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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화 (200/417)

200화

자칭 맥믈리에인 엘녹은 생각보다 강력하고 대단한 맛에 또 정신을 못 차렸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혓바닥을 톡톡 때리는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이며 시원한 바닷속에 뛰어든 것만 같은 이 청량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 콧속을 맴도는 감귤류의 쓴맛은 맥주 좀 먹어본 사람인 엘녹도 처음 느껴보는 맛이었다.

눈을 감은 엘녹은 단 한 줄의 감상평을 떠올렸다.

‘이 맥주는… 성공한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고소한 맛과 청량한 시트러스의 풍미.

그리고 혀를 때리는, 묘하게 스파이시한 느낌의 맛까지.

복잡 미묘하기는커녕 오히려 밸런스가 아주 쩔어서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뭐랄까.

자꾸만 먹고 싶은 중독적인 맛이랄까?

‘이거 완전 물건이다!’ 따위의 감상평을 추가하면서 한 번 더 술잔을 기울인 엘녹은 어째서인지 혓바닥 위로 떨어지는 게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언제 다 먹었지?”

부담 없이 꿀떡꿀떡 잘 넘어가기 때문일까?

어느새 바닥을 보인 맥주잔 안을 힐끗 들여다본 엘녹은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저… 어르신. 혹시 한 잔 더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게 마지막 잔이야. 처음부터 들고 온 양이 적었거든.”

필립은 흐뭇한 얼굴로 미니 오크통을 흔들어 보였다.

과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빈 통을 헤어진 연인을 보듯 애처롭게 바라본 엘녹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맛 평가를 하자면, 어르신. 이건 무조건 팔립니다.”

“오! 그래? 하긴 자네가 마시는 표정만 봐도 얼추 알 수 있었네.”

“아하하. 그랬나요?”

“네.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했어요.”

엘레인은 엘녹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봤다.

아마 고구마말랭이 같은 걸 안주로 함께 주면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어르신. 혹시 이거 비법이 뭡니까? 어떻게 맥주에서 이런 맛이 나죠?”

“어허. 그거야 당연히 비밀이지. 뭐,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데, 궁금한감?”

“물론이죠! 부디 제게 가르침을…!”

엘레인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필립을 바라보는 엘녹을 꽤 낯설게 바라보았다.

대체 술이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까지 간절한 얼굴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아르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상당히 놀라워했다.

“참 나. 과일주는 저렇게까지 안 좋아했으면서 맥주는 엄청 좋아하네? 맥주가 그렇게 맛있냐?”

“당연하지. 나는 맥주의 맛을 모르는 네가 참 불쌍해.”

“쓸데없이 과장하기는. 오히려 과실주의 참맛을 모르는 너야말로 인생의 절반은 손해를 봤어.”

“됐고. 그래서 그 비법이라는 게 뭡니까?”

“저게…?”

아르헤는 자신을 무시하는 엘녹의 행동에 분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마치 사탕 주길 기다리는 아이처럼 필립을 향해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그의 낯선 모습 때문인지 평소처럼 질타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필립의 말.

“비법이라고 말했지만, 별것 없어. 그냥 물맛이 좋아서 그런 거거든.”

“물맛이요?”

“그래. 원래 이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는데 플로스 영지의 물을 사용해서 그런지 맛이 더 좋아졌더라고.”

“확실히 플로스 영지의 물맛은 좋죠.”

엘레인은 열기가 팍 식어버려 허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엘녹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대단한 비법을 알려주길 원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걸 알려줘 버리면 장사는 어떻게 하나?

엘레인은 쯔쯧 속으로 혀를 차며 필립을 향해 말했다.

“어쨌든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좋으니 이제 안심이죠?”

“물론이네.”

“그럼 이제 바로 판매를 시작하면 되겠네요.”

“잠깐만요! 술을 판매하려면 황실 허가가 필수 아닌가요?”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주류는 국세의 한 축이기 때문에 허가를 꼭 받아야 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정에서 한두 병 만들어서 자기네들이 소모하는 거면 괜찮은데, 한 달에 50병 이상 생산하면 그때부턴 밀주입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요.”

한마디로 일반적인 크기의 오크통 두 통 정도만 술을 제조할 수 있고 그 기준을 넘어가는 순간 범죄자로 전락한다.

그러한 사실을 알리며 엘녹이 주의를 주자 엘레인이 팔짱을 낀 채 후후 웃음을 흘렸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허가서를 받아왔잖아요?”

“그건… 주류 판매 허가서!?”

이미 황실 문장이 떡하니 찍혀 있는 허가서를 들고 펄럭거리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주님은 준비성도 철저하시구먼?”

“이 정도야 기본이죠. 그런데 어떻게 판매할 예정이세요?”

“저번에 영주님이 말한 대로 동부에 있는 주점에 그냥 갖다 팔면 되지 않을까?”

필립은 턱을 긁적이며 대충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우울하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엘녹이 흡! 숨을 들이켜며 급발진을 했다.

“아니, 어르신! 그냥 갖다 팔면 된다니요? 이런 귀한 물건을 대충 팔다니 제정신이세요!?”

“뭐, 뭣? 갑자기 그게 무슨 폭언이야?”

“솔직히 그렇잖아요. 이만한 술을 그냥 대충 갖다가 팔다니, 그건 이런 멋진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허 참. 누가 보면 자네가 술을 직접 담근 줄 알겠어.”

나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깨달은 필립이 오묘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욕이랑 칭찬을 같이해대니 제대로 된 태클을 걸 수가 없는 것이다.

아르헤가 뒤늦게 엘녹의 귀를 잡아당기며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콧숨을 내뿜었다.

“지금 동부에 판다는 판단은 좋지만 어쨌든 그냥 갖다 파는 걸로는 안 됩니다! 더욱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해요.”

“그 체계적인 방법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후훗. 그걸 알려면 우선 맥주는 어디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겠죠.”

엘레인이 관심을 보이자 엘녹이 기다렸다는 듯이 턱을 매만지면서 무언가 있는 척을 했다.

그에 아르헤와 필립이 ‘앗. 뭔가 재수 없어.’ 따위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고작 그런 걸로 폭주한 사두마차를 멈출 수는 없었다.

반면 엘레인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면서 엘녹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으음. 술이라면 여관이나 주점, 아니면 호프집에서 팔지 않아요?”

“그래. 맞아요. 그렇다면 호프집이란 어떤 곳인지 아세요?”

“맥주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

“바로 알아맞히셨습니다. 맥주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 여관이나 다른 술도 여럿 다루는 주점보다는 역시 맥주가 메인인 호프집을 노리는 편이 아까와 같은 결과를 피할 수 있죠.”

아까와 같은 결과라 함은 맥주의 맛을 알지도 못하면서 잘도 받아먹고서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던 아르헤를 말한다.

그에 아르헤가 다시 한번 발끈하려 했지만, 엘레인의 말이 더 빨랐다.

“그, 그래서? 그 호프집을 어떻게 노리는 건데요?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요?”

“후후훗. 거기서 주정뱅이들을 오래 앉히는 방법은 정말 간단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얘깃거리 하나만 던져주면 되는 거거든요.”

“얘깃거리?”

“네. 그럼 자기네들끼리 막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맥주를 주문할 겁니다.”

그리 말한 엘녹은 지난날 자신이 들렀던 호프집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가.

그런 것 따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누군가가 그랬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다고.

그리고 그 순간 벌어진 것은 남자들의 뜬금없는 힘자랑 싸움이었다.

이렇듯 주제 하나만 던져주면 술이 들어가 알딸딸해진 사람들은 쉽게 흥분을 하고 자그마한 것에도 재미를 느끼며 오랫동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한 엘레인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맥주를 많이 팔려면 그 사람이 못 떠나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로 오래 붙잡아야 한다는 거죠? 흥이 돋으면 자꾸 술이 들어가니까.”

“바로 그겁니다!”

엘녹이 신이 나서 외치자 옆에서 내용을 듣고 있던 필립이 감탄사를 흘렸다.

“오호. 그러면 호프집마다 이야기꾼을 배치하면 되겠구먼?”

“맞아요. 이게 정석이긴 한데… 그 방법은 문제가 있어요.”

“응? 무슨 문제?”

“우리가 주점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술을 납품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이야기꾼을 일일이 다 집어넣습니까. 그렇게 운영했다가는 단숨에 적자를 면치 못할 거예요.”

“으음. 그것도 문제로구먼.”

필립과 엘녹의 고민이 깊어졌다.

엘레인 또한 생각해 보았지만, 해결책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이런 건 어떻습니까?”

여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눔이 슬쩍 끼어들었다.

뭔지 얼른 들어봅시다! 라고 쓰여 있는 얼굴로 엘녹이 눈을 반짝이자 레눔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의견을 말했다.

“얼마 전에 황녀님이 인쇄기를 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이야기꾼을 넣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실어서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야기 자체를요?”

엘레인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난센스도 아니고 그 정도로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힘들어 눈을 깜빡이니, 레눔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이야기꾼들을 통해 세상의 기이하거나 놀라운 이야기들을 모으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나의 이야기를 인쇄해서 술과 함께 납품하는 거죠. 세상엔 특이한 사람이 많으니 사례금을 주고 이야기를 계속 사면 이야기가 부족할 일도 없을 겁니다.”

“오…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그런 식으로 하면 확실히 비용이 절감되겠네요.”

엘레인이 감탄했고 엘녹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명쾌한 해답을 얻어낸 엘레인은 레눔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로 했다.

“그럼 레눔 아저씨가 말한 대로 일을 진행할게요.”

“고마우이 영주님.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돕겠네.”

“앗! 저도 있는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필립과 엘녹이 하하 웃으며 엘레인에게 말했고 뒤이어 레눔과 카론 또한 한 손 보태겠다며 나섰다.

반면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던 아르헤는.

‘맥주보다는 영주님이 주신 블루베리로 만든 과실주가 훨씬 맛있는데….’

신전 안에 고이 모셔놓은 술을 떠올린 아르헤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 * *

그날 이후. 플로스 영지의 각 벽면에는 특이한 내용의 전단지가 붙었다.

“각국에 퍼져있는 이야기꾼을 모집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니. 말 몇 번 하는 것치고 보상금이 짭짤한데?”

“오. 나도 한번 가 볼까. 나 특이한 일화 많이 알고 있는데.”

“아니, 이 사람아. 이야기꾼을 모집한다잖아. 자네 같은 농사꾼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 그게 이야기꾼인 거지 뭐.”

남자는 친구와 티격거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다들 한 줄로 쭉 서주세요! 새치기하시면 안 됩니다!”

영주성에 기다란 줄이 생겼다.

다들 벽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영주성의 심사위원들은 포용력이 대단해서 꼭 이야기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물론 전혀 주제에 맞지 않거나 허위와 과장이 섞인 이야기는 가차 없이 아웃시켰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얘깃거리를 많이 얻지 못했다.

심사위원을 맡았던 엘녹은 얻어낸 얘깃거리를 훑어보며 곤란한 듯 얼굴을 굳혔다.

“설마 이렇게까지 빈약할 줄이야…. 이 정도 내용으로는 2개월도 채 못 갈 것 같은데요?”

어차피 벽보를 붙여놨으니 사람들이 계속해서 영주성을 찾아올 테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것 또한 인력 낭비였다.

한마디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엘레인과 엘녹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한참 뒤. 문득 엘레인의 머릿속에 기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있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굳이 우리 쪽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야기를 모읍니까?”

고개를 번쩍 든 엘레인은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엘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하기를.

“왜 없어요? 이런 일에 딱 맞는 전문가가 있는데.”

그리 말한 엘레인은 어째서인지 테이블 위의 신문지를 잡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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