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냄새 말이야?”
콧등을 톡톡 두드리던 레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였지만 도시에서 생활했던 탓일까.
레눔은 수인 특유의 후각을 이용해서 가족들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엘레인 덕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이제라도 바람에 실린 냄새를 찾아보기 위해 킁킁거렸다.
하지만.
“피 냄새와 탄내 때문에 다른 냄새를 맡기 어렵군요.”
레눔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뛰어난 후각은 좋은 단서를 제공해줄 테지만, 지금처럼 다른 냄새가 방해하는 경우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엘레인이 그를 위로했다.
그에 레눔은 잠시 우울한 얼굴을 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냄새로 가족들을 찾는 게 불가능하다면 엘레인의 말마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될 터.
이윽고 적절한 수를 떠올린 레눔이 엘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사냥을 다녀와도 될까요?”
“사냥을 다녀오겠다고?”
“예.”
엘레인은 이 뜬금없는 소리에 난감했다. 갑자기 사냥이라니?
지금 상황에서 레눔이 조크를 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 너른 평원에서 갑자기 사냥이라니….
오면서 동물 하나 보지 못했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교단의 첨병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지금, 너무 위험했다.
“어쨌든 고기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이걸 사용해.”
“…?”
엘레인은 라네즈가 당당하게 꺼낸 고깃덩어리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것을 보아 아공간 주머니에 따로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도대체 왜?
“오빠 생고기를 따로 가지고 다녀?”
“응. 배고프면 먹으려고 도시락으로 가지고 왔지.”
“엥?”
잘 말린 육포도 아니고 대형 스테이크처럼 커다란 생고기를 도시락으로 가져왔다고?
엘레인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라네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배가 찬다고.”
“그, 그렇구나.”
“흠흠! 어차피 지금 뭘 먹을 상황도 아니고 지금 안 먹으면 상할 테니까 특별히 양보할게.”
“감사합니다, 2황자 저하.”
라네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레눔에게 넘겨주며 생색이란 생색은 모두 내었다.
그런 오빠가 살짝 부끄러워진 엘레인이었지만, 정작 고기를 받은 레눔은 라네즈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래서? 그걸로 뭘 어쩔 생각인데?”
아르닐의 물음에 레눔은 고깃덩어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시즈닝 뿌리듯 탐스러운 분홍빛 고기 위에 치덕치덕 바르자 향긋한 풀 내음이 사방에 진동을 했다.
“이제 잠깐 뒤로 빠지면 됩니다.”
레눔이 풀냄새가 가득한 고기를 나무 위에 걸어놓더니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숨은 엘레인은 도대체 그가 뭘 하려는지 여전히 가늠이 안 잡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 저게 뭐지?”
라네즈의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엘레인은 발견할 수 있었다.
드넓은 천공 아래. 커다란 날개 두 짝을 활짝 펼치고 하늘을 비행하고 있는 매 한 마리를 말이다.
삐이이이익—!
우리가 녀석을 발견한 것처럼 녀석 또한 엘레인 일행을 발견한 것인지 머리 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녀석은 커다란 몸뚱어리를 틀어 바로 아래쪽으로 쏘아 내려왔다.
그래. 바로 레눔이 걸어놨던 고깃덩어리를 향해 말이다.
삐이이익—!
쏜살같이 날아온 매가 커다란 발톱으로 고깃덩어리를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비상하려던 녀석은 갑자기 제 다리를 꽈악 붙잡아오는 손길에 놀라 연신 푸드덕거렸다.
집에서 키우는 닭을 낚아채듯 너무나도 손쉽게 매를 잡아챈 레눔은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 혹시 이 매, 레눔이 키우는 매에요?”
“저 혼자가 아닌, 노마스족에서 키우는 매입니다. 이 가루를 뿌린 고기를 좋아하는 매는 이 녀석뿐이지요.”
아, 그래서 고기 위에 저 수상한 가루를 치덕치덕 발랐던 거구나?
엘레인이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매를 바라보자 레눔이 품에서 설계도면 하나를 꺼내었다.
“잠깐 잡아줄 수 있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잠깐 카론에게 매를 맡긴 레눔은 설계도면 뒷면에 흑연으로 무어라 글씨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매의 다리에 그것을 곱게 묶은 뒤, 여전히 고기를 콱 움켜쥐고 있는 녀석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이제 저 녀석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렇구나. 노마스족에서 키우는 매니까 지금 따라가면 아저씨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거네요?”
“맞습니다.”
“오호라. 이거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엘레인 일행은 재빨리 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참고로 달리기가 느린 엘레인은 카론이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서 이동했다.
“쳇. 나도 들 수 있는데.”
“아니, 마법으로 들 수 있는 걸 왜 굳이?”
물론 라네즈와 아르닐이 무척 반대했지만, 엘레인은 카론을 선택했다.
이 나이 먹고 오빠한테 들려가는 것도 좀 그렇고(차라리 밸런스 좋은 카론이 낫다) 아르닐의 마나는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어쨌든 매의 뒤를 계속 쫓은 결과 엘레인 일행은 통곡의 협곡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다 숲이 끝날 때쯤 그들은 걸음을 멈춰 섰다.
삐이이익—
협곡 안으로 매가 날아갔지만, 더 이상 녀석을 쫓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통곡의 협곡 바로 입구 쪽에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판을 치고 있었거든.
“저 사람들이 선발대일까?”
“그런 것 같은데. 갑옷에 박힌 저 문장. 자르크 공작가 문장이야.”
“어, 저기 사제들도 있어.”
라네즈의 외침에 엘레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임시 막사 앞에서 여유롭게 떠들고 있는 팍스 교단 사제들이 있었다.
“매는? 지금 어디로 갔어?”
“협곡 안으로 조금 더 날아가다가 하강했습니다. 아무래도 제 가족은 저 협곡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
레눔의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그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협곡의 유일한 입구를 자르크 공작 기사단과 팍스 교단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조용히 데려오는 건 그른 것 같지?”
“응. 지금 꼴을 보면 본대가 올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을 가능성이 커.”
“일주일 뒤에 온다는 그거 말이구나.”
엘레인은 울상을 지었다.
만약 그들이 도착한다면 그때야말로 노마스족이 위험하다.
다르게 말하면 일주일 안에 그들을 모두 구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마스족이 녀석들을 치고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없어? 천 명 정도 된다면서.”
“그건 아무래도 어려울 겁니다. 저희 노마스족에 젊은이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레눔의 말에 아르닐이 입을 다물었다.
하긴 노약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챙기려면 쉽사리 부딪히는 결단을 내리기 어렵지.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난 수인족들이라고 해도 그런 이들을 모두 챙기면서까지 이곳을 안전하게 돌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음? 저기 매가 다시 돌아오는데?”
“어?”
그때였다.
협곡에서 날아온 매가 청명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빙빙 돌던 녀석은 이내 레눔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이건….”
“편지에요!”
레눔이 처음 썼던 설계도면 뒷면에 새로운 글이 적혀 있었다.
허겁지겁 매의 다리에 달려 있는 편지를 풀어 내용을 읽어본 레눔은 또다시 눈물을 주륵 흘리기 시작했다.
“레눔 아저씨? 뭐라 적혀 있어요?”
“가족들입니다. 노마스족은 모두 무사하다며 오히려 저를 걱정하네요.”
레눔이 설계도면 뒷면을 들어 올리자, 과연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른쪽 귀퉁이에 작은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으니.
“강아지?”
“딸아이의 그림입니다. 가끔 저를 그려주고는 했지요.”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레눔의 노마스족은 자기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딸아이의 그림을 사용한 모양이다.
레눔이 굳이 설계도면을 사용한 것처럼 말이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예. 그리고 감사합니다. 모두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감사의 인사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요.”
엘레인의 시선이 다시금 협곡 입구에서 판을 치고 있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지, 기본적인 정찰도 하지 않는 덕분에 편안하게 녀석들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쩔까요? 바로 진입할까요?”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저래 봬도 정예 기사들일 테니까.”
카론의 의견에 엘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라네즈는 나름 괜찮은 방법을 떠올렸다.
“아르닐 네 투명 마법으로 우리 몸을 투명하게 만들면 되잖아. 아무리 정예 기사라고 해도 네 마법까지는 못 뚫어볼걸?”
“괜찮은 생각이야. 근데 그렇게 해서 들어가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
“엥? 그냥 네가 전부 투명 마법 걸어주면 되는 거 아니야?”
“한 서클만 더 높았으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어려워. 남의 몸을 투명화시키려면 그 사람의 골격에 맞게 마나를 둘러 빛을 굴절시켜야 하는데, 지금 수준으로는 마력이 너무 많이 소비돼.”
투명화 마법은 극도로 섬세한 마나 컨트롤과 대량의 마력을 요구한다.
잠깐이라도 정신력이 흐트러지면 풍경 자체에 왜곡이 생겨서 금방 들통 날 테니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컸다.
설령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하여 그러한 문제점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협곡 안에 갇힌 수인족은 최소 천여 명.
지금의 실력으로 그들 모두를 일주일 안에 전부 이동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럼 텔레포트는?”
“그것도 마력이 부족해서 안 돼.”
“뭐야. 그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허 참. 마법이 무슨 만능인 줄 알아?”
라네즈의 투덜거림에 아르닐의 이마 위로 핏줄이 솟았다.
그에 곧바로 깨갱하는 쌍둥이 형이었으나, 아르닐의 시선은 엘레인에게 콕 박혔다.
“미안해.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무슨 소리야. 아르닐 오빠의 도움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는걸.”
“엘레인….”
엘레인의 위로에 아르닐은 두 눈을 글썽거렸다.
이후 ‘역시 내 동생밖에 없어!’ 따위를 외치는 아르닐의 모습에 라네즈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아, 그냥 시원하게 쓸어버리면 안 되나?”
“그건 안 돼. 무력은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야.”
엘레인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라네즈와 카론. 그리고 엘레인의 정령사 힘과 아르닐의 마법이 합쳐지면 사실상 재앙이 닥쳐오는 것과 같다.
즉, 저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그런 식으로 노마스족을 구출한다고 해도 성전 자체를 무효화시키지 않는 이상 지금과 같은 상황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한마디로 무력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전을 내버려두면 결국 수인들이 베네딕트 제국으로 몰려들 거고 2차 전쟁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되면 라네즈와 발론드 공작가가 전쟁에 참여할 테고, 결국은 회귀 전 상황이 그대로 진행될 것이다.
엘레인은 그것만큼은 꼭 막고 싶었다.
“하. 진짜 어렵네. 그냥 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어떻게 해 보라고 하는 건?”
“바보 형. 이건 성전이야. 아버지가 끼어들었다가는 내정 간섭으로 신성 제국과 전쟁이 터질 수도 있어.”
“그럼 신성 제국에 도움을 요청해 보는 거는?”
“말이 동맹 관계지, 사실상 알력 싸움이 한창인 그놈들에게 손을 벌리자고? 뭐, 매국노가 되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라네즈가 말하는 족족 아르닐은 합당한 이유를 대며 태클을 걸었다.
열심히 뇌를 쥐어짠 보람도 없이 모두 퇴짜를 맞은 라네즈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으….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이놈의 정치 문제는 어딜 가든 끼어 있네.”
“내 말이. 그냥 시원하게 쓸어버릴 수 있으면 좀 좋아?”
바보 형의 말에 아르닐이 아주 간만에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아니, 이 사람들이 아까부터 계속 위험한 발언을 하네.’
만약 그들이 한 나라의 황자들이 아닌, 자유로운 용병이었다면 세상이 어찌 됐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 세상이 뒤집어져도 몇 번 뒤집어지지 않았을까?
어찌 됐든.
“이거 진짜 어떡하지?”
사면초가.
그런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노마스족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니 뭐니,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전 자체를 종결시켜야 한다니.
국가적 위기인 재앙이 터지지 않는 이상 저들의 진군을 막는 그림은 어떻게 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
그에 모두가 절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던 그때.
“여기 있었구나.”
“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나뭇잎 하나가 살랑거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나무 위에서 오르칼을 공주님 안기로 든 그림자가 휙하고 떨어졌다.
급작스런 그의 등장에 엘레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니, 오빠가 왜 여깄어?”
절대적 위기의 상황.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오르칼이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