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황궁 마법사들의 이동 마법 덕택에 순식간에 드워프 도시의 입구에 도착한 엘레인 일행.
그들은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웅장한 성벽을 보고 감탄했다.
“우와. 황녀님! 성벽이 엄청 예쁜 은색이에요! 우리 얼굴이 그대로 비치는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혹시 돌이 아니라 은괴 같은 걸로 성벽을 쌓은 걸까요?”
베일리와 앨리스가 신기하다는 듯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회색 벽으로 쌓은 성벽만 봐온 그들에게 이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건 아니고. 스테인리스강이라는 합금을 외벽에 코팅해서 연마한 거래. 외부에서 침입할라치면 혼란스러움을 야기할 수 있다나?”
“하긴 은으로 만들면 빨리 변색되어버리겠죠.”
“맞아. 그리고 와아아! 하면서 떼거리로 달려오면 순간적으로 적군 아군이 분간 안 될 것 같기도 해요.”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해서 몬스터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으니까.
드워프의 성벽 코팅의 성능은 이미 입증된 바이다.
“그나저나 역시 드워프인 걸까요. 손재주가 엄청 좋네요.”
“내 말이. 나 순간 거울인 줄 알았잖아.”
“제 눈엔 그다지….”
“응?”
호들갑 떠는 목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엘레인은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언제 불편한 소리를 내었냐는 듯 캐시는 입을 꾹 다물고 평소처럼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다.
‘잘못 들었나?’
머리를 긁적인 엘레인은 이내 성벽 입구 쪽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가자. 일주일 뒤에 황궁 마법사들이 여기 이 장소로 마중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진 신나게 놀자.”
“앗싸!”
베일리가 신이 나서 들고 있던 짐을 번쩍번쩍 들었다.
엘레인은 베일리가 성급하게 달려가기 전에 얼른 뒷말을 이어붙였다.
“물론! 그러려면 툴란 씨를 먼저 찾아가야겠지?”
“앗. 툴란이라면 예전에 황녀님을 초대하겠다던 그 드워프인 거죠?”
“맞아. 드워프 도시는 워낙 길이 복잡해서 드워프의 길 안내를 받는 편이 좋아.”
“아하. 그럼 얼른 툴란 씨를 찾으러 가요!”
베일리는 아무렴 좋다는 듯 신이 나서 말했다.
온천만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면야.
그렇게 쓰여진 얼굴로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으니, 데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쪽으로 따라와. 대신 드워프가 뭐라고 하든 가만히 있어야 된다?”
“네!”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들떠 있는 베일리와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남은 이들에게도 확답을 받아내고 성문 앞으로 이동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드워프 경비병들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앞을 막아섰다.
“뭐냐, 인간들.”
“좋은 말로 할 때 썩 꺼져라.”
베네딕트 제국의 황실 마법사도 아니요, 재료 조달을 하러 온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매번 이곳을 드나드는 인간은 거의 정해져 있기 때문에 드워프 경비병들은 대놓고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니, 황녀님께 지금 이게 무슨…!”
“잠깐만.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하지만 황녀님. 저 드워프들이 너무 무례하게 굴잖아요.”
베일리는 씩씩거리면서 드워프 경비병들을 가리켰다.
분명 황녀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저들은 여전히 창을 거두지 않았다.
빨랑빨랑 꺼지기를 요망하는 드워프 경비병들을 분에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베일리.
그에 엘레인은 더 늦기 전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건 뭐지?”
“초대장이요. 드워프 왕께서 제게 보낸 초대장이에요.”
엘레인의 말에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낸 그들은 우선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앞뒤로 살펴본 드워프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잖아?”
“왕의 옥새가 찍혀있어. 거짓말은 아니군.”
드워프 경비병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리면서 초대장의 진위를 밝혀냈다.
그리고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말하기를.
“이거 실례가 많았군.”
“얼른 들어가라.”
“…그게 끝?”
베일리는 어이가 없어졌다.
최소한 사과를 하든가 좀 더 고개를 숙이든가 해야 하는데 저들의 건방진 태도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기분 나빴던 것일까?
여태 무표정이던 캐시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오만함에 기가 질려서 그럽니다. 당신들 종족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군요.”
“뭐라고? 넌 뭐 하는 녀석인데 우리 종족을 싸잡아서 욕하는 거냐?”
“지금 우리랑 해보자는 거야?”
천성이 거칠고 자존심이 높은 드워프.
그런 그들을 벌레 보듯 노려보며 혀를 쯧 차는 캐시의 모습에 엘레인은 무척 당황했다.
“죄송해요. 우리 언니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언니도 이제 그만해.”
“염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는 내가 아니라 드워프들한테 해줬으면 하는데….
엘레인은 허허.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파닥거리며 다급히 주제를 돌렸다.
“있잖아요! ‘툴란과 몰디스’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세요?”
“거긴 왜…. 설마 자네! 그분과 아는 사이인가?”
“물론이죠. 저번에 같이 술잔을 나눈 사이인걸요.”
“아닛! 그걸 먼저 말해주셨어야지!”
엘레인의 신분이 황녀라는 것과 드워프 왕의 초대를 받고 온 손님이라는 사실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들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었다.
그 광경에 앨리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베일리를 지나쳐서 엘레인에게 성큼 다가왔다.
“황녀님! 술 마셨어요?”
“쉬잇. 나 말고 필립 아저씨랑 술잔을 나눈 거긴 한데, 어쨌든 친구 먹은 건 사실이니까 상관없어.”
“아하. 드워프들은 친구 사이를 술잔을 나눈 사이라고 말하나 봐요?”
“응. 드워프가 인간과 친구를 먹었다는 것 자체가 인정받았다는 거니까.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태도가 바뀐 거야.”
“오오. 그런 거였구나. 황녀님 되게 똑똑해!”
앨리스가 안도하고 베일리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마치 엄청난 사람을 보는 듯한 베일리의 눈빛.
회귀 전의 경험 덕분에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엘레인은 그저 멋쩍게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툴란 님의 친우라면 모른 척할 수 없겠지.”
때마침 저쪽에서도 결론이 났는지 비장한 얼굴로 성문 옆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성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어서 따라오게. 내 친절히 길을 안내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엘레인은 냉큼 드워프 경비병의 뒤를 따랐다.
일행도 뒤를 바짝 쫓아오자, 드워프 경비병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와아. 저기 좀 봐요. 마차에 마부가 없는데도 알아서 잘 가요.”
“그새 상용화됐나 보네. 저거 툴란 씨가 개발한 마차야.”
“정말요? 그 툴란이라는 드워프는 엄청난 발명가인가 봐요.”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드워프 도시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회귀 전보다 일찍 찾은 드워프 도시에는 불의 정령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도 이 정도로 많지는 않았는데. 운디네 상태도 조금 이상한 것 같고.’
-무우….
엘레인은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운디네를 머리 위로 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그냥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다는 말만 하고 축 늘어져 있을 뿐이다.
‘불의 정령들이 많아서 그런 건가? 온천에 가면 조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나마 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 간다면 운디네도 기운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
엘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바로 여깁니다.”
“와아. 상당히 커다란 곳이네요.”
엘레인은 목을 꺾어야 보일 정도로 커다란 건물을 보고 감탄했다.
역시 왕족이어서 그런가?
옆 건물과 비교했을 때 툴란의 대장간은 무척 거대하고 튼튼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안내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엘레인은 길 안내를 해주느라 수고한 경비병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들여다보려던 순간.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드워프가 그들을 발견하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응? 인간이잖아?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있지?”
저 사람이 바로 툴란과 함께 일한다는 몰디스인가?
엘레인은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허억! 저, 저건 유명한 인간이잖아!?”
“네?”
악수를 건네기 위해 손을 뻗던 엘레인은 황당한 그의 발언에 손가락을 오므렸다.
유명한 인간이라니….
드워프 도시에서도 내 얼굴이 찍힌 신문이 퍼진 건가?
인간을 싫어하는 그들이 인간들의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역시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랑 얼굴이 똑같아.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엘레인이 의아해하든 말든 몰디스는 신문을 꺼내어 얼굴을 대조했다.
그 황당한 장면에 다들 어처구니없어하고 있는 그때. 엘레인이 머쓱하게 웃으며 오므렸던 손을 다시 펴서 내밀었다.
“몰디스 씨 맞죠? 툴란 씨랑 같이 일하신다는….”
“히익! 유명한 인간이 나한테 말 걸었다!”
…그런데 어째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안에 들어가서 툴란을 만나고 싶은데, 저렇게 입구를 떡하니 막고 있으니 그조차도 불가능해 보였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다행히 소음을 들은 툴란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엘레인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아니, 너는 그때 그 영주잖아? 그러니까 엘….”
“엘레인이요. 생각해 보니까 제 이름은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딱히 상관은 없지. 신문에서 자주 나오니까.”
툴란은 그렇게 말하면서 ‘히익! 유명인이랑 눈을 마주쳤다!’라고 외치는 몰디스를 가리켰다.
아,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던 신문을.
“드워프 도시에서 신문이 돌아다니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원래는 극히 소수만 찾아서 봤는데 인쇄기의 발명을 시작으로 인간들의 신문을 보는 드워프들이 조금 늘었어. 저 녀석처럼 꾸준히 찾아서 보는 건 좀 특이한 경우고.”
하긴 인쇄기의 등장으로 드워프 도시에 때아닌 발명품 열풍이 불었다고 했었지?
툴란의 설명에 엘레인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우리 도시가 그렇게 궁금했었나?”
“네? 툴란 씨가 저를 초대한 거 아니었어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툴란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엘레인은 경비병에게도 보여주었던 왕의 초대장을 툴란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거 보세요. 드워프 왕이 생일 초대를 하면서 툴란 씨를 언급했어요.”
“뭐야. 진짜잖아?”
곧바로 내용을 확인한 툴란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녀석이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네 얘기를 한 건 사실이지만 초대를 해 달라고 한 적은 없어.”
“어…. 사이가 그렇게 좋진 않나 봐요.”
“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지.”
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이거 미안하게 됐군그래. 생일 파티에 가 봤자 지루하기만 할 텐데…. 내가 괜히 네 얘기를 꺼내서 형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괜찮아요. 어차피 진짜 목적은 드워프 도시 탐방이라서. 일주일 동안 여기서 열심히 놀 생각이거든요.”
“그렇다면 잘 됐군. 대부분의 인간들은 온천을 좋아하던데, 사과의 의미로 그곳의 명물을 맛보여주지. 물론 돈은 내가 다 낼 테니까 부담 없이 팍팍 먹으라고.”
“야호!”
툴란이 통 크게 쏜다고 말하자 뒤에 있던 베일리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몰디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만, 툴란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저 녀석 원래 잘 놀라. 인간한테 관심은 많으면서 왜 저렇게 겁을 내는지 원.”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장간 안쪽을 가리켰다.
“어쨌든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바로 안내해줄게.”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엘레인과 일행은 기쁜 마음으로 대장간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