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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162/417)

162화

베네딕트 제국의 수도.

그곳에 위치한 태양 신전을 운영하고 있는 대주교는 어느 날 의문의 편지를 받았다.

“풍요 신전에서의 초대? 그것도 나를 콕 집어서 말하다니.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구나.”

대주교 야훔은 풍요 신전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예전부터 풍요신교와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다른 신을 모시는 사도이기 때문에 경쟁자로서 자주 부딪치는 이유도 있지만, 과거 태양 신전을 부수고 그 자리에 풍요 신전을 세운 이후로 그게 더 심해졌다.

한마디로 적진과 다름없는 곳에서 뜬금없이 초대장이 날아온 것이다.

그것도 대화를 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서.

“함정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대동하지 아니하고 대주교님 혼자서 오라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는 그냥 무시하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초대장을 들고 고심하고 있자 곁에 있던 주교들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말했다.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최소한 직접 찾아와 허락을 구하거나 사절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달랑 초대장만 보내다니….

거기다가 뭐? 대주교 혼자만 방문해줬으면 좋겠다고?

기만도 정도껏 해야지, 이 정도면 태양신교를 아예 바보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흐음. 자네들의 말에 일리가 있네. 하지만 주교가 정식으로 보내는 초대장이지 않은가. 성물에 관해서 할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데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면 같은 계급인 저희가 가는 게 옳습니다. 굳이 대주교님께서 힘들게 발걸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네. 굳이 나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그곳에 보낸 아이들이 슬슬 걱정되던 참이니 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겠네.”

야훔은 단호하게 제 의사를 밝혔다.

주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단순 도발이나 기만을 하려는 것 치고는 초대장에는 아무런 신성력도 담겨 있지 않았다.

가끔 편지에 신성력을 듬뿍 담아서 교단의 힘을 과시하는 행태를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일단 그런 쪽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들의 저의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야훔은 그들이 갑자기 이러한 일을 벌인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플로스 영지로 파견 보낸 아이들에게서 소식이 끊긴 이유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자네들은 내가 없는 동안 신전을 잘 지키고 있게나.”

대주교님의 확고한 의지에 주교들은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 * *

“잘 찾아오셨어요, 야훔님.”

“반갑네.”

며칠 뒤.

플로스 영지의 풍요 신전을 찾은 야훔은 주교 아르헤의 환대에 웃음을 지었다.

풍요신교에 젊은 주교가 있다고 들었는데 플로스 영지에 부임했을 줄이야.

혹여나 이쪽에서 보낸 젊은 주교인 엘녹과 마찰이 있지는 않았을까, 대주교는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빙긋 웃고 있는 아르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야훔은 그녀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것을 포기하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화를 하고 싶다고 들었네만… 무슨 연유인지는 여전히 모르겠구먼.”

“어머. 초대장에 적혀 있었을 텐데요. 대주교님과 함께 성물과 화합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그런 거라면 나 말고도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 아닌가. 굳이 나를 불러야 했을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 보네만.”

“후후. 글쎄요.”

그가 대놓고 말했지만, 아르헤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을 뿐이다.

야훔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되었네. 그보다 혹시 우리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태양신교 사제들 말씀이세요?”

그때 아르헤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모습에 움찔한 야훔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성물 관련 문제로 그들을 영지에 파견하였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서 말이네.”

“세상에. 그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가요?”

“으음? 그 말은 뭔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나?”

야훔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뜨였다.

하지만 그가 추궁을 하기도 전에 아르헤는 알고 있는 것을 순순히 불었다.

“그들이라면 플로스 영지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답니다.”

“봉사? 그들이 무슨 봉사를 한단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군요…?”

아르헤의 눈빛이 애잔하게 변했다.

그 시선이 상당히 고깝게 느껴졌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야훔으로서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얼른 말해 달라는 듯 쏘아보자 아르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편이 낫겠죠. 따라오세요.”

그리 말한 아르헤는 태양신교 사제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장소를 향해 쭉쭉 걸어 나갔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영지민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며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커다란 창고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내 아이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고?”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 보세요.”

아르헤가 싱긋 웃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 미소가 어째서인지 악마의 웃음처럼 느껴졌지만, 당장 상황이 궁금했던 야훔은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밝은 빛이 가득 들어찬 공간이었다.

“이게 대체….”

순간적으로 눈을 혹사시킬 정도로 밝은 빛에 야훔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저 빛의 정체는 분명 태양신의 힘이 가득 담긴 신성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째서 이 허름한 창고에, 그것도 이리도 가득 담겨 있단 말인가.

야훔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밝은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눈을 굴려 주위 풍경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이것 봐라? 나 이제 채소 정도는 눈 감고도 썰 수 있다?”

“겨우 그 정도? 나는 고추 앞에 가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거든!”

“조용히 하고 일이나 해. 그럴 시간에 고추 하나라도 더 말리겠다.”

야훔은 제가 본 광경이 과연 진실인지 궁금해졌다.

노련한 농부처럼 두 팔을 걷어붙이고 너른 돗자리 위에 작물을 늘어놓는 자들과 실력 좋은 주부처럼 채소를 썰어대는 자들.

그리고 상당한 양의 신성력을 다른 곳도 아니고 작물에 쏟아붓고 있는 저들은 분명히 태양신교의 사제들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들이 왜 여기서 잡일을 하는 것이며 아까운 신성력을 땅에다 버리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의문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야훔은 기어코 이곳에 들어서기 전 아르헤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고?”

봉사.

같은 말로 고급 인력인 태양신교 사제들이 무일푼으로 잡일을 하고 있다는 말은 야훔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분명 그들은 성물을 가져오라는 숭고한 임무를 맡았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외진 곳에서 쓸데없이 값진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겨우 작물을 말리는 일에 신성력을 사용하는 미친 짓까지 벌이면서!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다 실패한 야훔은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평소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매달고 있는 대주교의 노호성에.

아니, 그보다 앞서 대주교가 이곳에 직접 행차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양신교 사제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펄쩍 뛰었다.

“아니, 대주교님께서 왜 여기에….”

“지금 그것이 중요한가? 어째서 성물을 가져오기 위해 파견된 자들이 이런 후미진 곳에서 잡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든 좋으니 얼른 나를 납득시켜 보게!”

“그, 그게 말이죠. 이게 다 영지민들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영지민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전향했다는 말인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겨우 그런 일로 기존의 명령을 등한시한 거라면 얼른 본단으로 복귀하게!”

“자, 잠깐만요. 그게 아니라 이번 일은 성물을 관리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성물? 이 일과 성물이 관련되어 있다고?”

끝을 모르고 폭주하던 야훔이 잠시 움찔했다.

어떻게 보더라도 자원봉사자로 전향한 이유와 성물의 연관성은 없어 보였지만,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사제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네, 넵! 주교님께서 필사적으로 영주님을 설득해서 풍요 신전과 성물 공동 관리권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영지민들이 생각하는 태양신교의 이미지가 완전히 바닥이라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태양신교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영지민들이 할 일을 자네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겐가?”

“맞습니다!”

“그 일이라는 게 신성력을 쏟아부어 작물을 말리는 것이고?”

“그, 그렇죠?”

눈을 데룩 굴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제들의 모습에 야훔은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자네들 꼴이 어떤지 모르는가?”

“네? 저희 꼴이 어떤데요?”

말린 고추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제의 순진한 물음에 야훔은 뒷골이 땅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매우 분노하며 말하기를.

“당장 본단으로 돌아가게. 성물이고 뭐고, 나는 자네들이 궂은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네!”

“대주교님….”

그러고 보니 그들이 모시는 대주교는 이런 사람이었다.

상냥하고 마음씨도 고와서 그 누구보다 사제들을 아끼는 참된 사람.

하지만 그들은 야훔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근데 저희 계약상으로 묶여 있는데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주교님께서 영주님을 설득하던 날 계약서를 작성했거든요.”

“계약… 그래서 계약 만료일은 언제까지인 겐가?”

“그게… 어? 그런 게 따로 적혀 있었나?”

한 사제의 말에 함께 있던 사제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리바리한 그 모습에 야훔은 더더욱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주교! 엘녹은 대체 어디에 있나!”

“여, 영주님 만나러 가셨어요.”

“이익! 당장 그곳으로 안내하게!”

“네넵!”

길길이 날뛰는 대주교의 모습에 사제들은 빠릿하게 영주성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 * *

한편 작금의 상황을 모르는 엘레인은 집무실을 찾아온 엘녹에게 차 한 잔을 건네었다.

“소식은 들었어요. 영지민들과 사이가 그렇게 좋아졌다면서요?”

“전부 영주님의 하해와도 같은 마음 덕분이죠. 영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영지민들의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겁니다.”

“그 말은 부정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엘녹 씨와 사제들이 노력해서 얻어낸 산물이니까요. 영지민들의 생활 만족도도 굉장히 많이 올라서 오히려 이쪽에서 감사해야 할 지경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핫!”

엘레인과 엘녹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첫인상은 좋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최근 영지민들의 행복도를 책임지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엘레인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수완이 대단하시네요. 벌써 할 일이 거의 떨어졌다니.”

“영지민들이 가지고 있는 여름작물이 무한정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가을 작물을 수확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아돌 것 같습니다.”

“성물 관리자는 따로 빼놓았다고 했죠? 그렇다면 인력이 많이 남아돌겠네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상의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영지민들을 더 도와주고 싶은데 할 일이 없어서… 혹시 다른 일은 없을까요?”

조심스레 묻는 엘녹의 말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쪽에서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처음 일하기 싫어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먼저 나서서 할 일을 찾는 그의 모습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알고 보니 이쪽 일이 체질인 거 아니야?’

어쩌면 레눔의 말처럼 건전한 일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 걸지도 모른다.

한 달 사이 완전히 참된 일꾼이 되어버린 그를 놀랍게 바라보던 엘레인은 이내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일손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그 말씀은?”

“안 쓰는 땅을 좀 개간하려고 했거든요. 요즘 영지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말이에요.”

이제 플로스 영지는 그저 촌구석이라고 부를 수준을 넘어섰다.

그만큼 영지민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숲으로 뒤덮인 땅을 개척하여 쓸 만한 땅으로 개간할 필요가 있다.

“아하. 그런 거라면 저희가 거들게요.”

영지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오케이인 걸까.

흔쾌한 그의 대답에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

“이것 놓으시게!”

그때 고함과 가까운 외침이 들리며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깜짝 놀란 엘레인이 문 쪽을 바라보자,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노인이 곧 폭발할 화산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

“플로스 영주!”

엘레인을 발견한 야훔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대뜸 이쪽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당신을 고발하겠네!”

“넹?”

난데없는 선언에 엘레인은 벙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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