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417)

190화

평소 엄숙한 분위기로 회의를 진행하는 황궁의 대회의장.

그러나 오늘은 어째서인지 다들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다.

마치 축제를 벌이는 듯 밝고 환한 분위기.

그리고 이번 회의에서 가장 이슈인 안건은 단연코 황녀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황녀님께선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골머리를 앓았던 일을 이리도 단번에 해결하다니. 덕분에 제국이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난민이 수도로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이리 원만히 해결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엘레인의 활약 덕분에 폭발 직전이었던 농민과 일반 평민들은 안정을 찾았다.

식량난이 심각한 곳에서는 폭동과 더불어 도적으로 전락하는 자들이 넘쳐나서 완전히 지옥도였다고 하던데, 그러한 곳도 엘레인과 태양신교가 탄 마차가 슥 들렀다 가기만 하면 바로 원래의 착한 백성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큰일을 하셨습니다.”

“암. 정말 훌륭하고말고요.”

“허어. 다들 원래부터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황녀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단한 분이신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게지요. 황녀님께선 장차 제국의 큰 기둥이 되실 분! 이번 구휼 건도 그렇지만, 새로이 진행한다던 사업도 보시지요. 태양신교와 풍요신교의 신성력을 이용하여 작물이 마르지 않는 땅을 만들 수 있다니? 대체 어쩜 이리도 기발한 발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한 대신의 말에 다른 관료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참신한 발상.

그리고 그것을 바로 실천하는 뛰어난 행동력까지!

고작 열두 살의 어린 황녀님이 벌인 일이라기엔 너무나도 뛰어난 능력이었다.

“어쩌면 황녀님께선 1황자 전하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그럼요. 심지어 각각 분야가 다르기까지 하니, 우리 제국의 입장으로는 엄청난 호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 그렇군요. 훗날 훌륭한 외교관이 되신 황녀님과 뛰어난 정치가이신 1황자 전하의 환상적인 조합이라…. 거기에 각각 기사와 마법사의 자질이 뛰어나신 2, 3황자 저하들께서 무력까지 책임을 지시니. 세상에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겠습니다. 껄껄!”

관료들은 그 말이 내 말이라며 신나게 웃어댔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듣고 있던 상사.

더글라스 베네딕트는 참으로 요상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다들 딸의 칭찬을 해대니 어깨가 으쓱해지고 콧대가 높아진다.

기분이 좋아져서 절로 입꼬리가 들썩이는데,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딸이 너무 잘 커서 큰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그래서 황제는 관료들의 대화에 제대로 끼지 못했다.

착잡한 마음에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눈치 빠른 정보대신과 외무대신이 황제의 심정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상황 조정에 들어갔다.

“어헛! 거 조용히 좀 하시오! 지금 진중한 회의 중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다들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음?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로군요.”

그때 조용히 황녀님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보고 있던 재무대신이 안경을 척 하고 올렸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가장 먼저 참석해서 미주알고주알 황녀님에 대한 칭찬 세례를 이어나가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뜬금없이 중재를 하고 나서니 그의 입장에선 순수하게 의문이 생긴 탓이다.

“이번엔 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리도 파격적이고 혁신적일 줄이야…. 과거 식품의약안전부를 새로이 추가하게 하셨을 때도 어렴풋이 짐작하곤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백 번 칭찬을 해도 마땅한데 왜 저지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자네. 그 입 좀 다물면 안 되겠는가?”

정보대신이 더 이상 말하면 그 입을 옆으로 찢어버리겠다는 눈으로 재무대신을 쏘아보았다.

황제 폐하께선 지금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다고.

아스터 왕국에서 지금의 엘레인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차마 기뻐하지 못하는 저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고 육성으로 내뱉을 수는 없기에 그렇게 눈으로만 협박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황제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재무대신은 평소 귀신같은 눈치를 가졌던 때와는 다르게 눈치 제로의 행동을 지속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저는 제국을 위해 힘을 써주신 황녀님을 위해서라도 구휼을 처음 시작했던 날을 ‘구제의 날’로 지정하고 싶다는 안건까지 가져왔습니다. 어째서 우리의 진심을 바로 봐주지 않으시고 계속 나무라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만.”

그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좌중을 훑었다.

통탄한 얼굴로 불만을 표출하던 재무대신도.

답답함에 가슴을 치던 정보대신과 고구마 100개는 먹은 얼굴로 관자놀이를 짚던 외무대신도.

재무대신의 편을 들며 속으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던 다른 관료들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입을 딱 다물었다.

황제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좌중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

그리 말한 황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제야 무언가를 알아챈 재무대신이 조용히 감탄사를 터트렸지만, 이미 황제는 저만치 걸어간 뒤였다.

눈치를 살피는 관료들을 내버려두고 얼어붙은 대회의실에서 빠져나온 황제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거닐었다.

“하아.”

자꾸만 나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복잡한 마음으로 길을 걷던 황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은가.”

황제는 현재 일생일대 최대의 난제에 봉착했다.

내 딸이 너무 뛰어나서 문제라면 남들 눈에 조금 뛰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면 된다! 라면서 특수한 아티팩트를 사용하면서까지 여태 꼭꼭 숨겨왔건만, 이제는 정령사로서가 아니라 뛰어난 외교관 혹은 제국민 모두를 품어줄 줄 아는 선인으로 유명해지고 있다.

송곳은 주머니를 뚫는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딸이 너무 뛰어나서 문제라니.

이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크윽. 이건 모두 오르칼. 그 녀석 때문이다.”

뜬금없이 오르칼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하지만 황제 입장에선 전혀 뜬금없는 내용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여러 방면에 엘리트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나 정치질에 일가견이 있던 오르칼이다.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늠름하고 장한 아들이지만, 딸바보의 눈에는 엘레인에게 나쁜 물을 들인 원인이자 원흉이었다.

“오르칼과 함께 다니더니 변했어.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오르칼과 어울리기 전에 엘레인은 참으로 착한 아이였다.

물론 지금의 엘레인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착한 우리 애는 자신이 정치의 늪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참으로 순수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다.

본인이 자각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당장 태양신교와의 거래 건도 그렇다.

너무나 유능한 딸내미는 그 얻기 힘들다던 친구의 증표까지 얻어낸 것도 모자라 뭐든 한 가지를 이루어준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순수하게 제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태양신교와 거래를 했다.

덕분에 일이 모두 해결되고 아주 좋은 결과만이 남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제국의 행정부도 아닌 태양신교를 통해서 이번 일을 해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교적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대회의장에서 어떤 관료가 ‘훗날 훌륭한 외교관이 되신 황녀님’이라며 쉬이 장담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교는 곧 정치와 연관되어 있지.’

그러니까 결론은 모두 오르칼 때문이라는 이 말씀!

“후우. 아무래도 어느 정도 설교가 필요하겠군.”

황제는 몸을 돌려 오르칼이 있을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긋이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오, 아들아. 여기에 있었구나.”

“어머니?”

“회의 중인 줄 알았더니 벌써 끝이 났더구나. 그래서 너를 찾고 있었지.”

황태후는 어쩐 일인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 달 내내 엘레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여 우울해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싱글벙글한 표정이라니.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일은 가족과 관련된 것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황제는 조금 관심을 보였다.

“기분이 꽤 좋아 보이시는군요. 저를 찾아오신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물론이다마다. 이걸 한번 확인해 보거라.”

황태후는 웬 바구니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생뚱맞게 바구니라니.

의아함을 가득 안고 그 안을 들여다본 황제는 바구니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이 웬 편지 꾸러미들이라는 것을 깨닫곤 더욱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변했다.

“편지로군요. 이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쌀쌀맞기는. 네 딸과 관련되어 있는 건데도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일 거냐?”

“엘레인이요? 설마 이 편지들. 전부 엘레인에게 온 겁니까?”

“후후. 듣기로는 이런 걸 팬레터라고 하더구나.”

황태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의 얼굴은 뭐 씹은 것처럼 잔뜩 찌푸려졌다.

열두 살 아이에게 이름 모를 녀석들이 편지를 보냈다는 것조차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그것도 무려 팬레터라니!

아들이 속으로 짜증을 퍽 내고 있을 때, 황태후는 오히려 뿌듯해하며 말을 이었다.

“전부 이번에 엘레인에게 도움을 받은 귀족들이 보낸 거다. 생각해 보면 이번 식량난은 정말 큰 문제였지. 가만히 뒀으면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을 거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으니 저들이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황태후의 말대로였다.

만약 엘레인의 발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최소한 동부에서는 어마어마한 혼란이 야기됐을 것이며, 예상하건대 대규모 민란까지 발전해 제국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엘레인이 막았다.

그 작고 여린 열두 살짜리의 어린 소녀가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구원해준 명예롭고 고귀한 구원자에게 귀족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감사의 인사를 하겠다며 문전성시를 이루고 선물 공세를 하는 것은 기본이요, 이렇듯 감사를 담은 팬레터를 왕창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말이다.

“대체 어느 누가 팬레터에 하트를 붙인다는 겁니까?”

“음? 오, 세상에. 정말이구나. 하트. 하트가 붙어 있어.”

황제가 으르렁거리며 하는 말에, 그가 건넨 편지의 뒷면을 확인한 황태후는 정말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하트를 보곤 감탄했다.

당연하지만 황제는 그런 황태후의 반응이 썩 달갑지 않았다.

“어째서 반응이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겁니까…?”

“여기서 내가 무슨 반응을 더 해야 하는 것이냐?”

“잘 보십시오, 어머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녀석이 감히 내 딸에게 러브레터를 썼습니다! 애가 이제 열두 살인데! 이 정신 나간 놈이 지금 내 딸에게 하트를 붙여서 보냈단 말입니다!”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니냐? 아직 러브레터라는 확신도 없고…. 여기 이 이름을 자세히 보거라. 서쪽의 레그노 백작의 아들이라면 이제 열여섯 살짜리 아이인데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왜 이런 거로 그러느냐. 나는 지금 네 심중을 이해할 수 없구나.”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 귀족들이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로 엘레인의 위명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소식을 아스터 왕국의 귀족들이 접하게 된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럼 그때야말로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뭣이?”

이게 또 정신 나간 소리를 하려는구나 하고 흘려들을 준비를 하고 있던 황태후의 눈빛이 싹 달라졌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아티팩트가 있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제 딸은 정령사로서의 능력만 출중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유능해도 너무 유능합니다.”

“허어. 그러니까 네 말은 다방면으로 뛰어난 엘레인의 소문이 아스터 왕국에도 퍼지게 되면 그들이 눈독을 들일 것이다, 이 뜻이냐?”

“바로 그겁니다. 어머니께서 보시기에도. 또 제가 보기에도 아스터 왕국의 왕자는 그리 특출난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만약 그들이 정령사의 능력을 중요시하는 것만큼 왕이 될 자질을 중시한다면 엘레인은 다시금 그들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정령사의 자질을 숨겼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모든 쪽으로 뛰어난 엘레인의 소식을 저들 귀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일이….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이미 엘레인에 관한 소문은 퍼졌을 터인데.”

황태후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황제의 말대로라면 아스터 왕국 귀족들이 엘레인에게 찝쩍거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조용히 묻어버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나는 너무 늦지 않았나 걱정이 되는구나.”

“아직 아스터 왕국에 이야기가 퍼진 것은 아니잖습니까. 모든 부대를 동원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그리 말한 황제는 결연한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지옥불에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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