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417)

207화

평등과 정의의 신인 리브라를 모시는 집단.

일명 정의신교.

그곳의 대주교인 저스티스는 최근 기분이 아주 나빴다.

“사회의 모범의 되어야 할 사제가 저급하게 농사를 짓고 있다니. 이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치료 능력이 확연히 달라지는 중급 사제들부터는 나름 귀족 대접을 받고 다닌다.

그런데 태양신교와 풍요신교 녀석들은 어떠한가?

중급사제와 고위급 사제들은 물론, 주교들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이지 품격이 떨어지는 작자들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가 있는 거지? 그만큼 돈에 미친 녀석들이라는 건가?”

저스티스는 작금의 상황이 매우 통탄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로 인해 더욱 찡그려졌다.

“돈으로 따지면 우리도 장난 없지 않나?”

“그러니까 말이야. 도토리 키 재기지 뭐.”

“이… 무엄하게 누가 대주교가 말하는데 끼어들어!?”

“헙. 죄송합니다.”

부들부들. 분노로 점철된 얼굴로 소리를 지르자 뒤에서 속닥거리고 있던 주교들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눈치 없는 녀석들을 오랫동안 째려봐준 저스티스는 눈가에 경련이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어쨌든 사제가 농사 따위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들을 고귀한 고급 인력이 아닌, 흙 정도는 묻혀도 되는 저급 인력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니 녀석들도 최소한의 품격이라는 것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이야!”

대주교의 의견은 합당했다.

적어도 정의교단의 주교와 사제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우리들의 의견을 밝혔는데도 저쪽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잖아요.”

“계속해서 언론을 이용해 비난해야지. 다른 교단들 또한 우리와 생각이 같을 테니, 녀석들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올 수밖에 없을 거다.”

저스티스는 언론의 힘을 잘 알았다.

그것을 이용하여 놈들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실추시킨다면 그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겠지.

“그럼 지금 당장 우리들의 입장을 표명….”

“대주교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고위급 사제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기분 좋게 떠들던 말이 뚝 하고 끊겨버리면서 대주교의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지만, 그는 평등과 정의의 신인 리브라를 모시는 남자. 저스티스!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버릇없는 부하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회의장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 것이야?”

“죄, 죄송합니다. 매우 급한 일이라….”

뒤늦게 자신의 죄를 알아챈 사제가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봤다.

덕분에 화가 잔뜩 나 있던 대주교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급하다면서 말을 계속 끄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구나. 용건만 빠릿하게 말하라.”

“네, 넵! 프레티움 영지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내용은 ‘몬스터의 대거 침입으로 영지의 남쪽이 궤멸당했다. 당장 사제들을 파견해 달라!’라고 합니다!”

“뭐라…?”

중형급 영지의 남쪽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저스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언론으로 조지기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듯하다.

* * *

어쩌면 큰일도 아닌데 영주가 오버한 게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저스티스의 예상대로, 도착해 보니 정말로 그다지 위급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천천히 오길 잘했어.”

그의 입에서 쯔쯧. 혀 차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반파된 건물이 많긴 했지만 대부분 미미한 경상을 입은 환자들만 보일 뿐. 생명이 위급해 보이는 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영주가 과장해서 사제들을 불러 모았다고 결론지은 그는 이미 도착해 있는 교단의 사제들을 살폈다.

“뭐야. 풍요신교에 태양신교도 먼저 도착해 있었잖아?”

심드렁한 얼굴로 면면들을 살피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정의신교가 늑장을 부리고 있을 때 지체 없이 달려와서 급한 환자들을 차례대로 처리해왔던 영웅들이지만, 저스티스의 눈에는 그저 영주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빠릿하게 달려온 속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수 없기는. 너희들도 얼른 일을 시작해라.”

대충 붕대만 감아주면 나을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무언가 하는 척을 해야 했다.

정의신교 사제들에게 일을 시킨 후, 대충 주변에 있는 사람 한 명씩 골라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이 녀석들은 공짜로 치료를 받는 거잖아? 프레티움 영주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았으니….’

예기치 못한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 사제들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 의무가 있다.

이번 같은 경우에도 갑자기 많은 몬스터들이 쳐들어온 것이니 재난 상황이 맞다.

그렇다면 치료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손해였다.

‘이거 하나 치료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얼마인데, 저것들을 모두를 공짜로 치료해주라고?’

심지어 그는 오늘 하루 수익을 포기하고 변방의 영지까지 찾아온 것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에 본단에 있었더라면 본전이라도 찾지. 그다지 위급하지도 않은 일에 이렇게 달려와서 손해를 본 것을 생각하니 뒷골이 다 땅겼다.

“그리고 저놈들….”

저스티스는 괜히 화살을 돌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태양신교 사제들을 노려보았다.

제일 먼저 왔으면 지쳐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그 말도 안 되는 모습에 저스티스는 단정 지었다.

‘저놈들. 감히 농땡이를 피워?’

애초부터 저들은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하하호호 웃고 떠들 수 있는 거겠지.

그런 다음 다른 교단에 일을 맡겨 놓고 계속해서 놀 생각일 터다.

우린 소임을 다했다고 해버리면 현장을 확인하지 못한 영주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갈 테니까.

“영악한 놈들. 내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이유는 없었기에 저스티스는 당장 태양신교 측에서 보낸 사제들을 실컷 부려 먹어주기로 했다.

물론 대주교나 되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쉬이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거기 일 다 끝났으면 저쪽에 가서 계속 치료해.”

“지금 뭐 하고 있지? 지금 물 마실 시간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고 있나?”

“뭐? 저쪽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내가 보기엔 이쪽이 더 심각해 보인다! 잔말 말고 여기부터 빨리 치료해!”

저스티스는 남들 치료할 시간에 태양신교 측 사제들에게 딱 달라붙어서 이래라저래라 온갖 간섭을 다 해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럴수록 지치는 것은 저스티스뿐.

어째서인지 태양신교 사제들은 저스티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도 지친 기색이 별로 없었다.

‘괴물 같은 녀석들.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부려먹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지? 아무리 고위급 사제들이라고 해도 신성력이 남아돌지 않을 텐데.’

저스티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분개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직접 묻지는 않았다.

만약 그들에게 질문했다면, ‘이것이 바로 농사와 식품 건조로 다져진 능력치 차이라는 것이죠!’ 따위의 말로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을 테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었다.

“왠지 내가 손해를 보는 느낌인데.”

옆에서 열심히 간섭해댔던 자신은 이렇게나 지치는데, 놈들은 어째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신성력뿐만 아니라 체력도 괴물인지, 저스티스는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영지민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태양신교 녀석들을 분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일 다 끝났으면 얼른 돌아가지 왜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어?”

“어, 뭐. 그렇죠?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끝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농사를 건너뛰어야겠네.”

저스티스는 멀어지는 태양신교 사제들을 보며 귀를 의심했다.

오늘 미친 듯이 일을 해 놓고 또 농사지을 생각을 한다고?

비리비리했던 예전 모습과 달리 알짜배기 근육이 슬쩍 보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괴물 같은 체력을 보유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게 판단한 저스티스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것들. 혹시 흑마법을 이용해 몸을 개조한 거 아니야?’

실로 그럴듯한 내용에 저스티스의 입꼬리가 절로 들썩였다.

드디어 놈들의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짜증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조금은 밝아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정의신교 대주교님?”

“음? 그대는 누구인가?”

“프레티움 영주님을 모시고 있는 종입니다.”

“오오, 그렇군. 그분께서 뭐라 하시던가?”

저스티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리고 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예상을 빗겨나가지 않았다.

“영주님께서 오늘 수고하신 사제님들을 모두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호오? 바로 가면 되는 부분인가?”

“예. 따라오시지요. 영웅들을 위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스티스는 흡족한 얼굴로 오늘 하루 동안 수고해준 사제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태양신교 사제들은 이미 떠났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고작 다섯 명 정도 자리를 비워도 상관은 없었기에 그는 희희낙락하여 영주의 저택에 입장했다.

“오오! 우리들의 영웅! 나의 영지민들을 구해주어서 고맙네!”

“하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네. 고작 그런 말로 넘어갈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었네. 몬스터를 물리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놈들이 남기고 간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다친 사람이 무려 일천은 가볍게 넘겼지 않았나. 듣기로는 다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냈다고 하던데, 이 정도 말로는 오히려 부족하지.”

“아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겸손하구나, 겸손해. 그런 자네에게 내 맛 좋은 술을 대접하지. 자. 얼른 한 잔 들게.”

“아. 죄송합니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술을 금하고 있어서요.”

“그런가? 으음. 그거 아쉽군그래.”

영주. 지오 프레티움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와인잔에 어두운 루비색 와인을 쪼르륵 따랐다.

슬쩍 향을 맡아보니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와인과 다른 향이 났는데, 그 특이한 향에 저스티스의 시선이 절로 와인병으로 향했다.

“특이한 향이로군요. 처음 보는 와인병인데 어디서 만든 것입니까?”

“음? 요즘 유명한데 몰랐는가? 아. 하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지.”

화들짝 놀라 묻던 지오 프레티움은 뒤늦게 그럴 만한 이유를 떠올리고는 허허 웃었다.

“이건 말일세. 로열 블루베리로 만든 와인이라네.”

“로열 블루베리라면… 플로스 영지의 영주가 직접 관리하고 재배한다던 그 블루베리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와인을 만든 자들이네. 놀랍게도 플로스 영지에 있는 풍요신전 사제들이 이 와인을 만들고 있지.”

“예? 지금 사제들이 술을 담그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껄껄! 자네도 놀랐지? 맛도 뛰어나고 만든 이도 특이해서 그런지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아주 핫하다네.”

지오 프레티움이 하하 웃으며 와인병을 흔들었다.

그에 황망한 심정이 된 저스티스는 뒤늦게 와인병에 떡하니 붙어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플로스 영지의 영주 얼굴임을 깨달았다.

‘이런 미친….’

그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플로스 영지에서 시작된 유리 온실 농사.

그리고 플로스 영지에서 만드는 로열 블루베리 와인.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건 플로스 영주 때문이다.

모든 중심에 플로스 영주가 있었던 것이다!

‘감히 이런저런 짓을 벌였겠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저스티스는 두 눈 가늘게 떴다.

이걸로 그가 해야 할 행동이 확실하게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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