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꿀맛 같은 휴식 후 황궁으로 복귀한 엘레인은 리안이 했던 말에 대해 고민했다.
이미 수확한 딸기들을 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되는 방법은 잘 얼리거나 말리는 방법 정도였다.
하지만 얼리는 건 마법사가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에 유지 비용이 엄청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잘 말리는 건데… 수분이 날아가도 괜찮으려나?
아무래도 뜨거운 햇볕에 말리면 색깔도 변하고 변형도 심할 텐데. 거기다가 가장 중요한 맛이 떨어지면 본말전도다.
물론 겨울에도 딸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메리트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맛이 떨어져 버리면 겨울에 딸기를 먹고 싶은 사람을 제외하고 굳이 딸기 디저트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슷한 가격에 더 맛있는 것을 사 먹는 편이 훨씬 이득이니까 말이다.
‘흠. 이거 참 쉽지 않네….’
엘레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려운 과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한숨 소리.
“…?”
순간 엘레인과 앨리스의 두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뭐야. 앨리스도 무슨 고민이 있는 건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던 중. 엘레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혹시 무슨 고민 있어? 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러는 황녀님이야말로 수심이 깊어 보이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
“나야 영주 일 때문에 그렇지 뭐. 그래서 언니는?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한숨을 쉬는 거야?”
엘레인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앨리스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이걸 황녀님께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니 되는 건지 한참을 고민했다.
뭐지. 엄청 심각한 문제인 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에 엘레인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무렵.
결국, 보다 못한 베일리가 가슴을 쾅쾅 내려치며 끼어들었다.
“어휴. 별거 아니고. 이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헉! 베일리!”
당황한 앨리스가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베일리 손에서 팔랑거리던 종이는 이미 엘레인의 손 위로 떨어진 뒤다.
“이건…. 러브레터!?”
엘레인의 외침에 앨리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손가락 틈 사이로 모든 일의 원흉을 가자미 눈으로 쏘아봤지만, 정작 베일리는 신이 나서 외쳤다.
“그거 청혼서예요! 옆 동네 자작가에서 앨리스한테 청혼했대요.”
“뭐어? 청혼!?”
“베일리 너 진짜….”
계속해서 폭로되는 내용에 앨리스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미 들켜버린 이상 숨길 이유는 없지만, 종달새마냥 조잘대는 그녀가 원망스러운 것은 매한가지.
자그마한 복수심으로 사랑스런 친우의 신발코를 꾹 하고 밟아주자 발을 잡고 콩콩 뛴다.
“아야! 넌 그렇다고 막 발을 밟냐!”
“한 시간 내내 잔소리 듣기 싫음 조용히 해라.”
“넵. 선생님.”
순식간에 베일리를 굴복시킨 앨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놀란 눈을 끔뻑이고 있는 황녀님께 이실직고하기를.
“베일리 말이 사실이에요….”
“그, 그렇구나.”
베일리의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엘레인은 내심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현재 엘리스는 결혼할 시기가 한참 지났다.
엘레인이 네 살 때 막 성인식을 마친 열일곱 살이었으니까. 8년이 지난 지금은 스물다섯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스물다섯 나이면 이미 결혼 적령기는 훨씬 지난 시기.
그 나이에 청혼서를 받는다는 건 그리 난리를 떨 정도로 놀라운 일은 아니기에 엘레인은 청혼서를 팔랑거리며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걸 보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그게… 로이 발렌치라고 귀족들 사이에선 나름 젠틀하기로 유명한 남자예요.”
“로이 발렌치? 처음 듣는데….”
아무래도 지방 어딘가의 귀족인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인성이니까.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
“저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뭐야. 서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청혼서를 보낸 거야?”
“그러게나 말이에요. 심지어 최근 들어 꾸준히 편지를 보내고 있어서 정말이지 곤란해요.”
앨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직 생각 없다고 전부 다 쳐내버리는 건데, 지금에 와서는 부모님이 자꾸 눈치를 준다.
아무리 황녀님 곁에서 일한다 해도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는 건 집안 명성에 흠집이 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엘레인은 함께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 사이에서 명성은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말이다.
물론 엘레인은 ‘고작 명성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결사반대!’라는 입장에 속해 있었다.
“곤란하네. 부모님 의지라서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고.”
“괜찮아요. 그래도 일단 한번 만나볼 생각이거든요.”
“응? 그래도 괜찮은 거야?”
“소문은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직접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머멋! 정말?”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베일리가 옆에서 더 호들갑이었다.
그에 다시 한번 게슴츠레하게 두 눈을 좁힌 앨리스가 일침을 가했다.
“그래서 너는 남자 안 만나? 너도 나랑 나이 같잖아.”
“그렇긴 하지만 상관없어. 나는 평생 황녀님 옆에서 살 거거든!”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요?
엘레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자, 베일리가 세상 해맑게 웃어온다.
그리고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앨리스는.
“부럽다….”
아니, 이걸 부러워한다고?
순간 어이가 없어진 엘레인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리고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네.”
“우리가 할 일이요?”
“그래. 앨리스 언니를 꾸며줘야지!”
엘레인이 사뭇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앨리스를 꾸민다니!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에 베일리 또한 두 눈을 번뜩였다.
당연하지만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은 앨리스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에. 안 그러셔도 돼요. 이미 어머니께서 준비해 놓은 물건들이 워낙 많아서….”
황녀님은 몰라도 베일리 저 녀석만큼은 절대 안 된다.
생각만 해도 피곤해질 것 같은 미래에 황급히 만류하자 엘레인과 베일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쉽다. 즐거울 것 같았는데.”
“쇼핑이라면 다음에 같이 가요. 지금은 말고!”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강조하자 엘레인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문득 궁금한 게 생긴 탓이다.
“그래서 언제 만날 생각이야?”
“아마 이번 주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요?”
“응? 아니, 그냥 궁금해서.”
엘레인은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헤헤 웃었다.
누가 봐도 꿍꿍이가 있는 모습이었으나 앨리스는 알지 못했다.
귀찮게 엉겨 붙는 베일리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엘레인이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참으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 * *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방안에 들어온 앨리스는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으. 피곤해.”
오늘 하루.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일에 더욱 집중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배는 피곤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잠을 청하진 않았다.
그저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는 잠시 숨을 골라 쉬었다.
‘결혼이라.’
사실 앨리스는 별로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황녀님과 베일리 앞에서는 애써 쿨한 척 남자를 만나 보겠다는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계속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좋은데 굳이 결혼을 해야 할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입장에선 전혀 아니었다.
스물다섯이나 되어 놓고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남 말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아주 맛있는 소재거리였다.
지금만 하더라도 ‘저 사람 혹시 하자 있는 거 아니야?’ 또는 ‘성격이 더럽거나 여자로서 매력이 없거나.’ 따위의 뒷말을 하고 다닌다지 않는가?
며칠 전 그 말을 어머니 입에서 직접 전해 들었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나 혼자 들어먹으면 상관없을 욕이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앨리스는 한숨을 삼키며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저 황녀님 곁에서 이대로 있고 싶은데, 세상은 날 가만히 두질 않는구나.
자꾸만 한숨이 나오는 오늘은 그저 달빛을 올려다보며 궁상을 떨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 로이 발렌치라는 남자를 만나려면 일찍 잠을 자야 했다.
괜히 지각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 따위의 소문을 늘릴 수야 없으니까.
“…응?”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스르르 잠에 빠져들려던 앨리스는 문득 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방금 누가 내 다리 만지지 않았어?
‘!?’
순간 앨리스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석상처럼 굳어 있는데, 방금 느꼈던 것은 환상이 아니라는 듯 또다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도둑? 아니, 변태!?’
도대체 제 다리를 만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다.
손가락이라기엔 너무 뭉툭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은 이것이 정녕 사람인지 의구심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대체 뭐지? 발소리나 숨소리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앨리스는 공포에 떨었다.
마치 산 사람이 아닌 듯한 존재가 계속해서 제 다리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상황은 호러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하아….”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뭉친 근육을 정확하게 풀어내는 손길은 너무나도 전문적이어서.
“기분 좋드아… 헙!”
공포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만족감 넘치는 감상을 내뱉고 만 앨리스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우뚝 멈추는 손길.
‘들켰겠지. 분명히 들렸겠지!’
한숨 소리는 자다가 내뱉었다 쳐도, 대놓고 입을 막아버린 이상 이쪽이 잠에서 깨어 있다는 것을 저쪽이 모를 리가 없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지는 상황.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앨리스는 무서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대체 침입자가 누구인지. 놀라우리만치 기분 좋은 손길로 제 근육을 풀어주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보는 거야.’
앨리스는 용기를 내었다.
최소한 근육을 풀어주고 있는 존재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겠지!
꾹 감았던 눈이 드디어 뜨였다.
그리고 앨리스는 보았다.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밝은 달빛과 그 아래에 하얗게 반짝이고 있는 커튼.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감각이 느껴지는 다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귀, 귀신!?”
-무우?
앨리스의 기겁하는 목소리에 운디네는 그제야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처음엔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앨리스가 갑자기 깨어나서 얼마나 놀랐던가.
하지만 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제 정체가 들킨 것 같지는 않았다.
운디네는 쩡하니 얼어붙어 있는 앨리스를 보며 제 주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았지? 앨리스가 다음날 데이트에 최고의 컨디션을 가질 수 있도록 밤에 회복 능력을 담아서 마사지를 해주는 거야. 운디네 네 역할이 아주 커!
-무우무우!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간만에 활약할 생각으로 신이 난 운디네는 내게 맡겨놓으라며 자신만만하게 외쳤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운디네는 제 정체를 귀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뭉퉁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흐아아…. 헉!”
멈추기는커녕 계속해서 마사지해오는 손길에 앨리스는 이제 공포에 떨어야 할지 이 기이한 현상을 즐겨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운디네의 놀라운 마사지 실력에 길들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귀, 귀신님. 어째서 제게 이런 호화로운 마사지를….”
-무우무우!
(울 주인이 시켰어!)
“으으… 아! 거기! 너무 시원해요.”
-무우….
(이 인간…. 갑자기 팔자 좋게 마사지를 받기 시작했어.)
운디네는 갑자기 마사지하기가 싫어졌다.
하지만 주인의 부탁도 있고 내게 맡기라며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것도 있기에 중간에 일을 때려치울 수도 없다.
결국, 운디네는 콩눈을 좁히며 앨리스의 몸 구석구석을 회복의 힘을 담아 정성스럽게 마사지했다.
그리고 마사지 범위가 늘어날수록 더욱 녹진하게 녹아드는 앨리스.
그렇게 두 존재의 기이한 관계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