴 했지만, 다음 판에도 이기면서 완벽하게 기세가 기울었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진행된 줄다리기 종목. 무려 5점이라는 고득점이 걸린 게임에 양측 마탑주가 참가하면서 운동회는 말 그대로 개판이 되어버렸다.
경기장 한쪽이 부서지고 바닥 곳곳이 움푹 파이는 등.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난리가 나자, 당시 사회자이자 경기장을 빌려준 녹색 마탑주가 방긋 웃으며 전무후무한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안타깝군요. 동점이어서 무승부가 아니라, 수습이 안 되어서 무승부라니. 마법사 운동회 이래, 처음 있는 일 아닙니까?”
“전부 자업자득이지 뭐.”
아무리 라이벌 의식이 강한 사이라고 해도 확실히 그때의 두 마탑주는 너무 과했다.
녹색 마탑주가 중간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결국 누구 하나 다쳤을 만큼 난리였으니까 말이다.
당연하지만 양측 마법사들은 경기장을 박살 낸 대가로, 그날 밤이 새도록 부서진 곳을 복구해야만 했다.
죽어라 뒷정리를 하는 그들 사이로 엘레인은 당당하게 퇴근을 선언했지만 말이다.
“다음부터 마법사들끼리 뭐 한다고 하면 절대 엮이지 말아야지.”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굿즈는 굿즈고, 하마터면 영주님께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 집사가 크게 찬성했다.
엘레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최근 돌아가는 상황에 관해 물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은 어떻게 되고 있어?”
“우선 확장한 도로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신전 증축 또한 이번 주 내에 완공된다고 하니 걱정은 덜어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와. 벌써 신전 증축이 거의 끝나간단 말이야?”
“모두 영주님께서 커다랗고 튼튼한 도로를 깔아주신 덕분이지요.”
“그건 그렇지만….”
집사의 칭찬에 괜히 쑥스러워진 엘레인이 뺨을 긁적였다.
집사는 그런 영주님께 싱긋 웃음을 지어주며,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장 신경 쓰고 있을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적색 마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쇄기에 대한 거지? 뭐라고 하던데?”
“아마 다음 달쯤이면 기계가 완성될 것 같다고 합니다.”
“와! 엄청 빠르네?”
블루를 이기지 못한 분함과 마지막 전쟁에 다 쓰지 못한 에너지를 여기에 다 쏟아부으려는 걸까?
예상보다 이른 날짜에 조금 당황했지만 어쨌든 좋은 소식임은 틀림없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엘레인은 만면 가득 희색을 띠며 활짝 웃었다.
“슬슬 영지 발전에도 속도가 붙는 것 같네.”
“모두 영주님의 혜안 덕분이지요.”
“집사 아저씨도 참.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엘레인은 집사가 괜히 오버를 떤다 생각하며 하하 웃었다. 하지만 집사는 진심이었다.
왕 블루베리 사업을 시작으로 자선사업과 서비스업종의 발전 및 광고라는 수단을 이용한 디저트 대축제의 대호황 등.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오며 점차 발전해온 영지는 지금의 영주님이 없었더라면 절대 이루어내지 못할 쾌거를 계속해서 이룩하고 있다.
아마 그녀가 이곳의 영주로 오지 않았더라면….
또 진심으로 플로스 영지의 발전과 영지민들의 행복을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촌구석의 영지로 남아 있었겠지.
지금처럼 영지민들의 행복도가 계속해서 상승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은 영주님께서 손수 일궈내신 것들입니다. 그러니 좀 더 자부심을. 아니, 자만하셔도 됩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자만은 좀 그렇지 않아…?”
“아니요. 영주님이시라면 그러셔도 됩니다.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지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 영주님께서 무얼 하시든 적극적으로 따른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아니, 영지민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간단한 설문 조사를 좀 해 보았지요.”
엘레인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체 그런 걸 왜 조사하는 건데!?
얼굴의 열이 가라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낯이 뜨거워졌지만, 엘레인은 이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영지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신뢰를 받아냈으니 영주로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이번 생은 참 잘 산 것 같네.”
작게 중얼거린 엘레인은 실없이 웃고 말았다.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이 괜히 기분이 좋았다.
* * *
고즈넉함과 시끌벅적함이 공존하는 플로스 영지.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는 만큼 저녁이 되면 조용하기만 하던 플로스 영지도 이젠 활기가 넘쳤다.
특히나 최근 들어 영지에 대거 유입된 필사가들은 이 시간이 되면 일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러 갔는데 최근엔 새로 생긴 술집을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 파는 안주와 술이 참으로 기가 막혀서 강도 높은 고된 노동에 지친 필사가들의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주었다.
“어서 옵쇼!”
오늘도 역시 술집 내부엔 뻐근한 어깨를 주물럭거리는 필사가들이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다.
술잔을 나누며 맛있는 안줏거리를 씹어 삼키는 사람들.
그들은 최근 발행된 신문을 활짝 펼치며 수다를 떨었다.
“이거 봤어? 플로스 영주님이 적색 마탑 팀에 서서 응원을 했대.”
“왜 갑자기 응원 단장을 맡은 건지는 몰라도 엄청 귀엽다. 곧 태어날 내 아이도 이렇게 귀여울까?”
“에이. 그건 현실적으로 좀 무리 아닌가.”
“…너 왜 내 얼굴 보면서 그런 말 하냐. 지금 싸우자는 거지?”
“하하하! 저기 좀 봐. 쟤네 또 싸우려나 본데?”
두 필사가들이 화기애애한 얼굴로 말싸움을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동료 필사가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신이 나서 웃었다.
서로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해서 그런 걸까?
그들 사이는 꽤나 돈독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왁자지껄하게 스트레스를 풀고 있던 와중. 어디선가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당신들 그 소문 들었어?”
“엥? 무슨 소문?”
“그 왜, 영주님이 우리 필사가들을 굶겨 죽이려 한다는 얘기!”
“…?”
갑작스런 말에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영주님이 우릴 굶겨 죽이려 한다니?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안 그래도 설명하려고 했으니까 흥분하지 말고 들어 봐. 최근 영주님이 적색 마탑에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걸 봤는데, 거기서 인쇄기라는 걸 만들고 있더라고!”
“인쇄기? 그게 뭔데?”
처음 듣는 말에 필사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외쳤다.
“우리 필사가들 밥줄을 끊어놓을 기계! 그것만 있으면 필사가가 며칠 동안 만들 책 한 권을 순식간에 찍어낼 수 있다더라.”
“뭐!?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적색 마탑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거기는 매번 말도 안 될 정도로 유용하고 놀라운 아티팩트가 튀어나오는 곳이잖아.”
남자의 말에 필사가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정말 그런 게 세상에 나온다면 더 이상 출판사는 우리 필사가들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의 말대로 밥줄이 끊겨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잠깐.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적색 마탑에는 쉽게 들어갈 수 없을 텐데….”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우리 생계가 어? 평생직장을 단번에 잃게 생겼는데!”
“그, 그래 맞아. 만약 저 사람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진짜 굶어 죽게 될지도 몰라.”
“어, 어떻게 해야 해?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필사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특히 조금 있으면 아이가 태어나는 필사가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커다란 출판사가 생겼다는 말에 희망을 안고 우르르 몰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입사에 성공해서 축하주를 나눈 지 대체 얼마나 됐다고!
희망으로 가득 찬 플로스 영지가 이렇듯 숨통을 조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회의 땅인 줄 알았던 곳이 알고 보니 쥐도 새도 모르게 필사가들을 잡아먹는 개미지옥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 뒤로 오는 배신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잠깐만. 나한테 생각이 있어.”
그때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그 침착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인쇄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바로 그 남자였다.
남자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끝을 까딱거렸다.
“다들 이리 와서 머리 좀 맞대 봐.”
남자의 말에 필사가들은 홀린 듯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부디 그가 정말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냈길 바라며….
남자는 희망을 가득 안고 다가온 그들에게 속닥속닥.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 * *
“으아~ 오늘도 평화롭구먼.”
창문을 활짝 열고 기지개를 켠 엘레인이 푸르른 하늘을 보고 활짝 웃었다.
정수리를 따뜻하게 데우는 햇살. 맴맴. 매미가 목청껏 우는 소리.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초록빛 물결과 바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등.
정겨운 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세상을 바라보며 쭈우욱. 스트레칭을 마친 엘레인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오늘 아침 신문을 활짝 펼쳤다.
그런데.
<12살 영주 이대로 괜찮은가?>
“???”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헤드라인에 기분 좋게 신문을 펼쳐본 엘레인의 입이 헤 벌어졌다.
음…. 우리 제국에 나 말고도 열두 살짜리 영주가 있던가?
멍하니 생각하던 엘레인은 천천히 아래쪽 내용을 확인해 봤다.
그러자 보이는, 까만 줄로 얼굴을 가린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
-영주님이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한다!
“아니, 이게 뭔 개소리야?”
화들짝 놀란 엘레인이 꽉 잡고 있던 신문을 파드득 손에서 놓았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너무나 충격적인 나머지 크게 뜬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던 와중.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듯 땀으로 범벅이 된 집사의 모습.
이미 충격과 공포를 맛본 엘레인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지, 집사도 이 신문 봤어?”
“예? 신문이요?”
딱 봐도 금시초문인 듯한 모습에 엘레인은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엥? 이것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엘레인이 살짝 구겨진 신문과 집사를 떨리는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또 무슨 일이 터졌기에 이토록 심각한 거지?
물어보기 겁나지만 그렇다고 모른척할 순 없겠지.
마음의 결정을 내린 엘레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보자, 집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영주님. 놀라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대체 뭔데 그래….”
“지금 밖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시위라고?”
엘레인은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하나 있었다.
근데 그게 설마 시위하는 소리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