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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181/417)

181화

놀란 마음으로 집사를 바라보던 엘레인의 눈빛이 바로 차분해졌다.

‘뭔가 했더니 감자 마름병이었구나.’

감자 마름병은 한 번 번지면 일대의 감자가 싸그리 썩어버리는 무서운 병해다.

식량난을 야기하는 아주 무서운 식물 전염병이지만, 어째서인지 엘레인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안심하는 눈치이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은 회귀 전에도 발생했던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감자 마름병은 원래 이 시기에 일어날 일이었어. 그래서 태양신교 사제들을 고용해서 열심히 작물을 말리고 식량을 비축해둔 것 아니겠어?’

시기는 얼추 알아도 병해의 원인이자 시작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엘레인으로서는 이렇듯 식량난을 미리 대비하는 방법을 택했다.

식구가 늘어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이번 풍파가 지나갈 때까지는 괜찮을 정도로 식량을 아주 많이 비축해두었다.

이처럼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혀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법.

덕분에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던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피해가 얼마나 되는데?”

“제국 전체에 퍼졌기 때문에 정확한 계산은 어렵습니다. 아마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식량난이 벌어지겠지요.”

“그렇구나. 제국 전체… 뭐?”

꽤나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엘레인은 멍하니 되묻고 말았다.

‘제국 전체라니? 회귀 전에는 분명 동남쪽의 몇몇 지방에서만 감자 마름병이 유행했었는데?’

엘레인이 알기론 이번 병해는 제국 전체가 아니라 제국 일부분에만 피해를 입히고 끝이 났다.

식량난이 일어난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식량을 공급받고자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식료품 가격이 상당히 올라가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살 수 있는 방법이라도 남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병해가 제국 전체로 퍼졌다면 상황이 답이 없는 수준으로 치달아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눈치를 못 챈 거야?”

우리 영지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으며 재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영지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고 그것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곳도 모를 수가 있나?

“듣기로는 정말 아주 갑자기. 손 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졌다고 합니다.”

“장마가 온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빨리 퍼졌다고?”

“예. 빠르게 발견한 곳도 몇몇 있지만, 대부분 시기가 늦어서 감자 전체가 썩어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

엘레인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베네딕트 제국 내의 평민들이 주식으로 삼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밀과 감자였다.

그런데 그중 감자가 날아가 버렸으니 식량 수급이 반토막이 나버린 셈이다.

하필이면 이번 페른 영지에서의 밀 농사도 풍년이 아닌 상황.

짐작건대, 올해의 베네딕트 제국민은 그 어떤 때보다도 혹독한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엘레인은 혼란스러웠다.

미래가 바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보다는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우선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타국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급해서 비축한다면 크나큰 도움이 되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팍스 교단에 넘겼던 대량의 식량들을 다시 헐값에 사 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장 지불할 돈이 부족했던 그들로서는 불공정 거래를 해서라도 돈을 끌어모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다다익선이라고, 식량난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엘레인은 보존 기간이 긴 군량을 기꺼이 사들였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을 중심으로 그 군량을 헐값에 팔면 당장 식량난에 허덕이는 제국민들을 구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이건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

제국민 전체를 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엘레인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집사에게 물었다.

“혹시 최초 시작점이랑 가장 심한 지역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

“동쪽 끝의 고랭지가 둘 다 해당됩니다.”

“하필이면 제국에서 감자를 가장 많이 재배하는 곳이네….”

“그… 더 큰 문제는 감자뿐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엘레인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자 집사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감자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농작물들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감자 마름병은 오로지 감자를 죽이기 위해서 특화된 병해다.

예외적으로 토마토를 비롯한 가짓과에도 발병하지만, 감자처럼 순식간에 퍼져서 커다란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후속 조치를 취하면 그래도 주변 농작물들을 지킬 수 있을 터.

하지만 집사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식으로 작물을 지킬 수 있는 병해가 아닌 듯하다.

“원인은 모르는 거야?”

“예. 마치 땅 자체가 죽어버린 것처럼 무슨 방법을 써도 작물들이 말라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답니다.”

“…그것도 제국 전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아니요. 제국 동쪽에서부터 이상증세가 점차 퍼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나마 감자처럼 확 퍼지는 역병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기 때문에 엘레인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엘리아스의 말.

‘땅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했었지. 그게 이걸 뜻하는 거였나?’

집사가 말하길 마치 땅 자체가 죽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정황상 엘리아스가 걱정한 것이 이번 일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어쩌면 정령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어.’

하필이면 시기가 매우 잘 맞물려있다.

단순한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정령들의 실종 사건이 이번 일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지만 존재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봐야 해.’

아무도 이번 일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보통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일을 벌인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럼 이쪽으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을 불러야겠지.’

엘레인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엘레인의 호출을 받고 불려온 위블렌은 자초지종을 들으며 턱수염을 슥슥 쓸었다.

“허어. 한마디로 지금 비정상적인 형태의 병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거로군요. 하필이면 이 시기에 자연계 정령들도 사라지고 있고 말입니다.”

“맞아요.”

엘레인이 울적한 얼굴로 그렇다고 하자 턱수염을 쓸던 것을 멈춘 위블렌이 침음을 흘렸다.

“흐음. 죽어버린 땅이라…. 그러고 보니 과거 엘프들 사이에서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곤 했습니다.”

“엘프들이요?”

“예. 전해지는 말로는 검은 안개가 세상을 뒤덮으면 그 무엇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수를 뻗치기 시작할 때는 가장 먼저 자연계 정령들이 힘을 잃고 쓰러진다는 이야기였지요.”

“뭔가. 지금 상황과 많이 비슷하네요….”

“그런 셈이지요.”

엘레인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만약 엘프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면 자연계 정령들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힘을 잃고 동면 비슷한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도 최악의 사태는 아니라는 점에서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그 검은 안개의 정체는 대체 뭔가요?”

“으음. 저도 확실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나오는 검은 안개는 고대의 정령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구전처럼 내려오긴 하지만 실제로 문헌이 존재하거든요.”

“엘프들의 문헌인가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그것을 보았던 친우가 말하기를, 자연계 정령들이 힘을 잃고 쓰러지는 이유는 아마 검은 안개가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땅의 기운을 대거 뽑아내기 때문일 거라고 했습니다.”

“땅의 기운을요? 그게 가능해요?”

“뭐, 지난번 해악의 정령을 생각해 보면 말이 되죠.”

“아.”

하긴 그 녀석은 살을 깨물어 인간의 힘을 흡수하기까지 했으니까. 자연의 힘이라고 뽑아먹지 못할 게 또 뭔가 싶다.

위블렌의 예시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녀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동쪽을 기준으로 피해가 커지고 있다고 하니, 그 지역을 중점으로 찾아보면 될 겁니다. 정령을 보고 느낄 수 있는 황녀님이라면 더욱 금방 녀석을 찾아낼 테지요.”

“좋아요. 그럼 우리 바로 출발해요.”

위블렌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엘레인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의 로브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는 위블렌.

“예?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네. 대신 연기 좀 해줘야겠어요.”

“???”

뜬금없는 요청에 위블렌은 벙찌고 말았다.

* * *

준비는 별것 없었다.

빠른 이동을 위해 필요한 위블렌과 혹여나 여정이 길어질 때를 대비한 식량 가방 하나 정도.

가지고 가는 짐이 별로 없는 것만큼 고대의 정령을 해치우러 가는 원정대의 인원 또한 단출했다.

물론 여기에 엘레인의 직속 호위기사인 카론은 끼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위블렌과 달리, 카론의 경우 정령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아직 남을 제대로 지킬 자신이 없는 엘레인으로서는 그가 다칠 것이 염려되어 데려갈 수가 없는 것이다.

고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바로 카론을 떼어놓는 일이란 말씀.

“나 마탑주 할아버지랑 마탑에 갔다 올게.”

“시기가 부적절하군요. 저도 함께 따라가겠습니다.”

마탑주와 함께라면 굳이 말리지 않았던 카론이 강하게 나섰다.

이제 그도 아는 것이다.

무언가 일이 생겼을 때 엘레인이 움직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필시 그 무언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거란 것을.

그리고 그는 현재 제국을 강타하고 있는 식물 병해 사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 시기가 부적절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다른 것도 아니고 땅이 말라가는데. 내가 무슨 수를 써서 자연을 회복시키겠어?”

“아직 무엇이 부적절한지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

“어쨌든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린 엘레인은 점점 명석해지는 카론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눈앞의 그는 정녕 내가 아는 그 눈치 없는 카론이 맞나?

엘레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카론을 바라보았다.

참고로 이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그 눈치 없던 카론을 이런 쪽으로는 아주 귀신같은 감각을 가지도록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엘레인 본인이었으니까 말이다.

잠시 말문이 턱하고 막혔던 엘레인은 두 눈을 번뜩이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말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왜죠? 저는 황녀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오늘 마탑주님이 마력을 많이 써서 나 하나 데리고 왕복하기도 벅차.”

“…그게 사실입니까?”

“응? 아. 그, 그렇지?”

사나운 눈을 마주한 위블렌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위블렌을 게슴츠레하게 바라보던 카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마탑주가 원하면 그를 쏙 빼놓고 이동할 수 있는 노릇.

이번만큼은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한 카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엘레인을 향해 신신당부를 했다.

“대신 해가 지기 전에는 무조건 돌아오셔야 합니다. 만약 늦으면 지체 없이 황제 폐하께 아뢸 겁니다.”

“물론이지! 나 약속 꼭 지킬게.”

“마탑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황녀님 곁에 꼭 붙어계시면서 털끝 하나 다치는 일 없이 잘 호위해주시길 바랍니다.”

“나 마탑주야. 저하께서 다칠 일은 절대 없을 걸세!”

“후우…. 알겠습니다.”

드디어 카론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어째 주객전도가 된 느낌이지만 뭐 어떠랴.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일인데.

“그럼 다녀올게.”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고마워, 카론!”

떠나기 전. 카론을 향해 손인사를 건넨 엘레인은 위블렌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발밑을 환하게 물들이는 빛무리.

일순 풍경이 바뀌면서, 고대 정령을 퇴치하기 위한 여정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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