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황제와 황태후의 극적인 합의 끝에 엘레인의 사교계 데뷔 방침이 정해졌다.
참고로 황태후는 곧바로 손녀를 데리고 주기적으로 여는 다과회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다과회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절 교육을 먼저 받기로 한 엘레인은 교육 지도사를 만나기 전에 카론을 불렀다.
“경은 먼저 플로스 영지로 돌아가 있어 줄래?”
“저 먼저 말씀입니까…?”
“혹시라도 내가 교육받는 사이에 의원님들이 도착할 수도 있으니까, 경이 집사님한테 미리 얘기해서 영주성에 그 사람들이 지낼 공간을 좀 만들어줘. 병원 설립 계획도 추진해주고.”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응. 그럼 수고해줘!”
엘레인은 카론에게 손인사를 건넨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교육을 받아야 되겠지.
황궁 예절을 알고 있는 지금 굳이 다과회에서 지켜야 할 예절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혹여나 황태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은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기에 교육을 받아두는 편이 좋았다.
‘다과회에서 지켜야 할 예절이라고 해 봤자 몇 가지 규칙이 추가되는 것일 뿐일 테니까. 금방 끝날 거야.’
어쩌면 반나절 만에 끝날지도 모른다.
카론을 먼저 보낸 건 너무 오버한 건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히죽 웃은 엘레인은 예절 교육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저는 오늘부터 황녀님의 예절 교육을 맡게 된 코랄 클리네입니다. 편하게 코랄 부인이라고 불러주시지요.”
“앗. 안녕하세요, 코랄 부인. 저는 엘레인이라고 해요.”
약속 시각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읽고 있던 책을 우아하게 덮은 여인이 곧바로 인사를 해왔다.
엘레인이 안경을 척 추켜올리며 말하는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하자, 코랄 부인의 깐깐한 인상이 슬쩍 풀어졌다.
“듣던 대로 귀엽… 아, 아니. 정말이지 고귀해 보이시는군요. 그럼 곧바로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아, 넵!”
중간에 뭔가 익숙한 눈빛을 본 것 같은데….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열정적인 학생처럼 힘차게 대답했다.
코랄 부인은 그런 엘레인의 행동에 깊이 감명받은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짝짝! 손뼉을 쳤다.
“황녀님께선 이미 기본예절을 숙지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대해 굳이 확인해 볼 필요는 없겠지요?”
역시 말이 통하는 선생님이시다.
엘레인이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종 한 명이 커다란 이동용 트레이를 끌고 등장했다.
“맛있는 냄새….”
“하지만!”
엘레인이 입맛을 다시며 이동용 트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단호한 목소리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니, 코랄 부인이 단호박 열 개 정도는 먹은 얼굴로 엄격하게 말했다.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간식을 아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번 챙겨 드실 정도로 말이지요. 제 말이 맞습니까?”
“어… 그렇긴 한데 그게 왜요?”
“황녀님께서 과자를 탐하시느냐 마시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황태후님의 다과회에서 나오는 디저트는 모두 플레이팅용이기 때문입니다!”
쿠쿵—!
코랄 부인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엘레인의 뒷배경으로 번개 하나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아닌 척해도 다과회에서 나올 과자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던 엘레인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했다.
“그럴 수가….”
“하지만 안심하시지요.”
“?”
좌절하려던 엘레인은 뒤이어 들려오는 부인의 말에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코랄 클리네가 황태후님의 다과회에서 과자를 탐하지 않도록 황녀님의 인내심을 제대로 길러드리겠습니다!”
“허억!”
과자를 탐하지 않도록 인내심을 길러주겠다니.
딱 봐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흠칫한 엘레인은 곧이어 활짝 열리는 은색 돔을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쿠, 쿠키로 만든 산!?”
“후후후. 이건 베네딕트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디저트 가게에서 주문한 초절정 인기 신메뉴. 촉촉한 초코칩 쿠키랍니다. 당연히! 여기 있는 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되겠죠?”
“말도 안 돼…!”
엘레인은 절망했다.
눈앞에 이렇게나 맛있는 초코칩 쿠키가 있는데 정작 저 맛깔나는 것을 먹지 못하다니!
엘레인은 충격으로 떨리는 눈을 슬쩍 들어 의지로 가득 찬 코랄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단호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코랄 부인.
“참고로 일주일간 제 일정을 싹 비워뒀으니 한동안 황녀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훈련을 할 수 있답니다. 정말 잘됐죠?”
“!?”
달콤한 냄새를 퍼트리기 위해 부채를 꺼내든 코랄 부인은 마지막 희망까지 깨부쉈다.
* * *
코랄 부인의 예절 교육은 그녀의 호언장담대로 일주일이나 진행됐다.
그동안 일일 과자량을 조절 당한 엘레인은 디저트에 굶주린 야수가 되어버렸지만….
겉으로 내색할 순 없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얼른 하고 과자를 실컷 먹어야지.’
하루에 디저트 500g에서 1,000g 정도는 뚝딱하는 엘레인이 달랑 쿠키 하나로 제한당해 버렸다.
그 덕분에 머릿속에서는 ‘과자. 당분. 과자. 당분.’ 따위의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다과회에서 실례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내가 이런 쪽으로의 인내심을 기르게 될 줄이야.’
역시 카르넬의 말대로 사교계는 아주 무서운 곳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연회장의 파티처럼 신경 써서 드레스를 차려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다과회에서 과자를 먹지 못하는 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엘레인은 빨리 일을 볼 요량으로 옷차림을 확인했다.
“이런, 아가야. 낯빛이 창백해 보이는데, 괜찮은 것이야?”
“그냥 조금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한편, 엘레인이 정확히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는 황태후는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당연하지만 난리가 난 위장 상태를 알려줄 수 없는 엘레인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음을 피력하면서 황태후의 손을 꼭 잡았다.
“전 괜찮으니까 우리 얼른 출발해요.”
“으음. 괜찮다고 하니 일단 출발은 한다만…, 만약 계속 긴장이 되거나 속이 안 좋으면 나에게 말하려무나. 너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사교계에 일찍 데뷔시키고픈 마음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손녀딸을 만인에게 자랑하고 싶어도 황태후에겐 엘레인의 건강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앞서 귀부인들에게 손녀딸을 모임에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펑크내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의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고 하면 곧바로 돌아갈 기세였다.
그렇듯 걱정 가득한 황태후의 말에 엘레인은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첫날부터 몸이 불편하다고 일찍 돌아가 버리면 그야말로 황태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는 사이.
문지기의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드디어 굳게 닫힌 문이 활짝 열렸다.
동시에 환한 빛무리 속에 그대로 삼켜진 엘레인은 잠시 뒤 적응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초록빛 공간에 깊이 감탄했다.
‘와아. 다과회용 유리온실을 새로 지었다더니. 이거 생각보다 더 엄청나잖아?’
각각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식물들과 순백의 티테이블 및 의자들.
그리고 고아하게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 귀부인들까지.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마법은 엘레인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전부 제쳐놓고서라도, 엘레인의 시선을 압도적으로 강탈하고 있는 것은 단연코 티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디저트들이었다.
여기도 디저트. 저기도 디저트!
이 맛있는 걸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니!
‘이건 나한테 엄청난 고문이야….’
엘레인은 원통했다.
일주일간 과자를 굶은 야수 엘레인은 당장 저기에 있는 디저트를 하나씩 맛보라고 속삭였지만, 배운 엘레인은 필사적으로 악마의 속삭임을 떨쳐내었다.
본능과 이성의 치열한 싸움.
벌써부터 한계가 온 엘레인이 덜거덕 걸음을 멈췄지만,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귀부인들은 그런 엘레인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어머나. 정말로 황녀님을 데려오셨네요?”
“세상에나. 어쩜 이리도 귀여우실까? 세간에 퍼진 소문이 절대 과장된 게 아니었네요!”
황태후와 상당히 친한 사이인지 귀부인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덕분에 그 사이에 낀 엘레인이 심히 당황해하자, 황태후가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흠흠. 칭찬은 고맙지만, 그보다 먼저 소개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정신 좀 봐. 저는 크린 케이트예요.”
“저는 스콜라 푄드라고 한답니다. 편하게 스콜라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크림 케이크랑 쇼콜라 퐁듀요?”
“…?”
두 귀부인의 소개에 멍하니 그들의 이름을 읊조리던 엘레인은 당황해하는 부인들의 얼굴을 보고 제 실수를 깨달았다.
“어, 그러니까 방금 건 농담이었어요, 농담!”
“아하. 농담이었군요? 사실 황녀님께서 제 과거를 아는 게 아닌가 하고 꽤나 놀랐답니다. 크림 케이크. 그거 제 어릴 때 별명이었거든요.”
“어머? 그쪽도 그러셨어요? 저도 쇼콜라 퐁듀로 불렸었는데. 오호호!”
다행히 두 부인은 엘레인의 실수를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서로 과거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두 부인을 뒤로한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네.’
일주일간 과자를 굶은 상태에서 달콤한 향기가 수시로 코끝을 간질이니,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 나갔다.
무시무시한 무의식의 세계에 부르르 몸을 떤 엘레인은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괜찮느냐?”
“당연하죠. 앞으로 한참은 거뜬할걸요?”
황태후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엘레인은 태연하게 괜찮은 척을 했다.
여전히 달콤한 냄새에 군침이 돌긴 했지만, 나는 불굴의 엘레인!
이런 고난 정도는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고작 30분 전에 했었는데 말이야.’
모두에게 인사를 마치고 난 뒤.
푹신한 소파에 앉은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파이팅을 외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인들에게 정신없이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했던 엘레인은 결국 황태후의 의견에 따라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고작 인사 한번 하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일 줄이야.’
어른들에 비해 짧은 다리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던 것도 문제지만, 시도 때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디저트의 시각적, 후각적 공격에 정신력 또한 빠르게 소모되었다.
꼬르륵—.
마침 눈치 없는 배가 배꼽시계를 알려왔다.
아까부터 찻물로 배 속을 채우고 있긴 했지만, 일주일이나 참아온 배 속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아우성을 내질렀다.
맹물 같은 찻물 말고 달콤한 것을 줘! 얼른!
마치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배를 감싸며.
엘레인의 상체가 테이블 위로 풀썩 쓰러졌다.
‘으… 이제 진짜 한계야.’
사실 엘레인으로서는 참 오랫동안 참아온 셈이었다.
유일한 취미이자 행복한 시간을 반강제적으로 빼앗겼으니 인내심은 길러냈어도 정신력은 심각하게 마모됐다.
네 살배기 무렵 마카롱 금지령을 받았을 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인지….
엘레인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1km 반경 내에 있는 영롱한 디저트들에 시선을 주었다.
닿을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아련한 눈빛.
그 시선은 참으로 애달파서 알게 모르게 엘레인을 주목하고 있던 부인들의 가슴을 사무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글픈 눈빛을 보내고 있었을까.
엘레인의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우더니 달콤한 쿠키 바구니가 코앞으로 내밀어졌다.
“이것 좀 드시겠어요?”
“어? 아만다 부인?”
싱긋 웃는 아만다와 눈앞에서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는 쿠키 바구니.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최근에 결혼한 새댁이라고 했었던가?
아만다는 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빙그레 웃었다.
“기억해주셔서 영광이에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이것 좀 드셔보시겠어요? 황녀님은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입맛에 맞지 않은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닌데… 할머니의 다과회에서 디저트는 플레이트용이 아니었어요?”
“후후. 그렇긴 하지만 황녀님은 예외랍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죠?”
“물론이지요!”
“황녀님만 좋으시다면 여기에 있는 거 다 드셔도 돼요!”
아만다의 말에 어느새 다가온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원래 규칙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먹으면 안 되는 것이지 디저트를 먹는 행위 자체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다 보니 점차 디저트를 먹지 않는 것이 관습처럼 굳어져 버렸지만….
굳이 작은 황녀님에게도 관상용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부연 설명을 들은 엘레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 그럼 지금까지 제가 했던 훈련들은…?”
“예? 훈련이라뇨?”
엘레인은 차마 아만다 부인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며 그동안의 훈련 과정들을 떠올렸다.
달콤한 쿠키에 손이 갈라치면 쓰읍!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호통 소리.
‘안 돼!’
‘어허. 기다려!’
그 엄청난 유혹 속에서도 꾹 참아내며 일일 과자량을 제한당해 왔건만, 정작 코랄 부인이 말하는 규칙은 꼭 지킬 필요도 없는 관습이란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굴 위해서 이런 고통을 받아온 것인가?
엘레인은 질문에 답하기 전에 바구니 안에 있는 쿠키 하나를 집어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주르륵.
“헉. 화, 황녀님.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는 건가요?”
“흐눼엥. 마시써여….”
엘레인은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오물거렸다.
잃어버린 일주일 끝에 베어 문 쿠키는 빌어먹게도 아주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