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로이 발렌치가 현실 부정을 하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앨리스가 그를 차갑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이유로 제게 접근한 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어처구니가 없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날 갖고 놀았던 거야?”
“처음부터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한 당신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요.”
“허 참. 그래.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나도 너같이 깐깐한 아줌마랑 좋아서 결혼하려고 한 건 아니거든!”
로이 발렌치의 말에 앨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백작가의 유일한 핏줄이라는 게 하필이면 여자라니…. 브렌트 백작도 참 불쌍해. 그래서 내가 대신 백작가를 잘 굴려주겠다는 거잖아. 그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걷어차?”
“…과연 그게 진짜 목적이었군요.”
“그 눈빛은 뭐야? 솔직히 내 말 중에 뭐 틀린 거라도 있어?”
앨리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앙다물었다.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직접 그의 입으로 들으니 더욱 기분이 나쁘고 열이 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자신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라 생각한 로이 발렌치는 은근하게 그녀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어차피 결혼해준다는 남자도 없잖아. 그러니까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지 그래?”
은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앨리스를 지탱하고 있는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막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야, 이 나쁜 자식아!”
“이번엔 또 뭔….”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소리에 인상을 팍 쓴 로이 발렌치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저 멀리서부터 황소처럼 돌진하고 있는 한 여인!
“어, 어어?”
누가 봐도 수상한 차림새에 움찔하기도 잠시.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온 여인, 베일리가 시원스럽게 다리를 쭉 빼 들었다.
그리고.
“이런 파렴치한! 당장 우리 앨리스한테서….”
“뭐, 뭐야. 뭔지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
“손 떼!”
“두엇! 꺽!”
방어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발차기.
속절없이 소중한 낭심을 가격당한 로이 발렌치는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
적절한 때에 나타난 베일리의 활약으로 앨리스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남자가 했던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그날 이후 앨리스는 눈에 띄게 기운이 없어졌다.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거나 먼지떨이를 허공에 흔드는 건 예삿일.
하루는 멍을 때리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놀란, 자칫하면 아주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사건이었다.
이쯤 되면 앨리스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쉬이 유추할 수 있다.
엘레인은 세상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돼.”
“맞아요. 뭔가 대책이 필요해요!”
엘레인의 말에 베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동의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엘레인은 앨리스의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여주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달콤한 것들이 가득한 곳에서 맛있는 걸 많이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맞아요. 달콤한 걸 먹으면 정말이지 기분이 좋아지죠!”
엘레인이 말하고 베일리가 받아친다.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 일명 달콤한 것을 먹어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기가 되시겠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계획에 따라 얼떨결에 플로스 영지까지 오게 된 앨리스.
그녀는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지극정성인 두 사람을 보며 해쓱하게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베일리 너도 고마워.”
“감사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여기 마카롱 엄청 맛있는데 한번 먹어 볼래?”
“저기 와플도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요?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사 올게!”
앨리스의 미소에 조금 안심한 두 사람은 앨리스를 공원 벤치에 앉히고 각각 아이스크림과 와플을 사기 위한 원정을 떠났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말릴 새도 없이 황녀님과 베일리를 떠나보낸 앨리스는 멍하니 아름다운 조경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나도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그 남자가 했던 말도 얼른 잊어버려야 할 텐데.”
소중한 사람들에게 계속 걱정을 끼치는 건 좋지 않다.
난생처음 보는 남자에게 폭언을 들었던 것은 기억에 길이 남을 일이었지만, 언제까지 우울해 있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내 주제에 너무 큰 행복을 바랐나 싶기도 하고….
이런 일 정도는 그저 지나가는 나쁜 추억 정도로 묻어두는 편이 여러모로 이롭다.
“두 사람이 돌아오면 환하게 웃어야지.”
앨리스는 흐트러진 마음을 굳건히 하며 양쪽 입꼬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굳어 있던 입매를 끌어올리며 표정 연습을 하고 있는 그때. 앨리스는 문득 공원에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헤. 나 잡아 봐라!”
“꺄르르! 잡히면 죽는다? 진짜로!”
아이들이었다. 황녀님께서 만든 공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
어떻게 여태 몰랐나 싶을 정도로 그들은 개구지게 웃으며 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야가 좁아졌구나.”
앨리스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본 세상은 참으로 밝았다.
흑백이었던 벤치가 따뜻한 갈색으로. 시커먼 나무가 푸르른 녹음의 빛으로. 아이들의 미소는 형형색색 수채화가 번진 듯 아주 환한 무지갯빛으로….
그동안 우울해서 차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 안에 들어오며 앨리스의 차갑게 굳은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억지로 끌어올리려 했던 미소 또한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어느새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는 앨리스는 가슴 따뜻한 백색 소음에 온몸을 맡기며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런데 그때.
“엄마야!”
“!”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앨리스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가 제 발에 걸려 바닥에 넘어지려는 모습을.
그리고 그 순간, 한 청년이 번개처럼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아 올리는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뛰면 위험하잖니.”
“으아아앙! 감사합니다!”
코가 깨질 뻔했던 아이는 엉엉 울면서도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함께 뛰놀던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 놀란 나머지 놀 마음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이를 잡아준 청년. 리안은 울면서 멀어지는 아이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큰일 났다…. 오늘 사용할 재료들인데 어떡하지.”
아이를 잡아주는 과정에서 리안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종이봉투 중 하나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 난장판.
리안은 바닥에 쏟아진 복숭아와 자두. 그리고 왕 블루베리들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옆구리 터진 것들은 사용 못 하겠지.
부디 상처 입은 과일이 별로 없었으면 좋겠는데….
바닥에 쭈그려 앉아 궁상맞게 떨어진 과일을 살피던 리안은 막상 이걸 다 주워도 어떻게 들고 갈지 막막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드리우는 하나의 그림자.
“저… 도와드릴까요?”
“아, 그래 주시면 감사… 으헉!”
“으음?”
앨리스는 입을 떡 벌린 채 차마 다물지 못하는 리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흘러내려 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자, 난생처음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인과 마주하게 된 리안은 지금 당장 코피를 흘리며 뒤로 쓰러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가,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저기에 있는 복숭아를 좀….”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앨리스는 흔쾌히 웃으며 저 멀리 굴러떨어진 복숭아를 주워들었다.
그 모습에서 리안은 어쩜 저리 마음씨도 고울까 생각하며 또다시 감탄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난생처음 보는 곱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넋을 빼놓고 있던 리안은 뒤늦게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리 그녀가 아름다워도 계속 바라보고 있는 건 실례다.
하물며 그녀가 일을 다 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으으. 이건 다 상해버렸네. 어쩔 수 없이 새들 먹이로 두고….”
리안은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과일들을 품 안에 주워 담았다.
이건 옆구리가 크게 터졌으니 패스. 요 블루베리는 용케도 잘 살아남았네. 그리고 이것도….
빠르게 과일을 주워 담던 리안은 마지막 남은 왕 블루베리를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손보다 먼저 마중을 나온 손이 하나 있었으니.
“!”
“!?”
어쩌다 보니 서로 손을 겹치게 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불어오는, 여름의 향취를 듬뿍 담은 시원한 바람.
“…….”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반짝이는 두 사람의 눈동자.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갈래요?”
***
“에휴. 이걸 먹고 기분이 풀렸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디저트를 사서 오는 길.
중간에 서로 만난 엘레인과 베일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나쁜 놈이 앨리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험악한 분위기와 화가 난 듯한 앨리스의 얼굴. 그리고 잔뜩 거들먹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봐선 그놈이 엄청난 말로 앨리스에게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그놈. 남자 구실을 아예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베일리가 주먹을 꽉 쥐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앨리스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기특하지만, 너무 의지가 넘치는 모습에 엘레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휴. 언니는 혹여나 그 사람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마.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어?”
“하지만 그놈이 잘못했는걸요.”
“그건 맞지. 그래도 거기… 를 깨트린 사람이 언니라는 걸 알면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그냥 모르는 척해. 알겠지?”
“알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아주 묵사발을 만들려고 했던 걸까?
눈에 띄게 시무룩한 베일리의 등을 토닥거린 엘레인은 앨리스가 있을 공원에 발을 들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응? 저게 뭐야.”
“앨리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엘레인과 베일리는 핑크빛 기류가 물씬 풍기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헤 벌렸다.
근심과 걱정을 모두 털어낸 듯 환하게 웃고 있는 앨리스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헤벌쭉한 얼굴로 헤헤 웃고 있는 리안.
그러니까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
“아, 영주님!”
그때 엘레인을 발견한 리안이 해맑게 웃으며 반겼다.
모야모야~스러운 상황에 허허 웃고 있던 엘레인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안 아저씨.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식자재를 옮기고 있던 와중에 종이봉투를 떨어트려서요. 여기 아리따운 분께서 도와주셔서 살았지 뭔가요.”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래서 언니 손에 과일이?”
의문형 말에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안의 눈이 두 사람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두 분 원래 알고 있던 사이었나요?”
“응? 몰랐어요? 앨리스 언니. 황궁에서 제 직속 시녀로 일하고 있어요.”
“허업!”
차마 손으로 입을 막지 못한 리안이 입술을 잔뜩 오므렸다.
시녀라면 보통 귀족 신분인데, 그럼 눈앞의 아리따우신 여인이 귀족이었다고!?
“죄,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께 일을 막 시켜서….”
“무얼요. 제가 돕고 싶어서 한 일인걸요. 그보다 이 과일로 무얼 만드시나요? 아까 오늘 사용할 재료라고 말씀하신 걸 들은 것 같은데.”
“다름이 아니라 제가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서요. 아! 마침 감사의 보답으로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두 분도 함께 오시겠어요?”
“우와. 안 그래도 밥이 땡겼는데 마침 잘됐네요!”
리안의 제안에 베일리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어차피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앨리스와 리안 사이를 번갈아 보던 엘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