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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151/417)

151화

세 황자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무렵. 엘레인은 결정타를 먹이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위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이 만들어준 것은 어디까지나 이를 실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다.

먼저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충분히 어필한 후, 앞서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지급.

한마디로 현재 그들을 가장 괴롭히고 있는 환경인 뜨거운 햇볕을 원천 차단하여 더위를 싹 가시게 한다.

그런 다음은 당연하게도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 바로 ‘나는 앞으로 당신들이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이러쿵저러쿵한 대책을 몸소 실현하겠습니다!’ 따위의 공약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거는 것이다!

뚱땅뚱땅—!

그늘에 편하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던 시위대는 갑자기 광장 중앙에 세워지고 있는 간이 단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님이 또 무엇을 하려는 거지?

이제는 기대감이 퐁퐁 샘솟는 것을 느끼며 다들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때 가너스는 똥줄이 탔다.

“이봐! 당신들 대체 뭐 하는 건데? 여기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쉬고 있으면 시위를 하는 의미가 없잖아! 벌써 저 영주가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린 거야? 응?”

“어…. 그치만 영주님께서 우리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고 하셨잖아.”

“맞아. 영주님께서 저런 식으로 나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냥 저쪽에서 해결책을 가지고 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될 것 같은데.”

필사가들이 웅성거렸다.

하긴 이렇게 융숭한 대접까지 받아 놓은 주제에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면 이쪽이 더 나쁜 놈 아닌가.

잠자리가 사나워서라도 절대 그런 짓 못 하겠다.

“아니, 이 답답이들아! 그러니까 이게 다 저 영주의 작전이라는 거잖아! 살살 꼬드겨서 어? 시위대를 와해시키려는 목적! 딱 보면 몰라?”

“헉. 그, 그런 거였어?”

답답해진 가너스가 빽 소리치자, 필사가들의 눈에 경각심이 떠올랐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어린 영주는 정말이지 무서운 인간이다.

하필이면 이곳 광장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다. 앞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터였다.

혹시라도 방금 보여주었던 것들이 전부 보여주기식 쇼였다면.

플로스 영지민들의 민심을 얻어내어 총체적으로 시위대를 코너로 몰기 위한 작전이었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영지 밖으로 퇴출당할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떡해? 다시 시위를 재개하면 우리만 나쁜 놈으로 낙인찍혀버리잖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자체적으로 시위가 해체되어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릴 텐데….”

필사가들이 다시금 웅성대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제 역할로 돌아온 모습에 가너스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고민하고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쫓겨날 바에는 차라리 뭐라도 시도해 보는 편이 낫잖아?”

“저 친구 말이 맞아.”

“그래! 우리는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는다!”

“절대 넘어가지 않아!”

시위대가 다시 일어났다.

기사들은 갑자기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필사가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금 피켓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아아. 목소리 테스트. 잘 들리세요?”

“으엉?”

피켓을 들어 올리기 위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그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명랑한 목소리에 순간 얼이 빠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간이 단상 위에 목소리 증폭기를 코앞에 둔 영주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으. 아, 악마의 미소다. 저 미소에 넘어가선 안 돼!”

“…?”

엘레인은 저 멀리 떠들썩한 시위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지. 혹시 아직도 목이 마른 건가.

어쨌든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기에 엘레인은 여전히 환하게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여러분께서 해주셨던 소중한 말씀. 모두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피드백을 받았는데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여러분께 실례인 것 같아서요.”

이번엔 또 뭐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모두의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크흠. 한 차례 헛기침을 내뱉은 엘레인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먼저 인쇄기 개발은 취소하지 않고 계속 진행할 거예요.”

“뭐, 뭐라고?”

“그럼 우리 보고 그냥 죽으라는 말이잖아?”

영주의 충격적인 대답에 필사가들의 눈 밑이 퀭해졌다.

역시 저 친구의 말이 옳았던 걸까?

영주는 단순히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한 것에 불과한 걸까?

아까 받았던 감동은 어디로 갔는지 피켓을 쥔 손에 힘을 더해졌다.

하지만 제대로 울분을 토해내기도 전에, 엘레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필사를 한다는 건 글을 쓸 수 있다는 거 맞죠?”

“그야 당연하지. 단순히 글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쁜 글씨를 쓸 수 있어야 하고 말이야.”

“맞아.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악필은 절대 못 들어오지. 우리 업계도 나름 치열하다고.”

필사가들은 저희끼리 속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더욱 회의적이었던 그들에게서 반응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엘레인은 비로소 진짜 주제를 꺼내었다.

“우리 영지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거예요. 공공시설과 교육 시설도 조만간 추가될 예정이죠. 저는 그 자리에 여러분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공공시설과 교육 시설에서 일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곳에 필사가들은 말 그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곳에서조차 채용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최대 1년 동안 구직활동 지원금을 영주성에서 지원할 거니까요.”

엘레인의 말은 완전히 파격적이었다.

단순히 일자리를 우선적으로 제공해줄 뿐만이 아니라, 제때 취업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1년 동안 지원까지 해준다니….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까지 영지민들을 챙겨주는 영주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모두가 듣는 광장에서 큰 목소리로 공약을 내걸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역시 저 영주님께선 뼛속까지 영지민들을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말이야. 필사가란 직업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던 것도 아니고, 요즘 어깨도 아프던 참이었는데 잘됐지. 오히려 새 직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난 뭐든 괜찮을 것 같아.”

“근데 이 정도면 우리가 엎드려 절을 해야 할 정도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영주님께서 우리 앞날까지 헤아려줄 이유는 없잖아.”

시위대는 크게 동요했다.

정말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갈팡질팡하며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엘레인이 바로 옆에 있는 메르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돌아가기 전에 여기 명단 좀 작성해주세요! 그래야 방금 제가 말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오오. 저 기사님한테 가면 되는 건가?”

“늦지 않게 얼른 서두르자고!”

사람들은 혹여나 자신의 이름을 적을 자리가 없을까 봐 단상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시위대의 자체적 붕괴를 의미했다.

애써 엘레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악당으로 만들고자 했던 가너스는 손바닥 뒤집듯 확 달라진 그들의 반응에 뒷목을 잡았다.

“이봐 당신들! 방금 내가 한 말 벌써 다 잊었어? 저건 저 영주가 우릴 속이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그리고 우릴 속이려 하는 것 치고는 너무 당당하지 않아?”

“맞아. 여기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방금 공약을 다 들었잖아. 저 사람들이 증인인데 뭘.”

이제 사람들은 오히려 가너스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갔다.

혼자 남은 가너스는 줏대도 없이 영주의 말에 홀랑 속아 넘어가 버린 필사가들을 바라보며 답답함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어휴, 이 모지리들!”

가너스는 분노했다.

이대로 시위가 끝나버리면 지금껏 개고생을 하며 작전을 실행한 보람이 없어진다.

이번 일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쓸모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망할.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오늘 안에 끝장을 본다.”

가너스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어린 영주를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사를 치르는 것은 오늘 밤.

영주의 돌발 행동으로 이번 교란 작전은 실패했으나, 어수선한 분위기는 오늘 하루 동안 유지될 터.

“어떻게든 성물을 빼돌려주마.”

오르칼의 예상이 제대로 적중한 순간이었다.

***

휘영청 달이 뜬 그날 밤.

풍요신전 주위로 수상한 차림의 남자들이 우후죽순 신영을 드러내었다.

숫자는 대략 스물. 다들 아스터 왕국에서 한 끗발 날리는 자들로 구성된 최정예 부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통솔하는 남자.

가너스.

그는 매우 침통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예상보다 시위가 빨리 끝나서 오늘 중으로 성물을 훔쳐내야 해.”

“일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죠? 한번 시위가 터지면 최소 한 달쯤은 플로스 영지를 혼란에 빠트릴 거라면서요.”

“보통은 그게 정상이지. 하지만 영주가 말도 안 되는 공약을 펼쳐내더군.”

가너스는 상상만 해도 열이 오른다는 듯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세상에 그런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는 공약을 내거는 영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가 보기엔 플로스 영주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어쨌든 서둘러야 한다. 다들 자기가 할 일은 전부 숙지하고 있겠지?”

“예!”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한다!”

신전에 도착하면 경비와 잠입 그리고 방화까지 세 팀으로 나뉘어 갈라진다.

그전까지는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그들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숨을 죽이고 풍요신전이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막 풍요신전의 앞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하아.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네.”

휘영청 뜬 달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신전 벽에 기대 서 있던 남자가 기지개를 켜듯 그리 말하자, 가너스와 그의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몸을 굳혔다.

“저건 또 뭐야.”

“공사장 일꾼…? 이런 늦은 시간까지 공사를 하고 있던 건가.”

온몸의 긴장이 사르륵 풀렸다.

저치가 왜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일꾼이다.

단숨에 죽여버릴 요량으로 칼자루를 쥔 그들이 막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일꾼의 뒤로 웬 떡대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허 참. 어이가 없군. 이 시간에 무슨 모임이라도 갖는 건가?”

저놈들 모두 앞서 보았던 일꾼과 똑같은 복장에 곡괭이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이 시간까지 노동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여기는 최소한의 노동자 보호법도 없는 건가….

그런 의견에 뒷받침하듯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어우씨. 간만에 야근이라 그런가 힘들어 죽겠네.”

“그것도 그렇지만 솔직히 16시간 노동은 선 넘었지. 여기 좀 봐 봐. 안 쓰는 근육을 써서 그런지 제대로 뭉쳤어.”

“차라리 내가 오전 호위를 맡는 거였는데…. 어쨌든 우리 이제 푹 쉴 수 있는 거지?”

우르르 등장한 일꾼들은 저희끼리 대화를 나누다 말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마치 이러한 노동을 시킨 사람이 그들이라는 것처럼.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곡괭이를 든 그들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자, 가너스와 그의 일행 또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쯧.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여!”

가장 먼저 근접계 공격조가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역시 아스터 왕국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명성이 아주 허황된 건 아닌지 그 기세가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황녀님을 귀찮게 한 겁니까?”

차가운 서릿발 같은 남자. 카론이 선두에 선 남자의 팔을 가볍게 잘라내더니 검에 묻은 피를 휙 털어냈다.

“으아아악!”

단 한 합으로 한쪽 팔을 잃은 남자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물론 눈먼 공격에 맞아줄 정도로 카론은 나약하지 않았기에 가볍게 놈을 마무리 지었다.

“으아. 호위 기사님 빡쳤나 봐.”

“당연한 거 아니야? 무려 황녀님을 건든 놈들인데.”

“하긴 우리도 엄청 화가 나서 달려오긴 했지.”

곡괭이를 든 일꾼들. 아니, 황실 제2 기사단원들이 저희끼리 속닥거렸다.

하긴 황녀님을 지키는 조와 녀석들을 직접적으로 쓸어버리는 조, 둘 중 이번만큼은 예외로 이쪽이 인기가 많긴 했지.

아마 저 호위 기사도 같은 이유로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일 터다.

“뭐 하는 거지? 계속 가만히 있을 건가?”

한편 순식간에 동료를 잃은 가너스 측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스터 왕국 용병계에서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남자가 단 두 합 만에 죽어버리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들은 잠시 이곳을 찾은 목적도 잊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런 미친.”

“어디서 저런 괴물이!”

가너스는 직감했다.

놈들은 그냥 일꾼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잡으러 온 사냥꾼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후퇴를 해야 할 때다.

그렇게 결단을 내린 그가 막 후퇴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쿠과과광—!

“미친. 이건 또 뭐야!”

“이건 흙벽…?”

풍요신전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원천 차단되었다.

순식간에 탈출로가 막힌 상황에 다들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달빛을 등지고 선 누군가가 흙벽 위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어쭈. 도망가시려고?”

“이놈들이 우리 엘레인을 괴롭힌 장본인들이라는 거지?”

라네즈와 아르닐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다가왔다.

달빛 아래에 훤히 비치는 얼굴을 확인한 가너스는 내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런 미친! 여기에 2황자와 3황자가 왜 있는 거냐고!’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쌍둥이 황자들과 곡괭이를 든 광인들.

점점 좁혀져 오는 거리에 그는 깨닫고야 말았다.

“딜런, 이 개 같은….”

망할 왕자의 의뢰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막을 내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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