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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화 (233/417)

234화

새하얀 로브를 입은 소년은 엘레인을 보자마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보이는 얼굴은 놀랍게도 신성제국의 황태자였다.

‘뭐야. 황태자였잖아? 왜 카르넬로 착각했지?’

그렇게 자문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후드로 가려져 하관만 보이는 것이 카르넬과 닮았기 때문이다.

엘레인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멍하니 있는 사이, 황태자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안녕하세요. 예상대로 오셨네요.”

“네?”

엘레인은 땡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나 보고 조만간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 얘기했었지.

그 말은 오늘의 만남을 미리 예견했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네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요. …어떻게 안 거예요?”

“별건 아니고 저에게 초대장이 날아올 당시 황실 내에서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거든요.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소녀도 초대할 예정이라고.”

“네? 저는 그런 거 없는데요?”

“왜 없으시겠어요. 황녀님께서 대단한 상재라는 건 이미 온 대륙에 소문이 난 상태인데.”

황태자의 말에 엘레인의 얼굴이 순간 화악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최근 꽤 많은 일들을 했었지.

인쇄기나 노마스주. 로열 블루베리 와인 등.

대륙에 있는 사람들을 단번에 매료시킬 만한 물건들을 자꾸만 내놓는 엘레인은 제3자가 봤을 때 엄청난 상재임은 틀림없다.

심지어 그걸 만드는 데에 동참하기까지 했으니 사람들 눈에 엘레인은 대단한 천재로 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말을 듣고 더욱 호기심을 보였었지. 아마 저 황태자가 하는 말이 맞을 거다.”

툴란도 하하 웃으며 엘레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덕분에 더욱 얼굴이 붉어진 엘레인을 보며 황태자는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이상한 부분이 있죠. 정말 호기심이 동한 거라면 바로 초대를 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타이밍에 부른 걸까요.”

“그것도 그러네…?”

황태자가 의문을 표하자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레인의 얼굴 또한 진지해졌다.

그의 말대로 진심으로 엘레인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면 더욱 빨리 부를 수도 있었을 터.

굳이 황태자를 부른 이 자리에 나를 부른 이유가 뭘까?

“뭐, 정확한 건 생일 파티 때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겠죠…?”

엘레인이 영 찝찝하다는 얼굴로 묻자 황태자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선하게 웃는 새하얀 소년과 의문을 밀어두고 어색하게 웃는 엘레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그 둘의 모습에 기어코 뒤쪽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이건 무조건이다. 무조건 밀고 나가야지.”

“쓰읍. 조용히 해. 넌 이런 데에 와서까지 그런 소릴 하고 싶니?”

“하지만 이건 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림이라고. 당장 내 컬렉션에 담고 싶은데 못하는 게 한이다 증말.”

“제발 그렇게 해줘. 그렇지 않으면 너 감옥 간다.”

베일리가 군침을 흘리면서 두 눈을 반짝였고 앨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베일리가 참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댔다면 황실 모독죄로 감옥에 갔을 테지.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내용에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황태자 또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질문했다.

“뒤에 저 사람들은…?”

“아. 베일리 언니랑 앨리스 언니예요. 어렸을 때부터 저를 돌봐줬던 사람들이죠.”

“그렇군요. 사이가 꽤 좋아 보이네요.”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째서인지 캐시를 힐끗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

쓸데없이 산뜻한 그의 미소에 캐시가 양미간을 살며시 좁히자 황태자의 시선이 다시금 떨어져 나갔다.

“그나저나 유리 온실 사업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라면 허락받았어요. 베네딕트 제국은 신성제국과의 계약을 속히 체결할 예정이에요.”

“좋은 소식이로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요.”

엘레인과 황태자는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각 제국의 정상은 아니지만, 그 다음가는 실세라고도 할 수 있는 자들의 계약 현장이었다.

하지만 어른스러운 그들의 대화 속 내용과 달리 그들은 엄연한 어린이.

뒤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베일리와 앨리스는 두 사람이 아주 귀여워 죽을 지경이다. 뒤쪽에서 꺅꺅 숨죽여 비명을 지르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엘레인은 황태자에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뭘 보고 있던 중이었어요?”

“아. 저쪽에 드워프 도시의 명물이 있어서 말이죠. 바나나 브레드 푸딩이라고….”

“바나나 브레드 푸딩!?”

가장 먹고 싶었던 디저트의 등장에 엘레인의 눈에서 별이 쏟아졌다.

잔뜩 기대감 어린 눈으로 툴란을 바라보니, 그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맞아. 저쪽이 바로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파는 가게야. 지금 당장 들어가 볼래?”

“당연하죠!”

엘레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툴란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멈칫.

“같이 갈래요? 그쪽도 맛이 궁금해서 거기 서 있었던 거 맞죠?”

“그렇긴 한데….”

“그럼 같이 가요. 저번에 도와준 것도 있고, 제가 쏠게요!”

엘레인은 방긋 웃으며 황태자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엘레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황태자는 당황해하는 성기사들에게 대충 손을 휘저은 뒤, 엘레인의 곁에 제대로 서서 걸어갔다.

“있잖아, 베일리.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완전 그림이네.”

“그치? 어휴. 사진을 못 찍는 게 천추의 한이라니까.”

이상하게 심기가 불편한 카론과 캐시와 달리.

앨리스와 베일리는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엘레인의 뒤를 따랐다.

황녀님께 저런 멋진 친구가 있었을 줄이야….

이걸 이제 알게 되다니.

인생의 반은 손해 본 느낌이다!

저것 봐라. 대화 내용도 깜찍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바나나 브레드 푸딩 위에 초코 시럽을 뿌려 먹는 게 좋아요, 아니면 연유 뿌려 먹는 게 좋아요?”

“으음. 둘 다?”

“이야. 몰랐는데 그쪽, 배우신 사람이네.”

“하하. 그런 칭찬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참 신선하네요.”

엘레인의 진심 어린 칭찬에 황태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엘레인은 어리둥절했지만, 모두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기사 측은 약간. 당혹스러움이 꽤나 묻어나긴 했으나 어쨌든 평화로운 분위기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러한 평화를 산산이 부숴버리는 존재가 등장했으니….

“오 이런.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님과 신성제국의 황태자님이 아니신지요?”

“딜런 아스터…?”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이것 참 영광입니다.”

엘레인이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스터 왕국 기사들을 끌고 나타난 딜런 아스터가 삐뚜름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얼굴로 그리 말한 딜런은 황태자와 엘레인이 서로 잡고 있는 손을 힐끗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날 그렇게 엿 먹이고 지들끼리 꽁냥거리고 있었다 이거지?’

그동안 실패를 맛보고 아버지에게 얻어맞기까지 하며 아주 오랫동안 근신 처분을 받았던 그였다.

말이 근신이지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했던 그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고 저 둘에 대한 증오와 분노 또한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물론 그건 자신을 감금한 아버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 그의 목표는 독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서 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베네딕트 제국과 신성제국을 박살 내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서 드워프 왕의 초대를 받은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호를 명목으로 질 좋은 무기를 우선적으로 거래하는 권리를 얻은 베네딕트 제국과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신성제국.

모두들 당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드워프 왕에게 속삭여준다면, 그는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간질 후 나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렇게 한다면 드워프 왕의 신임을 얻을 수도 있겠지.’

드워프는 항상 재료 부족에 시달린다.

그중 가장 부족한 건 단연코 철이었고 베네딕트 제국에 알리지 않았지만, 최근 아스터 왕국에서 대량의 철이 매장되어 있는 광산이 발견됐다.

드워프 왕이 절대 거절하지 못하는 매력적인 조건을 내세워 그들을 서서히 우리 아스터 왕국의 편으로 만든다.

나중에 가서 그들은 결국 우리 아스터 왕국의 든든한 지원자로 변모해 있겠지.

신성제국과 베네딕트 제국과는 단단히 척을 지게 될 테고 말이다!

“…음흉하게 웃고 있네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상대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습니다.”

딜런의 성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엘레인이 눈살을 찌푸렸고 황태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딜런 아스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제대로 된 인사도 받아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시를 당한 딜런이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실컷 비웃어 둬라. 조만간 내 발밑을 기게 될 테니.’

딜런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병먹금을 시전하기로 한 엘레인과 황태자를 스산하게 노려보면서.

그는 휘황찬란한 미래를 꿈꾸었다.

* * *

딜런 아스터의 등장으로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맛보지 못한 엘레인은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애써 환하게 웃으며 앨리스 일행에게 다녀오겠노라 말한 엘레인은 숙소를 나오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걔는 왜 왔는지 모르겠네요.”

“아스터 왕국의 왕자라고 했지? 속이 시커먼 녀석이야.”

툴란의 말은 아주 정확했다.

속이 아주 시커메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를 녀석이지.

물론 딱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건 바로 나와 황태자에 대한 적의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있잖아요, 툴란 씨. 혹시 드워프 왕이 인간들을 초대하는 기준을 알고 있나요?”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잘 몰라. 워낙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드워프라서 말이야.”

툴란의 말에 엘레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녀석이 초대받은 이유라도 알면 조금은 속이 후련해질 텐데 말이다.

“이럴 땐 단순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카론이 넌지시 얘기를 꺼내자 엘레인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다시금 초롱초롱해진 엘레인의 눈빛에 카론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쩌면 그저 거래를 위해서 부른 걸지도 모르지요.”

“아하. 엉덩이가 무거운 아스터 왕 대신 딜런이 대신 온 거구나?”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으음. 만약 그런 거라면 드워프 왕은 상당히 귀차니즘이 강한 성격이겠네. 황태자도 만나고 싶고 나도 보고 싶고 아스터 왕국이랑 거래도 하고 싶고. 셋 다 하고 싶은데 따로 부르기 귀찮아서 생일날 한꺼번에 부른 게 되어버리잖아?”

“흐음. 형님이 조금 그런 성격이긴 하지만 중요한 일을 그렇게 처리할까 싶군그래.”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네요.”

엘레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은 그를 직접 만나보면 모두 알게 될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그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역시 말을 해야겠지?’

엘레인은 성기사들을 이끌고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황태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안한 얼굴로 말하기를.

“죄송해요. 바나나 브레드 푸딩은 나중에 사줄게요.”

“전 괜찮습니다. 남는 게 시간이거든요.”

“그 말은… 혹시 그쪽도 생일 파티 끝내고 온천에 갈 생각인 거예요?”

“꼭 온천이 아니더라도 드워프 도시를 둘러보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습니다. 대략 일주일 정도 시간을 냈으니 그간 쌓인 피로를 풀 수 있겠죠.”

황태자는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반면 엘레인은 자신과 같이 일주일을 쉴 예정이라는 황태자의 말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우연이네요. 저도 일주일간 드워프 도시에서 쉴 예정인데.”

“그럼 그사이에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얻어먹을 수 있겠군요.”

“물론이죠! 기대하세요. 배가 터지도록 사줄 테니까요.”

엘레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황태자는 어째서인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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