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엘레인은 눈앞의 황태자와 그 뒤에 선 성기사들을 보며 가늠을 했다.
우선 신성제국의 성기사들은 베네딕트 제국의 황실 기사들과 맞먹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실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러한 성기사들을 꽤나 많이 데려왔다.
만약 황태자를 설득해서 저들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한다면…?
드워프 왕국의 기사들이 다수 몰려와도 충분히 버틸 수 있어!
“…괜찮아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그때.
황태자가 불현듯 이상한 질문을 했다.
엘레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네? 뭐가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거든요. 이 늦은 시간에 호위 기사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혹시 호위 기사와 의견 충돌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황태자는 물었다.
너 혹시 카론이랑 싸웠냐고.
당연히 그런 적 없는 엘레인은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아뇨! 제가 카론이랑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요.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럼 왜 혼자서 여기에…?”
엘레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단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드워프 왕처럼 그가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엘레인은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어보기를.
“만약 지금 당장 드워프 도시를 날려버릴 만큼 엄청난 위력의 화산이 터진다면 그쪽은 어떻게 할 거예요…?”
“화산 말입니까?”
동문서답임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진지하게 엘레인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은 엉뚱하게도 바로 옆에서 튀어나왔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이 한 몸 불살라서 주군을 지킬 겁니다.”
“아… 정말 충실한 기사를 뒀네요.”
“좀 과해서 문제지만요. 그런데 그런 질문을 했다는 건 혹시 저 화산이 조만간 터진다는 말로 해석해도 됩니까?”
엘레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조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잠시 뒤.
모든 설명을 들은 황태자는 심각한 얼굴로 창밖의 화산을 쳐다보았다.
“말씀대로라면 우린 모두 죽는다는 거군요.”
“그렇긴 하지만 막을 방법이 있어요!”
“화산 분화를… 막는다고요?”
자연재해를 대체 어떻게 막는다는 걸까?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엘레인이 창밖의 성소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네. 저 화산이 폭발하는 이유가 바로 성소에 있거든요. 그 원인을 제거하기만 하면 대폭발을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드워프들이 순순히 들여보내 줄지는 의문이군요.”
황태자는 성소 앞에 우르르 몰려와 있는 드워프 기사들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 진지하게 생각하는 태도에 희망을 얻은 엘레인은 아까보다 더욱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이 절 도와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제가 가봤자 더욱 경계만 할 텐데요. 아시다시피 아직 신성제국은 드워프들의 신뢰를 얻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쪽이 데리고 온 성기사들이 잠시 동안 드워프 기사들을 맡아주기만 하면, 제가 그 소란을 틈타서 성소 안으로 들어간 뒤에 원인을 제거할 수 있어요!”
엘레인은 꽤 절박하게 외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 정말 어이가 없군요.”
“네?”
황태자의 직속 성기사, 제랄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제랄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딴지를 걸었다.
“당신 말을 대체 어떻게 믿습니까? 아니, 애초에 당신은 그런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죠? 오랫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드워프들조차 모르는 그런 정보를 말입니다.”
“그건… 고대 서적에서 비슷한 사례를 봤어요. 그리고 전조현상은 성기사 아저씨도 겪어봤잖아요. 그걸 부정할 셈이에요?”
“물론 그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화산이 터지기 전의 전조현상은 저 또한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화산이 터지는 원인이 어째서 성소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말대로 화산이 터지는 원인이 성소에 있다고 쳐도 그 원인을 우리가 제거하는 게 낫지 당신 혼자서 대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다다다 쏘아지는 제랄의 말에 엘레인은 입을 앙다물었다.
그의 말엔 틀린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의문을 제대로 해소하려면 먼저 내가 정령사임은 물론이고 고대의 정령에 대한 것들도 투명하게 밝혀야 하는데, 지금 두 사람 앞에서 그걸 밝히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저렇게까지 의심하는데 그걸 말해봤자 순순히 믿어줄지도 미지수고 말이다.
“게다가 당신은….”
“그만.”
황태자는 둑 터진 물처럼 계속해서 지적하던 제랄의 입을 손을 들어 막았다.
덕분에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엘레인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몰라 더 두려웠다.
그리고 드디어 열리는 황태자의 입에선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의 말이 모두 맞다고 칩시다. 그러면 남은 시간도 별로 없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당신 말대로 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저, 전하? 지금 저 사람의 말을 믿는 겁니까?”
“명분과 이득만 있다면 설령 지금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해.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그건 그렇지만….”
제랄은 황당하다는 시선을 차마 거두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러기엔 너무나 리스크가 크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제 호위 성기사가 어처구니없는 시선을 보내든 말든 오로지 엘레인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대뜸 한다는 말이.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교육을 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
이건 또 뭔 소리지?
엘레인은 갑자기 주제를 벗어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는 그런 엘레인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에 선 성기사들을 한번 쓱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마 다들 경험이 있을 겁니다. 교육에 가장 필요한 책이 값비싼 탓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경험을 말입니다.”
황태자의 말에 성기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값비싼 책.
그들 중에서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서 검을 잡았던 자들도 꽤 많았다.
황태자는 깊이 공감하는 성기사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다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한데 최근 들어 베네딕트 제국 내에서만큼은 책의 가격이 말도 안 될 정도로 폭락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건지 궁금해서 조사를 해 봤더니, 당신 때문이더군요.”
“네? 저 말인가요?”
“네. 당신이 인쇄기를 만들어서 그런 변화가 생겼습니다.”
황태자가 엘레인을 콕 집어서 말하자, 성기사들이 처음으로 경계가 아닌 호의 섞인 눈으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 확연한 변화에 엘레인은 멍하니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냥 신성제국에도 인쇄기를 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친절하게 설명해준 건.
이렇듯 성기사들에게 약간의 신뢰라도 심어주어서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듣기로는 적색 마탑에 인쇄기 사업을 위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들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었으면 하는데….”
“물론이죠! 신성제국에 인쇄기를 도입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협력할게요!”
엘레인이 확언하자 황태자가 뒤를 돌아봤다.
마치 어떠냐는 듯 제랄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하기를.
“들었지? 우린 확실한 이득을 좇을 뿐이야.”
주군의 말에 제랄은 할 말이 궁해졌다.
***
엘레인과 황태자가 극적으로 협약을 맺은 그때.
성소 앞을 지키는 드워프 기사들은 뜻하지 않게 늘어난 일거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나 죽겠네. 당번도 아닌데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성소를 지켜야 할 이유가 대체 뭐야?”
“너 못 들었어? 좀 전에 베네딕트 제국에서 온 황녀가 왕께 대들었다잖아.”
“대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드워프 기사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도 관심을 가지고 귀를 쫑긋거렸다.
그에 흠흠 헛기침을 한 그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나도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한테 들은 거라 아는 건데, 갑자기 황녀가 찾아와서는 우리들의 수호신을 모욕했다지 뭐냐.”
“뭐? 그 황녀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우리한테 수호신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그런 행패를 부렸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 혹시 알아? 그 정신 이상한 녀석이 성소에 침입하려고 할지?”
드워프 기사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대놓고 왕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귀찮고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이 투덜거렸다.
“그냥 감옥에 가둬 두면 안 되는 건가….”
“미친. 그랬다가 베네딕트 제국이랑 전쟁하게?”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거기 황제가 황녀를 그렇게나 아낀다지?”
“그래. 그러니까 대충 방안에 박혀 있으라는 말로 끝낸 거지. 괜히 자기네 아빠한테 달려가서 꼰질렀다가는 우리 상황만 안 좋아진다고.”
“하긴 베네딕트 제국의 비호가 없으면 온갖 벌레들이 우리 도시를 먹으려고 들 테니까.”
그 말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드워프 기사들의 얼굴이 불편함으로 구겨졌다.
30년 전쯤.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대놓고 드워프 도시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 도시를 먹고 감히 드워프들을 노예화하려는 계획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물론 자존심 높고 긍지 높은 드워프들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는 없다.
앞서 그들은 여러 번 인간들과 전쟁을 치렀었고, 여러 적들과의 전쟁에 빠르게 지쳐버렸다.
아무리 그들이 강한 무구를 들고 맞서 싸워도 인간들의 수적 우세함과 끈질김에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10년간의 치열한 전쟁 후.
드워프 왕이 진지하게 숨어 살기를 고려하던 그때 숨통이 트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이웃 나라의 젊은 황제인 더글라스 베네딕트와 드워프 왕 사이에 어떤 계약을 맺으면서 베네딕트 제국의 비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거대한 제국이 뒤를 받쳐주는 건 아주 든든한 일이었다.
비록 인간들의 힘을 빌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이긴 하나 덕분에 드워프 도시를 넘보는 버러지들은 싹 사라졌다.
그런데 만약 그런 제국의 비호가 사라진다면….
드워프는 또다시 전쟁의 굴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어쩌다 우리 신세가 이렇게 된 건지.”
“인간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문제야. 차라리 옛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산속에 숨어 사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우리가 왜 숨어 살아야 해? 인간들의 욕심에 왜 우리가 희생되어야 하냐고.”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리고 그러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힘을 길러야지.”
드워프 기사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힘.
베네딕트 제국의 비호를 받는 동안 차근차근 그 힘을 길러나간다면 언젠가, 인간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있을 때.
“응? 헉! 부, 불이야!”
“뭐? 어디? 불이 어디에 났다는 거야?”
“네 팔뚝에! 네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고!”
“으아악! 이게 뭐야!”
갑자기 옷자락에 불이 붙어버린 드워프가 경악하며 바닥을 굴렀다.
습격인가?
드워프 기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물며 기름 냄새도, 누군가가 마나를 쓴 흔적도 없는데 어떻게 불이 붙은 걸까?
의문을 표하던 그때 이번엔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윽! 뭔 지진이….”
“이, 이렇게 센 건 온 적이 없는데!”
마치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고 양옆으로 흔들어대는 듯한 기분이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엉덩방아를 찧는 자들이 속출할 정도로 강한 지진.
하지만 이상 현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화르륵!
-화르르륵!
사방에서 불씨가 피어난다.
마치 등불을 피워 올리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에 모두가 넋이 나가 있을 때.
모습을 드러낸 불의 정령들이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캬아악!
-캬악! 캬아아악!
“이, 이게 뭐야!”
“설마 이건 불의 정령?”
“샐러맨더가 왜 갑자기 나타나는 건데!”
드워프들은 경악하며 달려드는 정령들을 쳐냈다.
희한하게도 모습을 드러낸 놈들은 물리 공격이 아주 잘 통했다.
그러나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쳐내도 불씨는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화산 대폭발 1시간 전.
엘프가 말했던 불의 정령들의 대폭주가 드디어 시작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