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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198/417)

198화

엘레인은 바짝 긴장한 채로 황제의 뒤를 따랐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아니면 설마 제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요소가 생긴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다리는 착실하게 황제의 뒤를 따르고 있어서 오래 지나지 않아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거기 앉아라.”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엘레인은 황제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아직 내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불려왔는지 모르는 데다가 맞은편에 앉은 황제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절로 긴장되는 것이다.

그렇게 뜨거운 시선에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던 와중.

엘레인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황제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정말 잘해주었다.”

“네?”

어떠한 질책이 날아올까, 손에 땀을 쥐며 경직되어 있던 엘레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작은 등을 두드려주는 듯 나긋한 분위기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는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는 엘레인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눈을 맞추며 계속해서 말했다.

“네 덕분에 살았다. 네가 진행한 유리 온실 사업이 아니었다면 분명 올봄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겠지.”

황제는 두 눈을 감았다.

보통 사람들은 가을에 수확한 작물들을 가지고 겨우내 버틴다.

그러면 보통 봄 정도가 되면 식량이 거덜 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충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제국은 사정이 나았다.

시장도 매우 크고 농사짓는 땅도 상당히 넓어서 겨울과 봄에도 식재료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는 달랐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해로 인해 농민들은 농사를 망쳤고 1년의 노력과 결실 등. 그간 쌓아왔던 것들을 한순간에 빼앗겨버렸다.

당장 앞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것이다.

비축해 둔 식량이 없으니 그것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결국 식료품의 희소가치가 점점 높아져서 종국에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으로 바뀌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식’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레인이 건식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그해 겨울은 충분히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귀족들이 엘레인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심정이 이해될 정도로, 정말이지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말이다.

당장 물량 공세로 사람들을 구해주었다고 해도 봄이 찾아오면 어찌할 텐가.

이미 태양신교와 엘레인이 나누어준 건식품은 바닥이 난 상태고 사람들은 다시 배고픔에 허덕이며 아비규환의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다.

한마디로 봄이 찾아오기 전의 겨울은 폭풍 전야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의 엘레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궁은 물론이고 다른 영지에서도 농사를 재개하기 위해 모종을 사들이고 농경지 회복에 힘을 썼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지. 애초에 겨울이라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 별로 없었고 말이다.”

“그럼 제 유리 온실이….”

“그래. 유의미한 성과를 보인 사람은 너밖에 없다. 심지어 수확량도 상당했기에 귀족들의 입이 쏙 들어갔지”

“네? 귀족들이 저보고 뭐라고 했어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태양신교와 풍요신교의 힘을 이용해 무한으로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 때문에 몇몇 귀족들이 불신을 가졌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나오니 더 이상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입을 다물더군.”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봤자 플로스 영지라는 작은 곳에서 하는 사업인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한 번 그리고 유의미한 성과를 내보인 사람이 엘레인 자신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란 엘레인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생각하기를.

‘어쨌거나 황제는 나를 칭찬하기 위해서 여기로 데려온 거였구나?’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마 굳이 집무실로 부른 것은 아이들 앞에서 칭찬하기가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황제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이걸 받아라.”

“이게 뭐예요?”

“투자 계약서다.”

“???”

아무 생각 없이 황제가 건넨 것을 받아든 엘레인의 머리 위로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튀어나왔다.

갑자기 투자 계약서라니.

심지어 투자 금액란을 확인한 엘레인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미친. 누가 황궁 스케일 아니랄까 봐…. 이거 뒤에 실버를 골드로 잘못 표기한 거 아니지?’

엘레인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 정도로 계약서에 적힌 금액은 엄청났다.

‘아니, 만 골드면 딱딱한 빵이 대체 몇 개야?’

놀라운 마음에 눈을 비비고 또 비벼도 눈앞의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황녀가 아닌 플로스 영주에게 정식으로 요청하지. 나 더글라스 베네딕트는 플로스 영주의 유리 온실 사업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

그의 무게가 있으면서도 시선을 확 사로잡는 목소리에 엘레인은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영주로서 황제와 처음으로 하는 거래.’

지금만큼은 아빠와 딸 사이가 아니라 황제와 영주 사이의 진중한 거래였다.

두근. 세근.

한 명의 영주로서 황제에게 인정받는 듯한 그 기분에 엘레인 또한 진중한 얼굴로 그의 말에 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지원해주려는 거예요?”

엘레인은 바로 덥석 계약서를 받지 않고 이렇게 많은 금액을 투자하려고 하는 이유에 관해서 물었다.

지금의 고비만 넘기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럭저럭 회복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거금을 들이부어서 유리 온실 사업에 투자하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질문을 들은 황제는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잃지 않고 답했다.

“동부에 있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경제 능력을 잃어버린 탓에 그들은 상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하지. 단순히 식자재에 국한된 게 아니다. 봄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모종을 새로이 구입해야 하고 몇몇 상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

농작물이 병해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멀쩡한 모종을 구하기 위해선 동부가 아닌 다른 쪽에서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황제의 말처럼 몇몇 상인들이 모종값을 올려서 재미를 보고 있다면 다른 상인들도 모종값을 함께 올릴 것이고 결국엔 식료품 가격이 상한선에 고정될 위험이 있다.

“한마디로 식료품 가격을 최대한 빨리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네요.”

“바로 그거다.”

사람이 사는 데에 가장 필요한 ‘식’의 비용이 갑자기 더 든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다.

황제는 그것을 막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식량의 공급을 빠르게 늘려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 엘레인이 주도하고 있던 유리 온실의 가치가 확실하게 증명이 된 것이다.

“유리 온실은 농사에 굉장히 유리할뿐더러 놀랍게도 휴지기와 계절에 대한 걱정 없이 1년 내내 작물을 수확할 수 있지.”

태양신교와 풍요신교 사제의 힘을 이용한 농사짓기는 그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아마 황제의 투자를 받고 사업을 크게 키운다면 대륙에서 아사 걱정을 할 필요 없는 가장 풍요로운 나라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엘레인은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스런 심정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요. 일을 너무 크게 벌이면 다른 신전에서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요?”

“으음.”

황제는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사실 안 그래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던 참이다.

자기네들 딴에는 사제들이 신성한 신성력을 고작 농사를 짓는 데에 사용해도 되냐면서 뒷목을 잡고 있는데 솔직히 같잖은 말이었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다. 바로 뒤에 내가 있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허튼 트집을 잡지는 못할 거다.”

“그렇구나!”

하긴 황제가 뒤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대놓고 뭐라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엘레인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끼며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고맙다. 그럼 잘 부탁한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황제와 엘레인이 서로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서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완벽한 계약을 마치며.

황제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노마스족이 보리농사로 자급자족한다고 들었는데 잘되고 있나?”

“아! 저도 몰랐는데 그분들이 은근히 농사에 소질이 있나 봐요.”

엘레인은 플로스 영지 동쪽에 펼쳐진 황금빛 물결을 떠올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완전 풍년이지 뭐예요!”

* * *

“잘 자라서 좋긴 한데, 이거…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보리밭 앞에 선 필립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평생 유목 생활을 하며 가축을 길러왔던 노마스족은 의외로 농사에 엄청난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을 사람들에게 보리농사 짓는 법을 배운 그들은 단번에 농사를 성공해버렸다.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습니까.”

“아니. 난 보리라는 게 이렇게 잘 자라는 식물인 줄 몰랐지.”

곁에 있던 레눔이 핀잔을 주자 필립이 변명을 했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 필립은 주머니를 털어 보리 종자를 구매했는데 그 양이 아주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덕분에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노인들뿐만 아니라 봄에 쓸 가구와 물건들을 만들고 있던 자들, 레눔에게 건축에 관한 강의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던 중장년층. 그리고 플로스 영지 사람들과 어울리며 점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고 있던 청년층까지 모두 모여 보리 수확에 한창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이렇게 된 거 창고 하나 만들어줘.”

“그거야 가능은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고작 창고 하나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사람들한테 보리를 좀 팔아 볼까? 어차피 농사는 이번에만 할 게 아니라 계속해서 할 거잖냐.”

“그럼 영주님을 뵈어야겠군요. 영주님이라면 괜찮은 상인을 불러줄 테니까요.”

“그거 좋지. 그럼 당장 영주님을 보러… 응? 저기, 저쪽에 영주님 아니냐?”

마침 저 멀리 유리 온실이 있는 쪽에 엘레인이 있었다.

사제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막 돌아서려는 모습에 필립과 레눔은 엘레인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어? 오랜만이에요, 레눔 아저씨. 그리고 필립 할아버지도 안녕하세요.”

“그래, 나도 반갑네. 그나저나 잠깐 시간 괜찮은감?”

“물론이죠.”

마침 할 일도 없었던지라 엘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세요?”

“그게 말이지. 농사가 너무 잘돼서 보리를 어떻게 처리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지 뭔가.”

“와아. 그 정도로 농사가 잘된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엘레인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황금빛 바다와 그를 번갈아 보며 감탄사를 터트리자, 필립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어쨌든 이런 문제 때문에 보리를 팔아보려고 하는데, 영주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감?”

“저야 당연히 좋다고 생각하죠.”

안 그래도 황제와 식량을 대량 공급해야 하니 마니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참이다.

투자 건에 대해 풍요신교와 태양신교 사제들에게 이야기했으니 더욱 힘을 내어서 농사를 지을 테지만, 거기에 노마스족의 보리까지 더해지면 황제가 원하는 그림을 더욱 빨리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보리를 생으로 파는 게 이득이라고 해도 앞으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앞으로 제국 내에 식료품이 철철 넘쳐흐를 예정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보리를 그대로 파는 것보다 그걸 가공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만드는 편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요?”

“허어.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저 유리 온실이라는 게 있으면 사계절 내내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고 했었다.

과연….

몇 수나 앞을 내다보는 엘레인의 혜안에 감탄을 하며 필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영주님 생각엔 저 보리로 무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가?”

“음. 글쎄요.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엘레인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보리로 구수한 차를 만들어서 팔기에는 빨리 상해버릴 것이고 볶아서 판다고 해 봤자 그리 큰 이윤을 남기진 못할 거다.

보리로 대체 뭘 해야 높은 이윤을 남길 수 있을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그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눔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술을 만들어서 파는 게 낫지 않습니까?”

“네? 술이요?”

엘레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레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눔이 대뜸 필립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엘레인의 앞으로 불쑥 밀었다.

“예. 저희 아버지가 술 만드는 솜씨 하나는 대단하시거든요.”

“엥?”

“응?”

가까워진 사이에 흠칫 놀란 두 사람을 보며 레눔이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보리로 만든 술.

노마스 맥주의 탄생을 알리게 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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