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417)

203화

플로스 영지에서 특이한 대회가 개최됐다.

제국을 구한 구원자로도 유명한 플로스 영지의 영주께서 직접 개최하는 대회라는 것도 흥미로운데, 내용이 무려 ‘세계에서 술을 가장 잘 마시는 사람’을 가리는 거란다.

이 대회 소식은 노마스지를 통해서 방방곡곡까지 알려졌으며, 뭇 사나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엔 충분했다.

그 결과. 대회 당일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플로스 영지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인간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인가? ‘세계에서 술을 가장 잘 마시는 사람!’ 타이틀을 쟁취하려는 도전자들이 속속 등장하는데요. 저기 좀 보십시오! 검은 곰 용병단의 단장도 보이는군요!”

“핫핫. 술 하면 이 몸이 빠질 수 없지!”

거대한 거구에 커다란 흑색 곰 가죽을 두른 남자가 호쾌하게 웃었다.

배가 커서 오크통 다섯 개 정도는 가볍게 들어갈 것 같은 비주얼에 구경꾼들은 입을 헤 벌렸다.

“우와. 이거 이미 게임 끝난 거 아니야? 저 사람 동부에서 술고래로 엄청 유명한데.”

“그래? 난 처음 보는데…. 그리고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 오히려 저런 사람이 1등을 하지 않겠어?”

한 구경꾼이 젊은 청년을 가리켰다.

참고로 그 청년은 도전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려 보였다.

하지만 농사꾼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언뜻 보기에 유명한 주당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떡 벌어진 어깨와 건강한 체격은 도전자들 사이에서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기에 왠지 모를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힘순찐의 기운이 느껴진달까.

“잠깐만. 저 사람은 태양신교의 엘녹 주교님이잖아? 사제는 원래 술 못 먹는 거 아니야?”

“쯔쯧. 그건 편견이지. 저쪽의 풍요신전 사제들은 없어서 못 먹는 게 술이라잖아.”

“그랬어? 그런데 풍요신교 사제들은 왜 안 보여?”

“듣기로는 로열 블루베리로 와인을 만든다고 하시던데. 그것 때문에 바쁜 거 아니야?”

“키야. 노마스 맥주도 그렇고 그 로열 블루베리로 와인까지 담그다니. 이러다가 우리 영지 특산품이 바뀌는 건 아닌가 몰라.”

달콤한 디저트 외에는 이렇다 할 특산품이 없어서 촌구석 마을 정도로 오해를 받고 있던 곳이 바로 이곳, 플로스 영지였다.

하지만 그러한 취급도 이젠 옛말이 되었다.

“이게 다 영주님 덕분이지. 엘레인 영주님께서 이곳에 오신 뒤로 우리 영지가 이만큼 발전한 거잖아.”

“그러게. 역시 정령 여왕님의 환생이라는 건가.”

엘레인의 정령 여왕 환생 썰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엘레인이 들으면 무척 황당해할 내용이었으나….

정령신앙이 만연한 곳에서 촌구석 영지를 이만큼이나 발전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레인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취급이었다.

그리고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엘레인은 왠지 모를 가려움에 재채기를 했다.

“엣취! …어휴. 누가 내 얘기 하나?”

“혹시 감기가 든 것은 아닙니까?”

“에이. 설마 여름인데 감기에 걸렸으려고. 그냥 단순한 재채기일 뿐이야.”

“그래도 검진을 받아보심이….”

“앗. 저기 좀 봐봐. 필립 할아버지도 등장했어.”

카론이 잔소리를 하기 전에 엘레인이 재빨리 필립을 가리켰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도 사회를 맡은 플롱 신문사 사장, 브링스가 목소리 증폭기에 입을 갖다 대더니 모두가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저기 보십시오! 노마스 맥주의 창시자가 직접 등장했습니다!”

“뭐? 저 수인이 노마스 맥주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대단해.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장인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사회자의 호들갑에 사람들이 숙덕거렸다.

마찬가지로 필립의 정체를 알아챈 도전자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수인이 노마스 맥주를….’

‘다행히 많이 먹을 것처럼 보이진 않는군. 얼굴을 알리려고 나온 건가?’

어떤 자들은 선망에 가득 찬 눈빛을. 또 어떤 자들은 위대한 창시자를 살짝 경계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마지막 도전자는….

“어? 설마 집사 아저씨도 출전하는 거야?”

“어허허. 제가 왕년에 술을 좀 많이 마셔봤거든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회장 세팅 밑 안전 점검과 참가 인원 확인 등. 여태 뒤에서 대회와 관련된 것들을 주관하고 있던 집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예상치 못한 집사의 참여 소식에 엘레인은 놀란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왕년에 술을 좀 마셔봤다니. 카론은 집사 아저씨가 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아니요. 여태 술 드시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습니다.”

“하긴. 집사 일 때문에 끊었을 수도 있겠다.”

하루 종일 영주성에 붙어있어야 하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음 집사의 생일 때 맛 좋은 술을 선물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자! 드디어 모든 도전자가 모였군요. 그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술 많이 마시기 대회.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광장을 꽉 채운 구경꾼들은 서로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쿠르르르르—.

땅이 울릴 정도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굴러오는 커다란 오크통들.

무대 뒤쪽에서 드디어 도전자들이 마실 술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익. 저게 다 얼마야?”

“둘 넷 여섯… 적어도 100통은 넘겠는데?”

도전자들의 배 속에 진짜로 고래가 숨 쉬고 있는 걸로 보는 건지 엘레인이 준비해온 노마스 맥주는 정말 많았다.

엄청난 스케일로, 이 대회가 그저 그런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킨 엘레인은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어험. 영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술이 모자라서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지 못하는 건 원치 않으니 넉넉하게 준비했답니다.”

“크으. 영주님이 뭘 아시는구먼.”

“숨겨왔던 나의 힘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어.”

술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자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엘레인 측 사람들은….

“흐흐. 내가 이래 봬도 술을 마셔온 경력이 얼마나 긴데. 애송이들을 상대로 질 수야 없지.”

“맥주 마시기라면 저도 지지 않아요. 아무리 어르신이라고 해도 절대 봐주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내가 이기면 상금을 회수할 수 있겠지. 영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에 훤하구나.”

각자의 포부가 담긴 말을 내뱉은 그들은 테이블 위로 세팅되는 잔을 꽉 잡았다.

이어서 그 위로 출렁거리는 액체를 보며 울대를 꿀렁거리길 잠시.

“준비하시고… 그럼 대결 시작!”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위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최대한 많은 술을 마시기 위해 맥주잔을 양손으로 들고 아예 들이붓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침착하게 페이스를 조절하며 꾸준하게 맥주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다들 대단한데요? 기본 다섯 잔은 그냥 들어갑니다!”

사회자 브링스의 말에 엘레인은 감탄했다.

3분이라는 시간 동안 맥주 다섯 잔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니.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 도전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이 정도 역량은 되어야 하는가 싶다.

“크으으. 내가 맥주 가지고 절대 취한 적은 없는데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빠른 속도로 술을 들이붓는 만큼 취하는 사람도 하나둘 빠르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혹여나 어떤 술주정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나서서 그들의 상태를 체크한 뒤 필요하면 끌어냈다.

그러나 만약 도전자가 억지를 부리면서 맥주를 더 마시려고 한다면?

“순순히 따라오도록.”

“히익…!”

어느새 등장한 카론이 싸늘한 눈을 부라리며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었다.

그러면 백이면 백, 만취한 도전자들은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자아! 포기하는 사람도 줄줄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생존한 도전자는 세 명으로 좁혀졌습니다! 이 셋 중 과연 누가 우승할 것인가!”

“끄응. 전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브링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사가 멋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술을 안 마셔서 그런지 주량이 팍 줄어들었다.

덕분에 오크통 한 통밖에 비우지 못한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시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와아. 집사 아저씨 진짜 대단했어. 술 진짜 잘 마시는구나.”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겨서 상금을 회수하려고 했는데….”

“엥? 그러면 사람들한테 돌 맞아. 조작이라고 욕먹을걸?”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잘 처리했겠지만… 하여튼 그 꿈은 이미 날아가 버렸으니 포기해야겠지요.”

“휴. 진짜 다행이다.”

집사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하마터면 첫 대회부터 부정을 저지를 뻔했다.

엘레인은 다음부터 집사가 이런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회장을 바라보았다.

“남은 도전자는 저 둘뿐인가.”

필립과 엘녹. 벌써 오크통 세 통을 해치우고 있는 그들은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위장에 텔레포트 마법진이라도 그려져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술을 물처럼 마셔대고 있었다.

“노마스 맥주 말이야. 도수가 낮았던가?”

“아니요. 대략 10도라고 했으니 그리 낮은 것도 아닙니다.”

“허얼. 그래서 사람들이 빨리 떨어져 나갔구나.”

노마스 맥주는 그냥 평범한 맥주가 아니었다.

스파이시한 홉과 맥아를 때려 넣은 덕분인지 일반적인 맥주보다 도수가 더 높았다.

물처럼 맥주를 마시고 있는 저들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에이. 아무리 물이래도 나는 한 잔만으로도 벅찰 것 같아.”

“하지만 만약 저게 디저트라면….”

“당연히 가능하지! 다섯 접시 정도는 뚝딱할 수 있다구.”

자신감 뿜뿜하는 엘레인의 대답에 카론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황녀님에게 디저트 다섯 접시 정도야 식은 수프 먹기지.

왜인지 유쾌해진 카론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고 있을 때.

여전히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던 둘 중 한 명이 드디어 백기를 들었다.

“으으. 역시 창시자는 못 따라가는 건가.”

“크하핫! 이게 바로 연륜 파워라는 거다, 애송아!”

어느새 오크통 다섯 통을 비운 필립이 거만하게 외쳤다.

테이블 위에 엎어져 분하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떤 엘녹은 산만 해진 배를 매만지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결과에서 도망치면 안 되겠죠. 연륜 승리. 인정합니다.”

“좋구나, 좋아! 거기 목소리 큰 친구도 들었지? 내가 이겼다고.”

“추, 축하합니다 필립 도전자님. 그럼 곧바로 노마스북에 등재하실 유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정확히 다섯 통을 비우는 데에 30분이 걸렸습니다만, 해당 시간 내에 술을 가장 많이 마신 도전자로 등록되길 희망하십니까. 아니면 계속 도전해서 세계 최고로 가장 많은 술을 마신 도전자로 등록되고 싶으십니까?”

한마디로 스피드한 쪽이냐 아니면 기존 대회의 목적처럼 용량 쪽으로 등재되고 싶냐는 뜻이다.

그리고 필립의 선택은?

“뭘 고민해? 사나이라면 당연히 둘 다 가야지!”

와아아—!

술잔을 들며 외치는 필립의 대답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세계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기 대회.

필립은 이곳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로 했다.

* * *

결과적으로 노마스북 등재 이벤트는 성황리에 끝났다. 사람들도 매우 좋아했고 덕분에 관광 수익도 천장을 뚫어버렸다.

‘이걸로 디저트 대축제 외에 플로스 영지를 찾게 만드는 이유를 또 한 가지 만들어낸 거네.’

엘레인은 흡족하게 웃으며 허리춤에 찬 돈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묵직한 것이 엘레인의 마음마저 든든하게 만들었다.

“아빠. 들어가도 돼요?”

“그래. 물론이다.”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미니, 막 신문에서 눈을 뗀 황제가 엘레인을 향해 슬쩍 웃었다.

<세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수인! 쟁쟁한 인간들을 제치고 노마스북에 등재!?>

힐끔 확인한 헤드라인에는 최근 플로스 영지에서 있었던 대회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많은 이들이 엘레인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흥미로운 이벤트가 벌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이 아주 불티나게 팔렸다는데, 황제의 손에도 그 신문이 들려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문은 드워프 도시에도 슬며시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봐, 툴란. 요즘 인간들이 재밌는 걸 본다고 해서 갖고 왔는데 내용이 아주 흥미로워.”

“흠? 그건 신문이잖아. 인쇄기라는 걸 개발했다더니 글자가 아주 정갈하군그래.”

“뭐야. 알고 있었어? 재미없게….”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 이리 줘봐.”

친우에게서 신문을 건네받은 툴란은 가장 위쪽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헤드라인을 보고 흠칫 몸을 굳혔다.

“세계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수인…?”

“아, 나도 봤어.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수인이 있다니.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친우가 ‘세상이 변했어.’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툴란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문제야?”

“그게 아니면 뭐가 문제인데?”

“이것 봐! 고작 오크통 일곱 통밖에 못 마시는 주제에, 건방지게 세계 타이틀을 달고 있잖아!”

“어?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이건 좀 어이가 없구먼.”

술 하면 드워프. 고작 일곱 통 가지고 거만하게 구는 수인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툴란은 말했다.

“나 잠깐 외출 좀 한다.”

“뭐? 너 설마 지금 거기로 가려고?”

친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툴란이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건방진 녀석들에게 진짜 술고래가 뭔지 보여주고 오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