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417)

204화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선 엘레인은 괜히 머쓱해졌다.

내가 밖에서 벌여 놓았던 일을 가족들이 신문으로 알게 되다니.

직접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간지러움이 엘레인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그거 혹시 다 읽어봤어요?”

“그래. 상당히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신문을 고이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황제는 씨익 웃으며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노마스 맥주를 유통하는 데에 딸이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매주 보는 신문에 노마스지를 출간 계획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플로스 영지의 영주, 엘레인이라고 공개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엘레인은 노마스지를 엮어서 출판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라면 역시 내 딸은 사업에도 소질이 있구나. 정도로 그쳤을 테지만, 마케팅의 귀재인 엘레인은 사람들의 경쟁 심리를 이용하여 특이한 대회를 개최.

결과적으로 플로스 영지의 관광 산업을 한층 더 위로 끌어올려 버렸다.

“하나의 소재로 이렇게까지 많은 이익을 뽑아낼 수 있다니. 이건 재무부 인재 육성의 교본이 될 일이라며 재무대신이 극찬했었다.”

“아하하… 교본이라니. 그건 너무 간 거 아니에요?”

“뭐, 나도 재무대신과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넹?”

엘레인이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반면, 자신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딸내미의 귀여운 표정에 황제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내가 보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거든.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승인하기로 했다.”

쐐기를 박는 말에 엘레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 행적들이 교본에 낱낱이 적히게 된다니.

사람들이 그걸 볼 생각을 하자 세상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황녀님….”

“?”

거절의 말을 하려던 순간.

뒤쪽에서 들려오는 울적한 목소리에 엘레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재무대신이 간절한 눈으로 엘레인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 음….”

엘레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하지만 다시 거절의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재무대신이 두 눈을 서럽게 뜨는데, 마음이 약한 엘레인은 도무지 그의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해요.”

그런 엘레인의 복잡한 심경을 모르는 재무대신은 평소의 냉철한 이미지를 날리면서까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90도로 인사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황녀님께서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모든 행정가와 관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이 재무대신이 필사의 힘을 다하여 교본 편찬에 진력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는데… 가 아니라. 방금 뭐라고 하셨…?”

재무대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본 엘레인은 희게 질린 낯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진 상태.

엘레인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를 찾았다.

“아, 아빠. 방금 재무대신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 전부라고 말한 거 맞죠? 그쵸?”

“정확히 들었다. 정말이지 좋은 아이디어야.”

“대체 어디가요?”

“너는 별로인가? 흐음. 그렇다면 역시 일대기를 담은 책을 하나 만드는 편이 좋으려나.”

“…….”

엘레인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뇌를 비우지 않으면, 황제는 혹시 자기 딸내미를 수치사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허허. 허탈하게 웃으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제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하기를.

“농담이다. 재무대신에게 적당히 하라고 일러둘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정말요?”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황제는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엘레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그제야 안심이 된 엘레인은 힘이 쭉 빠진 듯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행이게도, 네 살배기 때 처음으로 황제에게서 마카롱을 받아먹었던 그 의자는 여전히 엘레인의 몸을 푹신하게 받쳐 주었다.

덕분에 쭉 빠졌던 힘이 조금은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엘레인은 황제를 찾은 진짜 목적.

허리춤에 매달린 돈주머니를 그에게 건네었다.

“이게 뭐지?”

“내가 아빠한테 주는 선물.”

“선물… 이라고?”

황제의 두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여유롭게 앉아 기대고 있던 상체를 빳빳하게 세우기까지 했다.

‘딸아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받고 감동의 물결에 쓸려나갈 뻔한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딸아이에게 선물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챙겨줄 때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감동을 느끼고 만다.

“열어 봐도 되나?”

“물론이죠. 대신 나한테 다시 돌려주면 안 돼요. 절대로.”

“물론이다. 내 딸이 내게 준 선물인데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가 있나?”

황제는 그런 못된 아빠가 존재한다면 친히 반갈죽으로 만들어 줄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엘레인이 흡족한 얼굴로 웃자, 황제 또한 떨리는 손으로 꽉 닫힌 주머니의 입구를 열었다. 그런데.

“이건… 돈이지 않나.”

“으, 응. 사실 좀 일찍 드렸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해요.”

“무엇이?”

황제의 순수한 물음에 엘레인은 괜히 뺨을 긁적였다.

“보통은 처음 돈을 벌면 그 돈은 부모님께 붙인다고들 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제는 말문이 막혔다.

이 어린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또 언제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해서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아니다. 애초에 넌 내가 선물로 준 플로스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나. 그리고 난 이미 너에게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들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제가 준 선물이라고 해 봤자, 아빠 생신 때 드린 넥타이핀이나 깃펜처럼 저렴한 것들뿐이었는데요?”

“가격이 무슨 소용이지? 마음이 담긴 선물이야말로 진짜 선물이다. 그리고 네가 내게 준 선물은 그런 형식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황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여태 사랑스런 딸은 나와 가족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해주지 않았던가. 황가의 해묵은 오해를 청산해주고 다시 하나로 모이게 해주었으며 솔선수범하여 식량난을 직접 해결해주기까지 했다.

이렇듯 조금만 떠올려도 굵직한 것들이 나오기 때문인지 지금이 되어서 황제는 딸아이가 마늘로 쑥떡을 만든다고 해도 순순히 믿을 지경이다.

게다가.

“네 존재 자체가 내게 큰 선물인데 무얼 더 논해야 될지 모르겠군.”

황제는 더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턱을 매만지던 것을 그만두며 씨익 웃었다.

그 멋들어진 미소에 엘레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으아. 그렇게 쿨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지 말아줘!’

황제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감동적이긴 한데 면전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말을 들으니 치사량으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왜 그러지? 혹시 몸이 아픈 건가?”

“으, 아니요. 그냥 손발이….”

“손발이? 이런… 꽤 차갑군. 아무래도 몸이 따뜻해지는 차를 좀 마셔야겠다.”

황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시종을 불러낸 뒤 얼른 따뜻한 성질을 가진 차를 가져오라 명했다.

오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황제의 행동이 워낙 빨랐기에 뒤늦게 벌어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엘레인은 한여름에 온몸이 후끈해질 정도로 따뜻한 차를 배가 부를 정도로 마셔야 했다.

* * *

의도치 않게 황제의 마음을 확인한 엘레인은 더부룩한 속과 다르게 홀가분한 몸으로 영지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카론에게 약간의 자랑은 덤이다.

“아빠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뭐야.”

“음. 그건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황자님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요.”

“어? 그런 걸까?”

“예. 황궁은 황녀님이 있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들 하니까요.”

“그건 또 무슨 괴상한 이야기람.”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엘레인의 고개가 기울어지기를 잠시.

어쨌든 좋은 이야기였기에 엘레인은 해맑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응? 잠깐만 카론. 저거 혹시 마차야?”

그러던 그때.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던 엘레인의 시야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걸렸다.

단순한 마차라고 하기엔 마차의 겉면이 이상했고, 그걸 끄는 말도 마갑으로 중무장하고 있어 조금 수상했기 때문이다.

“저건… 혹시 철로 만든 걸까요?”

“철이라면 너무 무겁지 않을까? 보통은 마차 끄는 말한테 무거운 갑주 같은 건 안 입히잖아.”

엘레인의 말대로 짐마차용 말은 무거운 마차를 끌어야 하기에 가급적 무게를 더해주지 않으려고 신경 쓰기 마련이었다.

가끔 마차를 꾸미듯 말도 꾸미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충 가벼운 것을 달고 다니지 저렇게 딱 봐도 무거운 갑옷 따위를 착용시키지 않는다.

“설마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는 건가? 아니면 전쟁터를 뚫고 지나온 무역 상인?”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가겠지만, 현재 전쟁이 터진 곳은 없습니다.”

“에이. 그러면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을 뚫고 왔나 보네.”

엘레인은 대충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제 갈 길을 가려던 엘레인은 제 목적을 이행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요상한 마차가 플로스 영주성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우리 성으로 오는데?”

“수상합니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것이….”

“어? 멈췄다.”

엘레인의 말에 카론은 입을 다물었다.

주군의 말씀대로 마차는 급정거를 하듯 영주성과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뭐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런 마차를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알아챌 수 있었다.

저 특이한 마차의 마부석에는 마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 잠깐. 카론. 마부석에 마부도 없는데 마차가 저 혼자 움직인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카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레인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상식적으로 방금 말이 멈춰선 건 누군가의 명령이나 제어 없이는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조금 전에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듯이, 다들 동일한 타이밍에 걸음을 멈췄으니까 말이다.

“어! 다시 움직인다.”

엘레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마차 안에서 땅딸막한 누군가가 내리더니 그대로 고삐를 잡고 마차를 출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마차는 여전히 방향을 바꾸지 않고 영주성을 향해 직진을 해왔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부석에 마부가 있고 그 속도도 일반적으로 바뀌었다는 점 정도?

“아무래도 날 찾아온 것 같은데. 누군지는 전혀 짐작이 가진 않지만 말이야.”

영주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님일 수도 있지만, 일이 끝날 때까지 다른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굳이 대낮에 영주성으로 당당히 다가오는 마차라면 분명 그곳의 주인인 엘레인에게 용건이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수상한 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얼른 가 보자.”

괜히 늑장을 부리다가 경비병들이 쫓아내 버리면 어쩌나?

솔직히 어떻게 마부 없이 마차 조종이 가능한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에게 굳이 갑옷을 입힌 이유도 궁금했기에, 간만에 호기심이 잔뜩 동하는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뒤.

“뭐야. 드워프 처음 봐?”

영주성 앞에서 마주한 마부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훠이훠이를 시전했다.

그러다 돌연 저들이 영주성 문을 열고 나온 것을 떠올리며 드워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희들 저기서 나왔지? 그래서 여기 영주님은 어디에 있나?”

님 앞에 있는데요.

엘레인은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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