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지체 없이 리안의 뒤를 따라간 일행은 예상외로 휑한 가게를 만나볼 수 있었다.
“사람이 없네? 디저트 대축제 이후로 엄청 잘되던 거 아니었어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브레이크 타임을 도입했거든요. 자, 다들 거기 서 있지 마시고 여기 앉아 계세요.”
리안은 친절히 웃어 보이고는 앞치마를 둘러맸다. 바로 요리를 할 심산인지 손을 씻고 재료를 꺼내는 등. 그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 메뉴판에 특이한 디저트가 많아요.”
“리안 아저씨는 언제나 새로운 맛을 연구하시거든. 참고로 거기 있는 거 다 맛있다?”
“허억.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하네요. 그치 앨리스?”
“…….”
“…엥? 앨리스?”
“아, 응? 뭐라고 했었니?”
베일리의 말에 뒤늦게 반응한 앨리스는 어딘가 멍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깔끔하게 준비를 끝낸 리안이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열심히 팬에 기름을 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오우야. 핏줄 보소.”
앨리스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베일리가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힘주어 내용물을 섞느라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은 확실히 남자다운 면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앨리스는 베일리의 지적 아닌 지적에 화들짝 놀랐다.
“얘, 얘는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내가 언제 거길 봤다고.”
“아니야? 아니면 말지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자꾸 장난치지 마라. 설마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 듣고 싶은 거야?”
“아이고. 여기 인테리어가 참 좋네.”
앨리스는 단번에 꼬리를 내리고 모르는 척하는 베일리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그러는 반면 베일리는 히죽히죽 웃으며 오랜 친구의 새삼스러운 면모에 아주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그때 열리는 문.
“사장님. 물건이요.”
“아, 맞다. 오늘 물건 들어오는 날이었지.”
리안은 팬 안에 재료를 넣다 말고 황급히 조리대의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베일리가 막아섰다.
“물건은 제가 받아올게요.”
“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무거운 설탕 포대도 같이 있을 텐데….”
“에이, 괜찮아요. 제가 한 힘 좀 하거든요. 그러니까 사장님은 거기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 집중해주세요. 알겠죠?”
“아,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베일리는 연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리안에게 헤헤 웃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앨리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뭐 하고 있어?”
“응? 나도 도와주려고 하는데.”
“아니, 아니지. 너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지.”
“?”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앨리스의 모습에 베일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참으로 답답한 친구로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게도! 모태솔로 천국에서 그나마 눈이 뜨여 있는 베일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인자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난 저기. 넌 저쪽. 오케이? 물건은 내가 받아 갈 테니까 너는 가서 요리 좀 도와줘. 사장님 혼자 다 하기엔 사람이 좀 많냐.”
“아, 알겠어.”
베일리는 허둥지둥 조리실 쪽으로 들어가는 앨리스의 등 뒤로 손을 흔들어주고는 엘레인을 휙 돌아봤다.
“황녀님. 우린 저쪽으로 가요.”
“두 사람 방해하지 말라는 거지? 그래, 좋아.”
과연 황녀님. 벌써 눈치채고 계셨던 것인가!
엘레인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베일리를 데리고 재빠르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만이 남은 공간에는….
화르륵—!
뜨거운 불길 위로 리안이 가볍게 손목을 돌릴 때마다 공중으로 떠오른 재료들이 깔끔하게 섞여 들어갔다.
묘기에 가까운 모습에 잠시 넋을 빼고 있던 앨리스는 문득 리안의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땀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았다.
‘어, 어떡하지? 손수건으로 닦아줘야 하나.’
앨리스는 안절부절못했다. 도와주러 왔으니 땀이라도 닦아줘야 하는데 선뜻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고민도 하게 되고, 어떻게든 그의 도움이 되고자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 있을 무렵.
“헉!”
갑자기 눈앞의 컵이 둥둥 떠올랐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깜짝 놀란 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 컵을 잡아버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스레 뒤를 돌아본 리안은 유리컵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시 팬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제야 앨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앨리스는 본능적으로 이 유리컵을 떠오르게 만든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전날 밤 자신의 피로를 풀어주었던 바로 그 귀신님! 그분이 아니고서야 이런 기현상이 갑자기 벌어지는 것은 말도 안 됐다.
“귀신님. 갑자기 이건 왜 들어 올린 거예요?”
-무우!
앨리스가 속삭이자 운디네가 자신만만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쪼르륵.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채워졌다.
‘세상에. 엄청 차가워!’
갑자기 나타난 물에 앨리스는 그제야 귀신님의 의도를 알아챘다.
알고 보면 귀신님은 나의 수호령이 아닐까?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앨리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리안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이거 좀 드시고 하세요.”
“아! 가, 가, 감사합니다.”
앨리스의 친절에 양 볼을 붉힌 리안은 속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의문을 느꼈다.
냇물이나 우물을 떠올린 것도 아니고. 마법으로 냉기를 쏘아낸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물이 차가울 수가 있나?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에 가까운 오답을 찾아냈다.
‘콩깍지가 씌어도 제대로 씌었구나. 물이 이렇게 차갑게 느껴질 줄이야!’
보통은 이렇게까지 콩깍지가 크게 씌면 조금 걱정될 법도 하건만 리안는 오히려 명쾌해졌다.
그리고는 자신을 챙겨준 앨리스를 향해 활짝 웃었다.
“덕분에 더위가 싹 가셨어요.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그. 괜찮으시다면 소금을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맡겨만 주세요.”
앨리스는 자신감 넘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색이 되었다.
‘소금은 어디에 있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조리실에 처음 들어온 앨리스가 소금의 위치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남의 집 주방 찬장을 막 뒤져볼 수도 없고….
우선 매의 눈으로 조리대 위쪽을 탐색하던 앨리스는 공중에 둥둥 떠서 제 손 위로 떨어진 양념통 하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고마워요, 수호령!’
혹시나 설탕일까 맛까지 확인해 본 앨리스는 비장하게 그것을 리안에게 건넸다.
“앗. 감사해요!”
“무얼요.”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앨리스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 *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식사 시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볶음밥을 보며 군침을 흘린 베일리가 헤벌쭉 입을 벌렸다.
“아니, 사장님! 디저트 가게 주인이면서 일반 요리까지 잘하다니, 이거 완전 사기 아니에요?”
“아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베일리의 칭찬에 리안은 방긋 웃으면서 컵에 물을 따랐다.
진짜 이상하다. 아까 그 물은 엄청 차가웠는데.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는 듯 눈을 깜빡인 그는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세 개의 시선을 보며 아차 했다.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맛있을 거예요.”
“그럼 어디… 우오! 이거 엄청 맛있어요.”
“그러게. 나는 리안 아저씨가 밥도 잘하는지는 처음 알았어.”
“다음에 오시면 또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드릴게요.”
“응?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죠. 영주님은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그리고….”
잠시 말꼬리를 흐린 리안이 힐끔힐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조용하지만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리안의 볶음밥을 먹고 있던 앨리스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아차 하며 말하기를.
“정말 맛있어요. 저보다 요리를 잘하시는 것 같아요.”
“그, 그 정도인가요? 아하핫!”
무슨 말을 하려고 우물쭈물거리던 리안은 앨리스의 칭찬에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식사하고 계세요. 제가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해드릴게요.”
“헉. 아이스크림이라면 황녀님께서 말씀하신 그 차가운 디저트를 말하는 거죠? 예전부터 꼭 먹어 보고 싶었는데.”
베일리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자 리안이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조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앨리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나 맛있어?”
그때 베일리가 그녀의 허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음흉하게 웃었다.
앨리스는 여전히 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어.”
“저 남자 괜찮은 것 같아?”
“응. 괜찮….”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리던 앨리스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한다는 말이.
“뭐, 뭐라는 거야.”
“왜 그렇게 창피해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고백해 봐! 저쪽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얘가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앨리스가 기겁을 하며 베일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사이 좋은 모습에 맛나게 볶음밥을 퍼먹던 엘레인은 허허롭게 웃었다.
‘앨리스 언니. 청춘이구나.’
-무우!
‘아, 운디네. 보아하니 이번에도 잘 해결한 모양이네?’
-무우무우!
운디네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인은 그런 운디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핑크빛 기류가 진하게 흐르는 공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시, 실례합니다….”
“응? 메리엇 씨?”
“아. 여, 영주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디? 영주님 여기 있어?”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모자가 엘레인을 발견하곤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특히나 제이미는 간만에 본 엘레인을 보아 기쁜 건지 허리춤에 찰싹 달라붙었다.
“영주님,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그동안 잘 지냈어?”
“넵!”
헤헤 웃는 미소가 귀엽다. 제이미에게서 시선을 뗀 엘레인은 여전히 소심한 메리엇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리안 아저씨 보러 왔어요?”
“아, 네. 이왕이면 사람이 없는 시간에 찾아와야 리안 씨가 덜 힘드니까요. 매일 아침과 브레이크 타임에 들르고 있어요.”
하긴. 아이스크림과 파르페 개발 이후 리안네 디저트 가게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긴 했지.
엘레인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마침 얼음을 가지고 나오던 리안이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아, 오셨어요?”
“슬슬 보충해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그럼 오늘도 부탁할게요.”
그리 말한 리안은 메리엇과 함께 창고 안으로 사라졌다.
겨우 두 사람이 빠졌을 뿐인데 꽉 차 있던 공간이 널널해지는 마법을 느끼며 제이미는 빈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언니. 왜 그래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파르르 손끝을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것 치고는 쥐고 있던 수저까지 놓치고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앨리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환하게 웃으며 함께 조리실 안쪽으로 사라진 두 남녀와 바로 옆에서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는 소년에 관한 생각으로 아주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점심으로 매일 같이 지극정성으로 가게를 찾아오는 여인과 그런 그녀를 환하게 맞이하는 리안.
그리고 제집인 것처럼 편하게 자리에 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는 소년까지.
이건 누가 봐도,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보아도,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지 않은가!
‘설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유부남이었을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만 앨리스는 크게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