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본단과 땅을 팔아 어렵사리 돈을 마련한 팍스 교단은 알거지가 된 채로 공작령 밖으로 쫓겨났다.
축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자르크 공작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갖고 있는 땅이 없으니 너희들은 내 영지민이 아니다!’ 따위의 이상한 잣대를 들이밀며 마음대로 쫓아낸 것이다.
하지만 공작령 바깥은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알거지들이 돌아다니기엔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곳이다.
하루아침에 몬스터들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린 그들은 살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뭐, 열심히 산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자자. 그럼 얼른 출발하자고.”
라네즈가 푸르른 숲은 이제 진절머리 난다는 듯 재촉을 했다.
참고로 마법진에서 일하는 마법사는 오르칼이 이미 매수한 뒤였다.
때문에 현재 텔레포트 마법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1,000여 명이나 되는 노마스족과 함께 마법진 주위로 다가온 엘레인은 걱정스런 얼굴로 아르닐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빠 혼자 힘으로 되겠어?”
“물론이야. 내가 마나가 부족한 거지,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거든.”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마나를 보유한 타고난 체질이 아르닐이라고 해도 무려 1,000여 명이나 되는 자들을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부족한 마나만 뒷받침된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원래라면 상대 쪽 마법진에도 연락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있어야 하지 않아?”
“보통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내가 하려는 건 여기에 있는 이 마법진을 이용한 텔레포트가 아니라서 상관없어.”
하긴 이 마법진은 아스터 왕국이랑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지.
그렇다면 아르닐이 할 행동은 하나다.
대형 마나석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곳에 있는 마나를 술술 빼내어 원하는 좌표로 이동한다!
“우와.”
엘레인의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무려 1,000여 명이 넘는 일행의 발밑에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환한 빛무리가 세상을 밝히고 있는 신비한 장관.
엄청 비싼 대형 마나석이 수명을 다해갈 때쯤 아르닐의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텔레포트.”
슈우욱—!
주변 공기가 확 달라지며 장거리 텔레포트를 할 때마다 생기는 약간의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그로 인해 엘레인이 살짝 몸을 비틀거리자, 휘청거리는 몸을 단단하게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앗, 고마워.”
“별말씀을요.”
엘레인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준 카론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다 문득 사위가 조용한 것을 느낀 엘레인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엥?”
뭐지. 내 눈이 잘못됐나.
왜 황궁이 내 눈앞에 있는 거지?
엘레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마침 넓은 앞마당으로 튀어나와서 망정이지 건물 안으로 텔레포트 했다면 벽 사이에 끼는 등 위험한 일이 발생할 뻔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괜찮다는 건 아니다.
지나가다 말고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기사들과 시종들에게 무어라 설명할 것이며.
밀려드는 시선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우거나 겁을 먹고 다리 사이로 꼬리를 말아 넣는 수인들의 긴장은 또 어떻게 풀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엘레인은 혼란스런 심정을 다잡고 이 일의 원흉을 불렀다.
“저기 아르닐 오빠. 플로스 영지로 안 가고 왜 여기로…?”
“응? 아, 내가 말 안 했나? 나 플로스 영지의 정확한 좌표가 뭔지 몰라.”
“뭐? 그걸 왜 지금 얘기….”
“엘레인!”
“헉!”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끼기긱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보니 대체 언제 왔는지 모를 황제가 엘레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빠?”
“아가야!”
“흐억. 할머니까지….”
저 멀리 황태후가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그간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그녀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황태후는 그대로 엘레인을 꼭 끌어안은 뒤, 뒤쪽에 서 있는 난민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가야. 저자들은 노마스족이 아니냐? 저들이 대체 왜 여기에….”
“앞으로 내 영지에서 살 수인들이에요!”
“뭐라고?”
황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쭈뼛쭈뼛 서 있는 노마스족을 훑어보고는 와락 미간을 구겨버렸다.
뭔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엘레인은 재빨리 황태후의 품에서 벗어나 황제의 허리춤에 찰싹 매달렸다.
“아빠! 저번에 지나가면서 어깨가 결린다고 했었지?”
“어깨?”
황제는 잠시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한 달하고도 몇 주 전 잠을 잘못 잤는지 어깨가 결려서 지나가듯이 말한 적이 있었지.
황제가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걸 왜 묻냐는 얼굴로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인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이거. 아빠를 위해서 내가 준비했어.”
쫙 펼친 손에는 무려 열 장의 쿠폰이 존재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확인한 쿠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딸내미 손은 약손! 엘레인 안마 이용권 10분.]
“…….”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엘레인 딴에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내서 최대한 그의 관심을 돌리려고 한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황제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때 옆에 가만히 서 있던 황태후가 투덜거렸다.
“쯔쯧.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선 채로 기절을 해.”
“???”
“…아닙니다. 기절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황제가 몸을 비틀거리면서 그리 말했다.
실로 신빙성 없는 몸짓에 엘레인의 입이 헤 벌어지자 황제가 그런 딸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저들에게는 잠시 묵을 방을 내어주도록.”
“예!”
딸내미가 준 쿠폰을 소중하게 쥔 채 그리 명령하는 황제.
일단. 천만다행이게도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듯하다.
* * *
사실 오르칼이 황궁을 떠나는 시점에서 황제는 정보부를 통해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입수해왔었다.
바로 데리러 가지 않고 지켜본 것 또한 아이들이 자력으로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는 모습에 신뢰를 가지고 조금 더 지켜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보란 듯이 목표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이루었다.
당시엔 얼마나 대견했는지….
하지만 아무리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건너서 듣는 것과 아이들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때문에 황제는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런 얼굴로 모두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자, 질문을 받은 오르칼이 그간 있었던 일을 축약하여 설명했다.
물론 여기서 오르칼은 밤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베네딕트 제국의 1황자로서 움직인 것으로 이야기했다.
첫째 아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한마디로 그 수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는 거로군.”
“마, 맞아요.”
“하지만 너무 위험했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어.”
황제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소중한 딸이 위험천만한 곳에 직접 발을 들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철렁거리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전쟁이 터진 곳이라니.
이건 단순한 걱정을 넘어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꼭 네가 갔어야 했던 일은 아니었다. 오빠들도 있고, 나에게 얘기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 하지만 아빠가 나서면 국제적 문제가 되잖아요.”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네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단 낫다.”
“네?”
엘레인은 순간 당황했다.
황제가 그만큼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몇십만 명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감수하겠다고 하다니.
몇십만 명의 목숨과 맞바꿔 먹을 뻔했던 엘레인으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 안 돼. 이대로 물러서선 파국이다.’
황제의 저 위험한 생각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을 마친 엘레인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심을 가득 담아서 이렇게 외쳤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뭐?”
“아빠가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나도 아빠를 생각해.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건 나도 싫단 말이야.”
이건 거짓 한 점 담겨 있지 않은 말이었다.
엘레인 또한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기에. 소중한 이들이 다치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리고 그런 엘레인의 진심이 황제에게도 닿았던 것일까?
바로 꾸중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긍정적 반응이라 생각하며 엘레인은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높였다.
“그리고 말이에요. 제국 서방에서 계속 수인들과의 마찰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오늘 일이 신문에 실리면 우리가 수인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이라는 걸 알려줄 수 있잖아요. 그럼 우릴 공격하는 명분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성전을 고의로 방해했다고 광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노마스족을 구하기 위해 자르크 공작령에서 식량을 좀 많이 샀다’라는 내용과 ‘재산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그들을 베네딕트 제국에서 품어줬다.’ 정도의 내용만 언론에 알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일을 벌였다는 오해도 받지 않고 내 사람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황녀는 최선을 다했다 정도로만 비춰질 것이다.
“그렇게 인구가 늘어나면 제국이 강해지잖아요. 그리고 불필요한 국방비도 줄어들게 될 거예요. 한마디로 이게 다 제국과 우리 황실의 인기를 위해서 일을 벌인 거란 이 말씀!”
엘레인은 마치 처음부터 이런 것을 노렸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지금 말한 것들은 방금 만들어낸 변명에 불과했지만, 엘레인은 만족했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답안이야.’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닌 황궁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일을 벌였다고 말하면 황제도 별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황제를 바라보는데.
“응?”
뭐, 결론적으로 말하면 황제는 엘레인의 말에 화를 풀긴 풀었다.
문제는 그에 대한 반응이 너무 과했다는 거지.
“내 딸이 나를 생각해서….”
그리 중얼거린 황제는 무척 감동한 얼굴로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물론 엘레인은 그 혼자가 아닌 가족을 통틀어서 말한 거였지만, 황제에게 그런 세세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여전히 긴장한 낯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딸을 보며 말했다.
“다들 방으로 돌아가 있어라.”
“네? 우리들 혼내는 거 아니었어요?”
“당장 너희들에게 할 말은 없다. 그러니 돌아가 있어.”
지금 황제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감정을 깊게 음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말하자 아이들은 눈치를 보다 말고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황제는 사랑스런 딸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혼자만의 사색을 즐겼다.
그리고 잠시 뒤.
서류를 가지고 온 정보 대신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폐하? 괘, 괜찮으십니까?”
정보대신의 물음에 양미간 사이를 잡고 45도 각도로 고개를 들고 있던 황제가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다행히 곱씹을 대로 곱씹은 딸아이의 말은 마음속 깊은 곳에 저장한 상태이기에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정보대신을 바라보았다.
“정보대신.”
“예.”
“우리 딸이 나를 위해서 이번 일을 벌인 거라고 했다.”
“예에?”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엘레인이 갓 지어낸 변명을 들은 적이 없는 정보대신은 어리둥절했지만, 과연 몇십 년간 사회생활로 구른 짬밥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께서 또 한 건 해내셨군요.”
“그래. 바로 그거다.”
황제는 흡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정보대신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급격하게 표정을 굳힌 그는 이내 음산한 어조로 의견을 확고히 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황녀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번에는 정말 목숨이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아이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자칫 잘못하면 큰일을 치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믿고 있음에도 뛰어난 기사들을 보내어 몰래 그 뒤를 지키게 만든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일을 잘 해낸 아이들에게 칭찬을 하기보단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는 것을 선택했다.
“엘레인에게 감시를 붙여라. 이제부터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정보대신은 얼른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 또한 엘레인의 안위가 많이 걱정되었기에 황제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라네즈와 아르닐을 따로 불러라. 할 말이 아주 많으니.”
“어허허. 아까 신이 나서 돌아가시던데 안타까운 일이군요.”
“알면서도 제 여동생을 직접 사지로 끌고 간 죄는 크지. 그리고 오르칼은….”
황제는 잠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첫째를 떠올리며 양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리기를.
“오르칼 녀석. 머리 좀 컸다고 말을 안 듣는 것 같군.”
“그, 그래도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거기까지 뛰어가서 황녀님을 모셔오지 않았습니까?”
“음. 하긴.”
엄밀히 말하자면 오르칼은 위험지대에 있던 엘레인을 픽업해서 안전지대로 데려온 공이 크다.
그러니까 얄미운 것과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정상참작을 해주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오르칼과 다르게 나머지 두 황자들은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스산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뒤로,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쌍둥이 형제는 이유 모를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