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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168/417)

168화

자르크 공작령의 서쪽 숲.

그곳에 도착한 아르닐은 양탄자를 꺼낸 뒤 그것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양탄자가 놀라운 점은 빗자루의 폭풍 모드를 새로이 적용시켜서 업그레이드했다는 점이야.”

“아, 으응.”

“그리고 풍압을 막기 위해서 특별한 실드도 상시 작용하고 있지.”

“우와 정말 대단하다. 정말이지 대단한데, 그런데… 아르닐 오빠.”

“응? 왜 그래?”

“진짜 우리만 타고 가는 거야?”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한동안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엘레인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싱긋 웃어 보이는 아르닐.

“물론이지. 여기 봐 봐. 너랑 나 그리고 저 커다란 수인 아저씨가 타면 앉을 자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자자, 저 둘은 이제 그만 신경 쓰고 얼른 타. 안 그래도 촉박한 시간.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으니까.”

아르닐의 말에 엘레인은 주춤주춤 양탄자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머뭇거리며 따라 올라오는 레눔과 해맑은 얼굴로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는 아르닐.

양탄자를 공중에 붕 띄워 올린 그는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라네즈와 카론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열심히 잘 따라와 봐.”

그 말을 끝으로 아르닐은 진짜 출발해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이 참으로 무색하게도 말이다.

당황한 엘레인은 여전히 좌불안석으로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아르닐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굳이 저 두 사람을 콕 집어서 떨궈낸 이유는 그만큼 그들의 피지컬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진짜로 버리고 가냐아아아!”

“2황자 저하. 이왕이면 은밀 기동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여나 몬스터들에게 어그로가 끌릴 수 있습니다.”

“넌 이 상황에 속 편하게 어그로 걱정이나 하고 있냐아!?”

“나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입 다물고 얼른 달리기나 해에!”

“예.”

양탄자 아래로 꼬리를 물고 구름 먼지가 피어올랐다.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켜 속도를 향상시킨 그들은 놀랍게도 폭풍모드를 사용한 양탄자를 손쉽게 따라잡고 있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엘레인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쉽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진짜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바보 형 정도면 식은 수프 먹기 수준이지. 하물며 바보 형을 이기는 카론 경이면, 뭐 말 다 한 셈이지.”

아르닐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오랜 세월 동안 투닥거리면서 싸워왔던 존재이니, 그만큼 라네즈의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엘레인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 아르닐의 입가에 핀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보다 엘레인. 우리 할 말이 있지 않아?”

“으, 응? 무슨 이야기?”

“아까 그 아저씨가 말한 사람 말이야. 너랑 같이 있었다던 그 남자아이가 대체 누구야?”

“어… 그러니까 그게….”

벌써 잊어버린 듯한 라네즈와 달리 아르닐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엘레인이 퍽 난감한 얼굴로 쩔쩔매자 아르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말하기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 아저씨가 커플이라고 했던 말이 정말이지 너무너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커플 아니야! 그냥 가다가 만난 애라구.”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아르닐의 축 처졌던 어깨가 다시금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진짜 ‘커플’이라는 말만 신경 쓰였던 것인지 상당히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 열두 살짜리 꼬맹이를 보고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했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엘레인은 여전히 싱글벙글한 아르닐의 얼굴을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보다 정말 빠르네. 말 타고 일주일은 걸릴 거리랬는데 이 정도 속도면 반나절이면 도착하겠어.”

심지어 탑승감도 무척 좋고 얼굴을 때리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아서 매우 쾌적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면 세상이 변해 있는 느낌이랄까.

속도도 엄청 빨라서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하지만 태평하게 그런 감상을 하지 못하는 자도 존재했으니.

“저… 영주님. 실례지만 손을 좀 잡아도 되겠습니까?”

“뭐? 갑자기 내 여동생 손은 왜 잡으려고 그래? 아저씨 미쳤어?”

“부,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제가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지금 레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몸은 누가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었고 마법이 풀려 훤히 드러난 그의 꼬리는 이도 저도 못 하고 엉덩이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식은땀이 가득한 그의 커다란 덩치가 조금이지만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고소 공포증?”

반면 큰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레눔의 행동에 잠깐 할 말을 잃었던 아르닐은 괜히 미간을 와락 좁혔다.

그리고 커다란 담요를 꺼내 그의 머리 위로 뒤집어 씌워줬다.

“그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괜히 나만 나쁜 놈 됐잖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제 좀 나아?”

“덕분에요.”

시야를 가린 게 도움이 됐는지 부르르 떨리던 그의 몸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짜증을 내긴 했지만 그럼에도 살뜰하게 잘 챙겨주는 아르닐의 행동에 엘레인은 방긋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슬슬 도착한 것 같은데.”

길을 따라 달리는 것도 아니고 일직선으로 쭉 주파했다.

덕분에 반나절보다 훨씬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 드넓은 평원과 협곡이 보였다.

아르닐은 슬슬 힘이 들어 헥헥거리는 라네즈와 꽤나 힘에 부치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카론을 보며 외쳤다.

“거의 다 왔으니까 힘내!”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따라 달려오던 라네즈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물론 라네즈와 아르닐이 생각하는 그 ‘거의’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헤엑. 헤에엑. 거의라고 해 놓고 한참이나 더 달리게 하다니이….”

드디어 공허의 평원에 도착한 엘레인 일행.

하지만 ‘거의’ 발언을 하고 난 후에도 두 시간가량 더 뛰어가야 했던 라네즈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라네즈의 체력을 모두 회복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라네즈의 체력을 만땅으로 채워줄 수 있는 힐러가 바로 곁에 있었으니.

“오빠 진짜 대단해. 어쩜 그 먼 거리를 두 발로 뛰어올 수 있지?”

“그, 그렇지? 나 엄청 대단한 거지?”

“응. 완전 최고야! 나였으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지쳐서 나가떨어졌을걸?”

“크흠! 이 몸이 이 정도 수준이야. 아마 나 정도 체력과 달리기 실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걸?”

“뭐래. 옆에 카론 경은 장식이야?”

라네즈의 자랑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인지 아르닐이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초주검까지는 아니지만,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열심히 훔치고 있던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자기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라네즈는 발끈했다.

“그럼 몇 없는 걸로 하지 뭐! 됐냐? 이제 속 시원해?”

“물론이지. 아주 흡족해.”

“으. 재수 없어.”

세상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쌍둥이 동생의 모습에 라네즈는 괜히 눈앞의 돌멩이에다가 화풀이를 했다.

엘레인은 이제 하나의 일상이 된 투닥거림을 관람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어쨌든 여기가 그 공허의 평원이라는 거지?”

“맞아. 저 끝에 보이는 게 바로 통곡의 협곡이고 말이야.”

아르닐이 가리킨 곳에는 높디높은 산이 울타리를 치듯 평원 주변을 빙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엘레인 일행이 밟고 있는 이 평원은 앞에 붙은 ‘공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인 건 높다란 풀들이 그들의 몸을 가려준다는 점과 그나마 키가 작은 나무 몇 그루와 덤불 등이 존재한다는 건데….

하여튼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건 변함이 없다.

때문에 그들은 편한 양탄자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뻥 뚫린 시야에서 공중을 날아다니면 단번에 팍스 교단의 표적이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아까 공중에서 봤을 때 저쪽에 뭔가 있었지?”

“맞아. 지금도 어렴풋이 보이긴 하지만 대충 천막인 것 같았어.”

이 근방에서 천막이 있다면 수인족의 거주지일 터였다. 하지만 성전 중이니, 팍스 교단 쪽의 첨병들이 들어와 세운 막사일 가능성도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몸을 숨기고 이동하자. 저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아르닐의 말에 따라 레눔과 카론 그리고 라네즈가 몸을 한껏 낮추었다.

하지만 엘레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키가 작았거든.

“…왠지 지는 느낌인데.”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편하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굴욕감을 맛보게 된 엘레인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함께 이동하기를 한참.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른 엘레인은 환하게 웃는 낯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힘내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고 엘레인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짙은 혈향과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났다.

“…이미 한바탕한 모양인데.”

“대체 누가?”

“메르누아! 레니!”

그때 레눔이 아내와 딸의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갔다.

당황한 엘레인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레눔은 저만치 멀어진 상태.

카론은 당황한 엘레인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주변에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럼 정말로…?”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생겨버린 거야?

그런 의문이 차오름과 동시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레인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꼬, 꼬맹아.”

“이 앞으론 가지 않는 편이….”

“난 괜찮아.”

어차피 시체 정도는 용병 엘레인일 때 자주 봤다. 그런 것보다 레눔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아르닐과 라네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옮긴 엘레인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가 잔뜩 쌓여 있는 산,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레눔이었다.

“레눔 아저씨….”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레눔은 말도 나오지 않는 듯 까맣게 죽은 눈으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까.

아니 위로를 한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회복이 되기는 할까.

수도 없이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아르닐과 라네즈가 엘레인의 앞을 막았다.

그들은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참혹한 현장을 제 여동생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너른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레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떨칠 수가 없었다.

수인들의 죽음이 제국민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그것이 라네즈를 나락으로 끌고 가는 그 끔찍한 환상을 말이다.

숙연한 분위기 속.

그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이질감은 대체 뭘까?

단순히 현실 도피가 하고 싶어서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을 건드리는 무언가.

쌍둥이 형제들 틈 사이로 그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엘레인은 그제야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오빠들 잠깐만.”

“어어?”

엘레인은 앞길을 막고 있는 쌍둥이 형제들 옆으로 스윽 빠져나오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레눔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축 처진 어깨를 잡아 세운 뒤 이렇게 말했다.

“레눔 아저씨. 아저씨네 가족은 무사해요.”

“예…?”

텅 빈 레눔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엘레인은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뺨을 잡아 옆으로 돌렸다.

“보세요. 여기에 있는 천막들. 노마스족이 사용하는 게르가 아니잖아요.”

“아?”

그제야 주위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 레눔은 서서히 입을 벌렸다.

엘레인의 말대로 노마스족은 오로지 게르를 사용한다. 천장 중앙이 원형 모양으로 뻥 뚫린, 특이한 형태를 지닌 천막을 말이다.

“그, 그럼.”

레눔의 눈동자에 다시 총기가 맺혔다.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얼른 일어나세요. 가족 찾으러 가야죠.”

“영주님….”

레눔이 울먹거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더니, 어느새 다가온 쌍둥이 형제가 말을 덧붙였다.

“엘레인 말이 맞아.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가족들을 구출해내야지.”

“그래. 가족 먼저 찾고, 그다음에 이 수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자.”

두 황자들까지 위로하고 나서자 레눔의 멍했던 정신도 점차 맑아졌다.

오해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건져준 세 사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한 레눔은 주저앉았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본 그의 눈동자는 결연한 의지로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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