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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192/417)

192화

얼마 전 노마스족은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 생활을 영위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엘레인이 내어 준 땅이 있어 살 곳은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유목 생활로 인해 천막만 설치해 봤던 노마스족에게 플로스 영지에서 말하는 집이라는 것은 꽤 낯선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게르는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플로스 영지는 강수량도 많고, 천막을 좀먹을 벌레도 많으니까요.”

게다가 게르는 장작을 다량 소모하니 이 역시 문제였다. 플로스 영지를 민둥산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집 짓는 법을 알려 드릴 테니까요.”

그러나 먼저 내려와 건축 전문가로 변신한 레눔 덕분에 노마스족은 헤매는 일 없이 바로 마을 만들기에 돌입할 수 있었다.

“좋은 나무네요. 잘 말려 둘게요.”

“재단하실 때는 코와 입을 꼭 가리시고 작업하셔야 합니다!”

게다가 앞서 개간지를 만들고 있던 태양신교의 사제들이 통나무를 바싹 말려주고 목재로 재단하는 것도 조금씩 도와주었던 덕분에 노마스족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한 채씩 한 채씩, 통나무 집이 뚝딱 만들어지고 겨울이 완연해지기 전에 노마스족의 마을이 완성되었다.

의외인 것은 평생 유목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노마스족이 번듯한 집이 생긴 것에 매우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 것은.

“잠깐. 그러지 말고 송곳으로 못 길을 먼저 내면 편해.”

“어어… 이걸로 이렇게요?”

“그래 맞아. 그다음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바로 그거야!”

부지런히 할 일을 마친 필립은 유목 생활 때보다 훨씬 시끌벅적한 길을 거닐었다.

사방에는 집 짓는 것을 끝내고 슬슬 거리를 정돈하는 남자들과 가구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 여념이 없는 여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뜬금없이 가구를 만들다니.

의아할 수도 있지만, 남편과 아들이 번듯한 집을 만들어줬으니 가구는 자신들이 만들겠다는 나름의 포부가 존재했다.

처음 배우는 일이라 어려울 법도 하건만,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서 오는 재미 때문인지 다들 즐거워 보였다.

이렇듯 모두들 열정을 불태우는 반면, 저쪽 구석에서는 꽤나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 봐라? 내가 만든 거야!”

“뭐야. 고깃덩어리인가?”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엄마 얼굴이거든!?”

“헉! 이제 보니 완전 예쁘다. 내 눈이 잠깐 잘못됐었나 봐.”

“그으래…? 좋아! 이번만큼은 용서해줄게.”

아이들의 귀여운 대화 내용에 족장 필립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쪽에서 여성들이 가구 만드는 것을 배우거나 짚으로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면, 또 다른 쪽에서는 아이들이 진흙을 뭉치고 놀며 조소를 배우고 있었다.

껄껄 웃으며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 필립은 개중에서도 시커먼 진흙 뭉치를 솜씨 좋게 깎는 중인 소년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어. 이거 참 엄청난 실력이구먼.”

이제 보니 그건 시커먼 진흙 뭉치가 아니라 무른 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르다고 해도 무려 돌을, 그것도 저렇게나 섬세하게 깎아낼 수 있다니.

노마스족에 이러한 재능을 지닌 아이가 존재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왠지 모르게 생각이 많아졌다.

만약 유목 생활을 계속하며 전통에 따라 가축을 기르는 일에만 전념토록 만들었다면, 이러한 재능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평범한 목동 중 하나로 크지 않았을까…?

한 끗 차이의 선택으로 아이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릴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의 얼굴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렇게 우중충한 기분을 안고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어? 족장님?”

“앗, 진짜다. 족장님! 이것 좀 보세요. 제가 만든 거예요!”

아이들이 필립의 존재를 눈치채고 자기가 만든 물건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이나 숲속의 동물 등. 아이들이 만든 것은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실력이 가장 좋은 소년의 차례가 되었을 때 필립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엇이냐?”

필립은 눈앞의 작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뒷모습만 보았을 때에는 어린 소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고 나니, 절로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구랑 많이 닮은 것 같은데….’

그리고 필립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건 정령 여왕님이에요!”

“정령 여왕님…?”

“네! 여기는 정령 여왕님이 지켜주고 있대요. 그래서 열심히 만들어 봤어요!”

자신만만한 소년의 대답에, 필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령 여왕이 플로스 영지에 축복을 내려준 것은 그 또한 아는 전설이다.

마을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댔거든.

하지만 소년이 말하고 있는 정령 여왕님은 아마 그 전설 속 존재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영주님을 조각한 거로구나?”

“네!”

해맑은 아이의 대답에 필립은 허허 웃고 말았다.

이 아이도 아마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영주님이 정령 여왕의 환생이니 뭐니 하는 꽤나 재미난 농담을 말이다.

뭐, 지난번 성전에서 우리를 구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영주님이시니 아이들의 입장에선 전혀 농담이 아닐 테지.

어쩌면 전설 속 존재 그 이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잘 만들었다. 완전 똑같아.”

“그치? 나 이거 여러 개 만들어서 마을 주변에 세워 보려고.”

“오오! 그렇게 하면 그 조각상이 우리 마을을 지켜줄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아이들은 순수한 꿈을 키우며 꺄르륵 웃었다.

그 깜찍한 모습에 빙그레 웃은 필립은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느긋하게 산책을 나섰다.

“그나저나 벌써 겨울인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보니, 찬 공기와 함께 빠르게 흘러가는 하얀 구름과 파르르 몸을 떠는 마른 나뭇가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렇듯 슬슬 추워지는 날씨를 깊이 체감하고 있던 와중.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산책 중이십니까?”

“일이 너무 일찍 끝나서 말이야. 요즘 생긴 취미 중 하나지.”

가는 길에 아들을 마주친 필립은 머쓱하게 웃었다.

다들 바쁘게 사는 것 같은데 가축을 전담하게 된 노인들은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따라 공사 일을 도와주려고도 했지만, 녀석들이 극구 말리는 탓에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항상 바쁘게 살아왔던 필립 입장에선 꽤나 곤혹스러운 상황임이 틀림없다.

“그러는 너는 어디로 가는 중이냐?”

“도로를 깔 자재를 주문하러 가는 중입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나는 네가 참 자랑스럽구나.”

“아버지께서 칭찬이라니. 별일이시군요.”

“인석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꼭 초를 치지!”

필립은 장난스럽게 성질을 내며 아들의 등짝을 후려쳤다.

여전히 레눔은 아버지께서 장난이 느셨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필립은 꽤나 진지하게 꺼낸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간들 사이에서 번듯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면서 꿈을 이룬 최초의 케이스였으니까 말이다.

노마스족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성공의 상징이며 귀감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하여튼 몸조심해. 조그마한 사고에도 크게 다칠 수가 있어.”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눔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꼭 안전에 안전을 거듭하겠다고 말했다.

뭐, 수인족은 워낙 튼튼한 종족이니 그렇게까지 심하게 다칠 일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들의 너른 등을 두어 번 두드린 필립은 한숨을 삼켰다.

자랑스러운 아들 녀석은 이렇듯 제 할 일을 해나가는데, 정작 자신은 이리 놀고 있으니 그 차이가 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심하기는. 괜히 가축 일을 전담하겠다는 말을 해 가지고.’

가축 일은 다른 노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반 젊은이들의 카테고리에 넣었어야 했다.

필립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제 주둥이를 찰싹 때리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들 녀석에게 얼른 갈 길을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막 등을 돌리려던 순간.

와장창—!

저 멀리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면서 레눔과 필립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깨진 유리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는 인간을 말이다.

“야, 너! 이 비싼 걸!”

“헉. 죄송합니다!”

“됐고. 빨리 작업 반장님한테 가서 유리 하나 깨 먹었다고 말해. 어휴. 이게 얼마짜린데 시원하게 깨 먹냐.”

“죄, 죄송합니다!”

필립은 시끌벅적하게 구는 두 인간을 보며 꽤나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들어 노마스족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새로이 지어지고 있는 거대한 유리돔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저 비싼 유리로 뚝딱거리던데 대체 뭘 만드는 건지 모르겠네…. 레눔, 너는 저게 뭔지 알고 있냐?”

“아, 저건 유리 온실이라는 겁니다. 영주님께서 새로이 시작한 사업의 주축이 되는 건물이죠.”

“유리 온실? 영주님이 새로이 시작한 사업이라니. 그건 또 뭐냐?”

“이번에 병해 문제가 있었잖습니까. 그 때문에 지금 제국이 한창 식량난으로 난리고요. 그래서 영주님께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저 유리 온실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저 안에서는 겨울에도 작물을 키울 수 있고 병해도 없을 거라네요.”

“호오. 역시 영주님이로구먼. 신박한 발상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 이렇게 큰 사업을 하다니….”

필립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

“아들아. 혹시 지금 심어도 잘 자랄 작물이 뭔지 아는 게 있냐?”

“흐음. 조금 늦긴 하지만 보리를 심으면 잘 자랄 겁니다.”

“보리라…. 좋아, 결정했다.”

“예? 무엇을요?”

레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필립이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님께서 이리도 열심이신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 * *

며칠 동안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낸 엘레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플로스 영지로 돌아왔다.

하지만 황궁으로 갔을 때 둘이었던 숫자는 이번에 셋으로 불어나 있었다.

엘레인은 캐시를 바라보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나는 캐시 언니가 서류 정리를 잘하는지 몰랐어.”

“황녀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캐시의 말에 엘레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최근에 자리를 자주 비운 것도 그렇고 이것저것 벌여 놓은 것이 많아서 그런지, 황궁으로 떠나기 전에 책상 위는 서류 더미로 거의 점령되어 있다시피 했다.

아마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겠지.

그러한 부분을 이야기하며 한숨을 푹 내쉬자 놀랍게도 곁에 있던 캐시가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캐시는 정말로 서류 정리를 잘했다!

“진짜 다행이다. 언니 아니었으면 한동안 서류에 파묻혀 살았어야 했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으응. 꼭 기억해 둘게!”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슬프겠지만,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집사가 유능한 행정부 인원을 추가로 구하고 있는 중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지가 커지다 보니 필요한 인원도 많아지는구나.’

뭐, 그만큼 잘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럴 땐 행복한 미소를 지어야겠지.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마지막 서류의 탑을 처리하려던 그때.

“똑똑. 영주님 계십니까?”

“어? 필립 할아버지?”

“이런. 내가 바쁠 때 찾아온 건 아닌가 모르겠네.”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사이로 장난스럽게 고개를 빼꼼 내민 필립은 한창 일하고 있는 엘레인을 발견하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던 엘레인에게 그의 등장은 꽤나 반가웠다.

“아니에요. 이제 거의 끝나가던 중이라서요. 캐시 언니. 따뜻한 차 좀 부탁해.”

“아, 차는 줄 필요 없네. 할 일이 많아서 바로 가 봐야 하거든.”

천연덕스러운 필립의 말에 엘레인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할 일이 많다니.

아직 기르는 가축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리 바쁘진 않을 텐데 무슨 말일까?

엘레인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자 필립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실 이번에 내가 농사를 좀 지어 보려고 하거든.”

“네? 갑자기 농사는 왜요?”

“최근에 식량 문제로 제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영지에 받아들여 준 것도 고마운데 그 귀한 식량을 생각 없이 축낼 수는 없지 않은감. 지금 당장은 몰라도 내년 봄부터는 우리가 자급자족으로 먹고살 수 있게 보리를 키워볼 생각이야.”

“할아버지….”

필립의 말에 엘레인은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그가 이런 속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만약 어려운 일이 있다면 바로 저를 찾아와주세요. 제가 있는 힘껏 도와드릴게요!”

“껄껄.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염치없이 또 도움을 받으라고?”

“할아버지는 이제 제 영지민이잖아요. 절대 염치없지 않아요.”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도 참 고와. 든든한 빽이 있으니 마음까지 든든해지는구먼. 으허허!”

필립은 아주 간만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엘레인 또한 빙그레 웃자 뒤에 있던 캐시까지도 전염이 되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렇듯 훈훈한 분위기가 내부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을 무렵.

딱 한 사람.

저 혼자 동떨어져 있는 자가 한 명 있었으니….

‘다들 황녀님을 위해서 뭔갈 하는데 나는….’

우울한 얼굴을 한 카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황녀님께 도움이 되는 저들과 달리 그러지 못한 그는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나는 호위 기사로서 실격인가?’

그를 점차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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