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따뜻한 햇살이 온화하게 내리쬐는 드넓은 창고 안.
그곳에는 형형색색 고운 채소와 과일들이 신성한 빛을 가득 머금은 채, 제 몸을 말리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가히 장관이라 감탄할 정도로 독특한 광경 속. 정작 그 장관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끄으으. 이제 한계야.”
“나, 나도. 더 이상 나올 신성력도 없어.”
털썩. 털썩. 온몸에 힘이 빠진 태양신교 사제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엎어졌다.
물론 지금껏 자신이 만들어낸 작물을 뭉갤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초인적인 힘으로 방향을 틀어내어 돗자리 사이의 길에 몸을 뉘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자로 쓰러진 사람. 바닥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엄마를 찾는 사람. 어쩌다 보니 샌드위치처럼 몸을 포갠 이들 등.
각양각색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널브러진 그들은 하나같이 울상을 지었다.
“채소 빨래하다가 내가 빨래 되겠네.”
“그러니까 말이야. 완전히 피가 마르는 기분이야.”
딸기를 말릴 때만 해도 좋았다.
향기도 좋았고 따로 썰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일이 썰어야 하는 작물들이 등장하면서 칼로 썰기 작업이 추가되었고(이 과정에서 몇몇 사제들이 손을 베었다) 햇고추가 말라가면서 나는 매운 향이 코를 찌르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꼭지를 딴 손으로 눈과 코를 비볐다가 지옥을 경험하기까지 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며 지금껏 고상하게 살아왔던 그들로서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험난한 여정.
심지어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교님. 저 죽을 것 같아요….”
“저도요. 저거 꼭 다 해야 하나요?”
바닥에 엎어진 사제들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자루들을 힐끔 보며 끙끙 앓았다.
열심히 일한 만큼 줄어들어야 할 자루는 그새 증식이라도 했는지 숫자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어째 일할수록 점점 의욕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울상을 짓자, 말린 햇고추를 자루에 담던 엘녹이 거무죽죽해진 얼굴로 말했다.
“힘들어도 어쩌겠어. 영지민들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쪽에서 시작한 일이니, 우리가 제대로 매듭을 지어야지.”
“그렇긴 하지만요.”
사제들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성물 공동 관리 자격을 따냈다 해도 영지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지 못하면 플로스 영지에 발을 붙일 수 없다.
오늘만 해도 거리를 걷는 동안 영지민들의 시선이 매우 따갑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영주님께서 이번 자리를 마련해 주신 덕분에 큰 낭패를 보지 않았던 것이지, 계속 풍요 신전에서 버티고 있었다면 영지민들에게 몰매를 맞고 영지 바깥으로 쫓겨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기회를 주신 영주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진득하게 붙어서 성실하게 일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힘든 건 선 넘었죠!”
“맞아.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못 살걸요?”
“히잉. 엄마 보고 싶다….”
육체노동의 맛을 깊이. 그것도 반강제로 맛보게 된 사제들은 반발했다.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이 무간지옥 같은 채소 빨래!
이곳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점차 그들을 잠식해 나가며, 기어코 한 사제의 입에서 극단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그냥 돌아갈까….”
“내 말이. 차라리 본단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는 편이 낫겠어.”
“어? 그거 좋은 생각인데? 주교님 생각은 어떠세요?”
“응? 하지만 그래도 계약한 게 있는데….”
엘녹이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사제들이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맞아. 난 이곳을 탈출하겠어!”
젊은 나이에 요절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모든 사제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떨결에 함께 일어난 엘녹 역시 속으로는 힘들어 죽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사제들의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내용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보통 사제들이 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이니, 이건 나름대로 사기를 당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자기 자신에게 면죄부를 부여한 엘녹은 부하 녀석들을 말리기는커녕 어서 가자며 앞장을 섰다.
그렇게 모두가 일을 내팽개쳐놓고 도주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던 그때.
“저기이….”
“엄마, 깜짝이야!”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탓일까?
문 앞에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사제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설마 아까 불평 불만하던 말을 전부 들은 걸까?
괜히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엘녹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여, 여기는 무슨 일이니?”
“이거!”
친절하게 물어오자 파릇파릇한 꽃이 돌아왔다.
자기도 모르게 아이가 건넨 꽃을 받게 된 엘녹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꼬마야. 이게 뭐니?”
“감사 선물! 아조씨들 고마워!”
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해맑게 웃더니 쌩하니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눈을 끔뻑이기를 잠시.
하얀색 들꽃을 힐끔 내려다본 엘녹은 이제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 아이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사하다니? 대체 뭐가?”
우리가 저 아이에게 감사받을 일을 했던가?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며 쩡하니 굳어 있을 무렵.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이번엔 저 멀리서 영지민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히익! 저기 좀 봐 봐. 영지민들이야!”
“주, 주교님. 혹시 우리를 쫓아내려고 온 걸까요?”
“뭐? 그 말은 설마 우리가 도망치려는 걸 미리 캐치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감시병을 배치해놨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
그러고 보니 일에 열중하느라 바깥을 돌아볼 생각도 않았다.
어린아이가 지켜보고 있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니 어쩌면 정말로 감시병이 밖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크, 큰일이다. 배은망덕하다면서 매타작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엘녹은 지레 겁을 먹었다.
그만큼 저 멀리서 몰려오는 영지민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허둥지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도 점차 좁혀지는 거리.
주춤거리는 사이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기어코 코앞까지 다가온 영지민들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제들을 향해 씨익 웃었다.
“아유. 사제님들. 정말 고마워요.”
“저희가 잘못! …네?”
맞더라도 최대한 덜 아프기 위해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엘녹이 실눈을 떴다.
의아함에 입술을 오므리고 있자니, 가장 앞에 있던 영지민이 달콤한 초콜릿을 손에 쥐여주며 엘녹의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준다면서요? 영주님께 다 들었어요.”
“어우. 전에 왔던 사제들이랑은 딴판이라더니 정말이네. 여기까지 와서 고생들 많으셨죠?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뒤에 있던 영지민들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다들 무기를 하나씩 들고 온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새참이 든 바구니와 음료가 든 통이었다.
영지민들의 손에 의해 돗자리 위에 앉게 된 그들은 진수성찬이 따로 없는 요리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이거 진짜 먹어도 돼요?”
“그럼요. 사제님들을 위해서 만든 거니 사양하지 말고 얼른 드셔요.”
친절한 영지민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사제들이 천천히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그래도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으려는 상황이라 그런지, 느릿했던 손은 얼마 가지 않아 허겁지겁 빠르게 왕복 운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러게. 여기 밥맛이 아주 죽이네!”
고된 노동 끝에 먹는 밥은 꿀맛이라고 했던가.
새참의 참맛을 보게 된 사제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뜨며 행복한 식사를 했다.
당장 이곳에서 탈출을 해야 하니 뭐니 안달복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
특히 엘녹은 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얼이 빠져버렸다.
‘우린 고작 작물을 말려주었을 뿐인데….’
물론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일이 매우 힘들기는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원래 영지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하는 일.
지금의 상황을 간절하게 바라오긴 했지만 이런 식의 환대를 받을 줄은 전혀 몰랐다.
하물며 매일 비즈니스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또 그 대가로 돈을 받아왔던 그들이었기에, 순박하게 미소 지으며 흘러넘치는 정을 나누어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크게 감동을 받아버린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물론이죠.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맛있는 식사와 달콤한 주스까지 대접받은 그들은 멀어지는 영지민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만 남게 되었을 때는….
“음… 생각보다 할 만한데?”
“그러니까 말이야. 어쩌면 그냥 배가 고파서 예민했던 걸지도 몰라.”
“맛있는 음식도 대접받았는데 밥값은 해야 하지 않을까?”
영지민들의 호의로 치유를 받은 탓일까?
당장이라도 일을 때려치우고 도주하려던 그들은 그대로 유턴하는 것은 물론, 제 발로 지옥 같은 채소 빨래터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선 엘녹은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외쳤다.
“좋아! 조금만 더 힘내서 일해 보자!”
“아자아자!”
의지를 되찾은 사제들이 엘녹의 말에 따라 의욕을 불태웠다.
평소보다 더욱 힘 있게 일을 시작하는 사제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엘녹은 생각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렇지. 설마 가을이 오기 전까진 끝나지 않겠어?
그는 설마의 설마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 * *
태양신교 사제들이 한창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시간.
엘레인은 집무실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갑자기 3황자 저하께서 나타나서 영주님께 쿠키 바구니를 건넸을 때는 마치 동화 속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는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니까요?”
“그, 그렇구나.”
“뿐만 아니에요! 영주님께서 분홍색 갈기를 휘날리며 적기를 열심히 흔들었을 때는…!”
“스톱!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줄래요.”
“아 참, 그렇죠. 차가 식으면 안 되니까요.”
엘레인은 헤실헤실 웃으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는 아르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두 번 얼굴을 봤을 뿐인데 그녀는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엘레인을 찾아와 수다를 떨곤 했다.
최근 진행했던 일들도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추세고 인쇄기 출시도 일주일 뒤로 확정이 났기 때문에 별달리 할 일은 없었지만, 쉴 새 없이 엘레인을 찬양해대는 통에 정신적으로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필이면 제일 수치스러운 일들을 자꾸 꺼내서….’
엘레인은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그녀의 찬양에 경이로움 반, 부담스러움 반을 느끼며 이 상황을 타개할 다른 주제를 꺼내었다.
“그나저나 태양신교 사제님들이랑은 요즘 어때요?”
태양 신전은 이미 예전에 부숴버렸고 그 자리를 풍요 신전이 차지했다.
때문에 태양신교 사제들이 당장 머물 자리가 필요했고 이제 함께 성물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잠깐만이라도 그들이 잘 곳을 마련해주면 안 되겠냐는 엘레인의 물음에 아르헤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어차피 증축을 해서 자리가 많이 남아돈다면서 말이다.
태양신교 사제들에게도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긴 했지만, 당사자에게도 물어보지 않을 순 없겠지.
그런 생각을 담아서 바라보자 아르헤가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부딪힐 일도 없이 서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정말요? 그럼 나중에라도 불편한 거 생기면 바로바로 말해줘야 해요.”
“세상에 마상에. 우리 영주님은 어쩜 이렇게 마음씨도 고울까! 앞으로도 계속 저를 걱정해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건 좀….”
이상하다. 어째서 그녀의 눈에서 광기가 보이는 거지.
엘레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다고 아르헤의 시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 보는 것보단 낫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가시방석이 따로 없는 엘레인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영주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것은 틀림없이 레눔의 목소리였다.
최근 신전 공사를 끝마치고 마을 사람들의 건물 수리를 맡아주고 있던 그는 다른 의미로 참 바빴다.
그런 그가 집무실을 찾아오는 것은 실로 간만이었기에 엘레인은 활짝 웃는 낯으로 외쳤다.
“들어와요!”
“…….”
누구지. 영주님의 얼굴에 저런 미소를 띠게 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왜인지 모르게 드는 경쟁심에 아르헤는 두 눈을 홉뜨고 열리는 문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방문자는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영주님.”
“아아. 레눔 씨였네요.”
“음? 주교님도 계셨군요.”
신전 증축으로 자주 마주쳐서인지 둘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아르헤는 간만에 보는 레눔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사람이라면 영주님의 미소를 받을 만하지.’
지금의 풍요 신전이 지어질 수 있던 것도 모두 레눔 덕분이다.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또 자신과 다른 분야에서 엘레인의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르헤는 순순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판단을 내렸다.
“요즘 잘 지내고 있죠? 영지 내에서 레눔 아저씨에 관한 이야기가 파다해요.”
“하하. 모두 영주님 덕분이지요.”
레눔은 언제나처럼 겸손했다.
역시 영주님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덕목이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히죽 웃고 있던 아르헤는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태양신교 사제들의 일터를 보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왜요? 혹시 농땡이라도 부리고 있었어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고 식사도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으라 일러두긴 했지만, 농땡이를 부리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엘레인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만약 놀고 있다면 무슨 벌을 내려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하자, 레눔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걱정했던 것보다 일을 참 잘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벌써부터 영지민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역시 건전한 노동은 건전한 정신을 불러온다는 게 맞는 말인가 싶더군요.”
“엥? 영지민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니… 그게 정말이에요?”
“예. 방금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와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엘레인은 손뼉을 치면서까지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게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이, 엘레인이 모르는 뒷면에서 잘 풀려나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둘 사이의 문제가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요. 조만간 찾아가서 축하 파티라도 해줘야겠어요.”
“…예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영주님은 참으로 자상하시군요.”
“에이. 그렇게 띄워주면 제가 부끄럽잖아요.”
엘레인이 분홍빛으로 물든 볼을 긁적거리자 레눔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져가고 있을 때, 단 한 사람. 웃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우, 우리도 일 시켜주면 잘할 자신 있는데요…!”
“풍요 신전에선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걸요. 어쨌든 태양신교 사람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이대로 잘만 해나간다면 좀 더 큰일을 맡겨도 될 것 같아요.”
“!!!”
엘레인의 말에 아르헤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면서 걸음을 옮기는 그녀.
“어? 오늘은 이만 가시게요?”
“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요.”
“그렇구나. 그럼 잘 가요!”
환하게 웃으면서 하는 인사에 아르헤는 힘없이 웃으며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싸늘하게 굳어지는 그녀의 얼굴.
표정 변화 없이 입꼬리만 비죽 올린 그녀는 이내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태양신교 녀석들… 감히 엘레인 님의 관심을 독차지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아르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