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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244/417)

245화

불의 정령들을 돌려보낸 뒤.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드워프와 인간들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 맞다! 카론,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언니들 찾으러 가야 해.”

“이제 날이 밝아오는데 천천히 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불의 정령들이 폭주한 건 왕궁뿐만이 아니야. 도시 전체에 불의 정령들이 가득한데, 열파의 정령의 힘이 막강해서 그쪽에 있는 녀석들도 폭주했을 거야.”

“그런….”

열파의 정령을 소멸시키면서 정령들의 폭주는 끝났지만, 한창 폭주가 진행 중일 때 공격을 받고 크게 다쳤을 수도 있다.

그것을 깨달은 카론은 덩달아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바로 찾으러 가죠.”

“응.”

엘레인은 카론과 함께 앨리스 일행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발을 떼려던 그때.

저 멀리서 여명을 등지고 나타난 세 개의 그림자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앨리스?”

세 여인이 가까워지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덜거리는 옷과 살짝 그슬린 머리카락.

그리고 중간에 새까만 연기라도 쐬고 왔는지 여기저기에 검댕을 잔뜩 묻힌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황녀님, 괜찮으세요?”

그때 선두로 달려온 앨리스가 엘레인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물었다.

그에 괜히 머쓱해진 엘레인은 양팔을 열심히 파닥거렸다.

“당연하지! 이것 봐. 나 완전 멀쩡해.”

엘레인이 파닥거리자 앨리스를 비롯한 두 여인의 눈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간만에 보는 귀여운 모습에 헤벌쭉하게 웃고 있자니, 엘레인이 손동작을 멈추고 역으로 질문했다.

“그러는 너희는? 다친 곳 없어?”

“네. 다행히 오는 내내 캐시가 지켜줬어요.”

“으응? 캐시가?”

엘레인의 눈이 다시금 크게 뜨이자 이번엔 베일리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캐시를 가리켰다.

“얘 전직 용병이었나 봐요. 단검을 들고 슉슉! 어찌나 날렵하던지 완전 쩔어주더라니까요?”

“캐시 언니 단검 쓸 줄도 알아?”

“…부끄럽지만 조금은 조예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여기까지 오는 건 좀 힘들었을 겁니다.”

얌전히 양쪽 볼을 붉힌 캐시가 공로를 두 여인에게로 돌렸다.

그에 엘레인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앨리스와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뭘 도와줬는데?”

“별건 아니고요. 그냥 온천물을 갖다 부으니까 정령들의 힘이 쫙 빠지던데요?”

“온천물….”

이건 완전 상상하지도 못한 전개다.

엘레인은 ‘정령들이 주변을 다 박살 내서 온천물 수급하기도 편하더라고요!’라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베일리의 모습에 허허롭게 웃었다.

왜인지 모르게 웃으면서 정령들을 샤워시켜주는 베일리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불의 정령들 입장에선 베일리가 재앙이었을 것 같은데….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가요?”

앨리스는 뒤쪽에서 여전히 기쁨을 표출하고 있는 무리를 보고 속삭였다.

드워프와 인간들이 서로 얼싸안고 좋아하는 모습도 신기했지만, 아까부터 황녀님의 품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파란 슬라임이 더욱 신경 쓰였다.

“아, 그게 말이지….”

세 여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챈 엘레인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이미 모두에게 까발려진 판국에 운디네의 모습을 숨겨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에, 엘레인은 투명화를 풀고 있는 운디네를 쓰다듬으면서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을 들은 그들은….

“헉. 황녀님 정령사였어요?”

역시 그렇게 되겠지.

엘레인은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헤헤.”

엘레인은 바보같이 웃으면서도 속으론 안절부절못했다.

그동안 그들에게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하면서 운디네와 함께 훈련을 해왔다.

꼭꼭 숨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받았을 실망감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엘레인은 괜히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오오. 대단해요!”

“…응? 그걸로 끝이야?”

“당연히 아니죠! 정령사라는 건 마법사보다도 훨씬 귀한 존재 아닌가요? 그런데 황녀님이 그 정령사일 줄이야. 황녀님 알고 보니 엄청 능력자였잖아요?”

“뭐래. 우리 황녀님은 정령사 아니어도 대단한 능력자시거든?”

“어쨌든 엄청난 능력이 하나 더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 말도 맞는 거 아니야?”

“그럼 ‘알고 보니’라는 말을 빼야지. 괜한 오해를 하게 만들면 어떡하니?”

“어휴. 잔소리 아줌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으악! 앨리스 화났다! 캐시 나 좀 지켜줘!”

“너 정말 이럴래!?”

엘레인은 투닥거리며 싸우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봤다.

중간에 낀 캐시가 퍽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훈훈한 분위기에 엘레인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저들도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황녀님께서 괜히 숨겼을 리는 없으니까요.”

“카론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

“물론입니다.”

참고로 카론 같은 경우에는 ‘나의 실력이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내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하시는 거다!’라고 오해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그게 완전히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다들 다친 곳 하나 없어서.”

“그러게 말이야.”

엘레인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는 앨리스와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 너머로 마치 영혼을 잃은 듯한 딜런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쟨 또 왜 저래?

시비를 걸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엘레인은 비틀비틀 어디론가 향하는 딜런의 뒷모습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사건 해결 후 뒷수습이 바쁘게 진행됐다.

드워프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엘레인은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접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그에게 크나큰 도움을 받았던 엘레인은 호다닥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한편, 이렇게 빨리 문을 열어줄 줄은 몰랐던 황태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해서 말입니다.”

“네? 벌써요?”

이제 겨우 드워프 도시에서 하룻밤이 지났다.

이렇게 일찍 돌아갈 줄은 몰랐던 엘레인이 놀라서 묻자 황태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큰 사건이 생기다 보니 성황께서 걱정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가족이 걱정하는데 어떻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어차피 분위기도 어수선해져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일찍 돌아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렇죠.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황태자는 왜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건가?

하지만 드워프 왕이 말하길, 성황은 아들을 되게 아낀다고 했었는데….

엘레인은 걱정스레 황태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바나나 브레드 푸딩입니다. 함께 먹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시간은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스르륵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엘레인은 한시라도 빨리 황태자를 데려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신성제국의 마법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엘레인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제가 사주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럼 다음에 이자 몇 배로 쳐서 많이 사주면 되죠. 그러면 된 거 아닐까요?”

“그렇긴 한데….”

엘레인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다음’이라는 때가 대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지만… 더는 그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진짜 제대로 쏠게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황태자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엘레인은 그런 그를 향해 손인사를 건네며 선물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갑자기 드리우는 그림자.

“흐흐흐.”

“…베일리? 왜 그렇게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거야?”

“아뇨! 그냥 너무 풋풋해서요.”

“풋풋하다니? 뭐가?”

“에이잉. 그냥 그런 게 있어용!”

베일리는 평소 하지도 않는 애교 섞인 말을 내뱉으며 앨리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건 앨리스 또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저러는 거람?’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테이블 위에 선물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자를 열자 세상 달콤한 냄새가 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헉. 냄새 죽인다. 이게 그 바나나 브레드 푸딩이라는 건가요?”

“응. 다행히 여긴 마요네즈를 안 뿌렸네.”

“으윽. 이렇게 맛있는 것에 마요네즈를 뿌리는 건 죄악이에요!”

베일리가 그건 진짜 아니라는 듯 인상을 구겼다.

뭐, 국물에 빠진 마요네즈를 봤다면 베일리도 나처럼 안도의 한숨이 먼저 나왔을 거다.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때마침 캐시가 내민 접시 위에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네모나게 잘라서 올렸다.

“언니들도 같이 먹자. 우리 같이 먹기로 했잖아.”

“그래도 선물 받은 건데.…”

“괜찮아. 게다가 지금 안 먹으면 다시는 맛 못 볼걸?”

“네? 어째서요!?”

“이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장사를 하겠어. 황태자가 이걸 어떻게 구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먹어야지.”

“그, 그럼 한 입만.”

결국, 달콤한 냄새와 한 번밖에 못 먹는 조건에 굴복한 베일리는 머뭇거리면서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한입 크게 떠서 먹었다.

그리고 두 눈을 번쩍!

“우, 우와. 이거 엄청 맛있어요!”

“정말? 나도 어디 한 번….”

베일리의 반응에 기대감이 더욱 증폭된 엘레인은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듬뿍 떴다.

그리고 입안에 넣자마자 어마어마한 달콤함의 폭풍이 엘레인의 혓바닥 위로 몰아쳤다.

“으어…. 달콤해.”

엘레인은 스푼을 물고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바나나의 달콤한 베이스와 찐득한 초코 시럽의 조합!

게다가 식빵은 또 왜 이렇게 촉촉하고 부들한지 모르겠다.

심지어 겉은 바삭해서 씹는 즐거움까지 챙겼다.

엘레인은 황태자가 주고 간 달콤함에 심취하며 바나나 브레드 푸딩을 맛있게 떠먹었다.

그렇게 모두가 바나나 브레드 푸딩의 매력에 물씬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오늘 벌써 두 번째 손님이다.

엘레인은 의아한 마음에 스푼을 내려놓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툴란이었다.

“툴란 씨?”

“…잠깐 들어가서 말 좀 나눠도 되나?”

형을 잃은 슬픔 때문일까?

툴란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다.

그에 할 말을 잃은 엘레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캐시와 앨리스, 베일리가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었다.

“고맙다.”

툴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방으로 들어왔다.

이후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은 그는 가장 먼저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선 우리 드워프들을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마. 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모두 죽었을 거야.”

일이 모두 끝난 후.

뒤늦게 달려온 툴란은 다른 드워프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물의 정령을 부리면서 모두를 구한 엘레인의 영웅담을 말이다.

형님께서 건넨 술.

그러니까 수면제를 탄 술 때문에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을 때, 타국의 황녀가 모두를 구하고 고대의 정령을 처치한 것이다.

“에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하지만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지.”

툴란은 머쓱하게 웃으며 한쪽 뺨을 긁적이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품을 뒤적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무언갈 올려놓았다.

“그건…?”

“형님의 시신 주변에서 발견한 거다. 반쯤 타버려서 책의 내용은 거의 알 수 없지만, 조사 결과 확실하게 알아낸 게 하나 있지.”

엘레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말에 집중하자 툴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형님을 그 지경으로 만든 무언가 세력이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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