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3/417)

224화

자르크 공작령 앞.

텔레포트 마법진 앞에서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오르칼과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엘레인.

너무 놀라 입술을 뻐끔거리던 엘레인은 파업 선언을 하려는 멘탈을 애써 다잡았다.

“오빠? 진짜 오르칼 오빠야?”

“그럼. 진짜지. 우리 동생이 많이 놀랐나 보네.”

오르칼은 끝까지 엘레인의 말에 맞춰주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따뜻한 손길과 표정은 무척 상냥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엘레인은 황태후를 제외한 가족들 몰래 신성제국으로 온 거니까!

“진짜 오르칼 오빠였구나. 근데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차피 혼나는 미래는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온 건지나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물어본 건데….

“그게… 타이밍을 놓쳐서.”

“응?”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타이밍? 무슨 타이밍?”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오르칼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엘레인은 이미 오르칼의 얼굴에 번진 우울함을 목도한 뒤였다.

무슨 일로 그러는 거지?

엘레인이 그의 상태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 무렵.

오르칼은 여동생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잠시 회상했다.

***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황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던 오르칼은 그림자가 가져온 뜻밖의 소식에 펜을 멈췄다.

“할머님께서 플로스 영지로 가셨다고?”

“예. 아침 신문을 보고 몹시 대경실색하시더니 곧장 플로스 영지로 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사 결과 정보대신도 함께 데려갔더군요.”

“흐음. 그분이 그러실 분은 아닌데.”

황태후는 손녀를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직접 초대를 받지 않는 이상 먼저 플로스 영지로 찾아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갈급히 걸음을 옮기다니.

게다가 중간에 정보대신까지 낚아채서 갔다는 것도 여러모로 수상했다.

“할머님께서 보셨다는 신문이 뭔지 조사해봐. 그리고 엘레인과 할머님의 동태를 살펴라.”

“알겠습니다.”

오르칼은 여느 때처럼 그림자를 비롯한 블랑슈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는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약 두 시간이 흐른 뒤.

“큰일 났습니다. 황녀님께서 신성제국으로 향하셨습니다.”

“뭐라고?”

믿을 수 없는 내용에 오르칼의 미려한 눈썹이 크게 튀어 올랐다.

사랑스런 여동생이 다른 곳도 아니고 그 먼 신성제국으로 향했다니.

자연스럽게 이전에 벌어졌던 성전 사건을 떠올린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쥐어, 펜대의 허리를 반으로 부러트렸다.

“분명 할머님이 함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지? …이해할 수 없지만, 조사한 내용을 들어보면 모두 알게 될 일이지.”

평정심을 되찾은 주군의 말에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는 조사한 내용을 차례대로 읊었다.

“우선 황태후 전하께서 보았던 신문을 입수했습니다.”

“이건….”

그림자에게서 신문을 건네받은 오르칼은 실로 오랜만에 진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감히 내 여동생에게 큰 상처를 입히다니….”

신문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마음이 여린 아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게 되었으니 얼마나 커다란 상처로 다가왔을까?

“할머님께서 급하게 달려가신 이유를 알겠군. 또한, 정보대신을 데려간 이유도.”

이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면 바로 전쟁이다.

물론 진짜 전면전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축소시켜 이 일을 계획한 자의 3대를 멸하는 것으로 그치겠지만, 신성제국이 이를 모르고 넘어갈 리는 없었다.

마탑주를 고용하거나 희귀한 정령사를 데려와 땅의 기억을 읽어내는 등.

어떻게든 흔적을 추적하여 결국 베네딕트 제국이 한 짓임을 알아낼 것이니.

결국, 신성제국과의 전쟁은 예정된 사실인 것이다.

“정의신교는 물론이고 만신전이 엮여 있으니 더욱 끈질기게 추적할 테지. 정보대신을 데려간 것은 한동안 아버지의 귀를 막기 위함이로군.”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정보부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으니 정보대신이 없어도 조만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음은?”

“황녀님께선 아무래도 이번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의원들을 모을 예정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어.”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는 오르칼은 엘레인이 무슨 이유로 의원들을 모으려는 건지 단번에 파악했다.

이후 그림자에게서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들은 오르칼은 툭. 투욱.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들겼다.

그리고 잠시 뒤.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오르칼이 부러진 펜대를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칙칙한 로브를 입혀주는 등.

그림자의 수발을 받으며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 오르칼은 입매를 굳혔다.

황태후가 텔레포트 스크롤을 주었다고 했으니, 서둘러 뒤따라가야 했다.

“우선 그곳으로 간다.”

“이동하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자마자 오르칼의 곁으로 다가온 그림자는 곧바로 최고급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으며 원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는 놀란 눈을 치켜뜨고 있는 놈들에게 명령했다.

“긴급 상황이다. 간부들은 지금 하던 일들을 전면 중단하고 모두 집합하라.”

“허억!”

“밤의 왕께서 오셨다! 빨랑빨랑 움직여!”

신성제국의 어두운 뒷면.

그곳의 중심에 오르칼이 나타나자 카르텔 길드원들은 난리가 났다.

오르칼은 빠릿빠릿하게 모여든 간부들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내 동생을 보호하는 일이다.”

“예…?”

“황녀님께서 신성제국에 오셨습니까?”

“…이리 소식이 늦다니. 직무유기인가?”

“!?”

간부들의 입이 딱 다물려졌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직무유기라니.

억울하지만 여기서 대꾸했다간 바로 모가지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황급히 고개를 내젓자,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기기라도 한 건지 그 뒤로 오르칼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평가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엘레인에 대한 정보를 알자마자 곧바로 이곳을 찾아온 오르칼은 당연히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는 간부들을 쓸모없는 놈 취급을 하며, 조만간 이곳을 물갈이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말하지 않겠다. 너희들은 신성제국에 있는 모든 카르텔 길드원들을 각 지부에 집결시키고 명령을 기다리라 전해라. 그리고 너는 현 지부에서 당장 쓸만한 암살자들을 차출하고 지부장은 베네딕트 제국에 이번 일이 들어가지 않게 정보를 통제해라.”

“알겠습니다!”

마지막은 좀 의아했지만, 지부장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각각 간부들이 허둥지둥 방 밖으로 빠져나가자 곁에 선 그림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제 폐하께 보고 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굳이 알려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군. 할머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으니까.”

주군의 말에 그림자는 순순히 납득했다.

뭐,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닌 듯하지만 말이다.

“쓸만해 보이는군.”

시간이 흘러 간부 하나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암살자 부대를 데리고 왔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오르칼은 시커먼 옷에 복면을 쓴 암살자 부대를 이끌고 의원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막상 도착한 의원 마을에는 엘레인이 없었다.

“이미 떠난 건가…. 이봐, 너희들.”

“어엉? 뭐야 이 샌님같이 생긴 놈은.”

“지금 우릴 부른 거냐? 시건방지게.”

정의신교의 사주를 받아 의원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깡패들은 칙칙한 옷을 입고 있는 오르칼에게 성큼 다가와 눈알을 부라렸다.

옆에 똑같이 새까만 옷을 입은 성인 남성이 서 있긴 했지만, 키만 멀대같이 클 뿐.

근육 빵빵한 자신들에 비해 너무나도 약해 보여서 신경도 안 썼다.

“내가 꽤 건방졌나 보군?”

“그럼, 꼬마야. 으른한테 반말을 찍찍 내뱉는데 착하다고 해주리?”

왼쪽 바닥에 침을 찍 뱉은 깡패1은 소년의 관자놀이 부근을 쿡쿡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 순간.

뿌드득—.

“우아아악!”

“헉! 뭐, 뭐야!”

어느새 그들 주위를 에워싼 수십의 검은 복면의 남자들.

감히 주군께 내밀어진 더러운 손가락을 가뿐하게 부러트린 그림자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깡패1과 바짓가랑이에 실례를 저지른 깡패2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가볍게 만져줘. 알아야 할 게 있으니 혀는 뽑지 말고.”

바닥을 기던 깡패1과 축축한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깡패2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의원 마을 뒤쪽에는 울창한 숲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으슥한 산속에서 놈들의 비명을 들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프탄 백작령의 수도인 건가. 바로 출발한다.”

오르칼의 명령에 그림자를 비롯한 암살자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온몸의 관절이 뒤틀린 채 숨만 겨우 쉬는 깡패들을 깊은 산속에 내버려둔 채.

서둘러 다음 장소로 이동한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아비규환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의원들과 엘레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눈을 감아라.”

“?”

지붕 위.

멀찍이서 엘레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를 잠시.

느닷없는 오르칼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암살자 부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르칼은 여동생이 일으키는 기적을 처음으로 목도하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조용히 내리눌렀다.

“역시 내 동생이군.”

이후 오르칼은 계속해서 엘레인의 주위를 맴돌며 혹여나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사주경계를 했다.

하지만.

“저놈은 누구지?”

갑자기 나타나서 엘레인에게 친한 척 구는 소년이 등장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녀석의 등장에 오르칼의 속은 당시 카론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은 오르칼의 타는 속도 모르고 풍요신전의 지원 요청은 물론이거니와 정의신전의 잠입 작전까지 엘레인과 함께 했다.

“…….”

“놈에 대해서 조사할까요?”

“…아니. 그건 나중으로 미룬다.”

당장 놈에 대해서 알아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엘레인의 안위가 더욱 중요하다.

오르칼은 혹여나 엘레인의 작전이 틀어질 것을 대비해서 정의신교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계속해서 사주경계를 했다.

그러나 여동생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탓일까?

엘레인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목적을 이룬 채 유유히 정의신전을 빠져나왔다.

“이미 어엿한 정령사로 성장한 건가.”

결국, 도와줄 타이밍을 놓친 그였지만, 동생이 혼자서 잘 해내는 모습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하지만 그런 그의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 깨져버렸다.

“저건 또 뭐지?”

새로운 놈이 나타났다.

이번에야말로 엘레인을 돕기 위해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오르칼은 팡파르를 울리며 나타난 화려한 사두마차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신성제국의 황태자? 파티장에서 한번 마주친 게 다인 녀석이 어째서 엘레인에게 친한 척하는 거지?”

“조사해 볼까요?”

“그래. 일이 끝나면 아까 그 녀석도 함께 조사해라.”

오르칼은 심기 불편한 얼굴을 했다.

차양막 아래로 들어가는 엘레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림자에게 명령을 내린 오르칼은 불현듯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내가 나설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오르칼은 절망했다.

여동생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인데 이걸 놓쳐버리다니.

엘레인이 위험하면 등판하려고 뒤에서 스텐바이하고 있던 오르칼은 결국 무한 대기만 타다가 집으로 돌아갈 상황에 처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함께 온 암살자 부대와 오르칼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각 지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블랑슈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음.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라.”

“…예.”

암살자 부대를 돌려보낸 오르칼은 한동안 좌절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상황에 이른다.

“…….”

“오빠?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 응.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엘레인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토록이나 가슴 아팠던 것일까.

그답지 않게 잠시 멍을 때리던 오르칼은 휘휘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웃었다.

“어쨌든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원하는 일은 잘 해결된 거니?”

“그으렇긴 한데….”

“왜 그래? 무슨 다른 문제라도 있어?”

오르칼은 이번에야말로 엘레인에게 큰 도움이 되겠노라 다짐하며 두 눈을 빛냈다.

그런데 신은 정녕 그를 버린 것일까.

“혹시 아빠도 이거 알고 있어?”

이어지는 엘레인의 말에 오르칼의 몸이 덜거덕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있잖아, 엘레인.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

엘레인은 갑자기 저를 꼭 안아주는 오르칼의 모습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듯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며 시선을 돌리는 것도 그렇지만….

‘그거 아까 했던 말인데?’

엘레인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오르칼은 말 돌리는 데에 그리 큰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