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그란디스 왕국 수도 한쪽 게시판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게시판에 붙은 공지글을 쳐다보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다.
“여기에 글이 올라오는 건 참 오랜만이구먼.”
“예전에 징집에 대한 글을 올릴 때 말곤 처음이지?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는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글도 읽을 줄 모르는데.”
“이거 큰일이네. 저기 저 구석에 임금님의 인장이 찍힌 걸 보면 진짜 중요한 거 같은데. 혹시 이거 읽을 수 있는 사람 있는가?”
한 사내의 물음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주변 간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란디스 왕국민들의 문맹률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그나마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대개 왕궁에서 일하거나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이게도 이곳엔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한 명 끼어 있었다.
“여기! 우리 아들 녀석이 읽을 줄 알어!”
“응? 자네는 페르비 마을 촌장이 아닌가. 근데 자네의 아들이 글을 읽을 줄 안다고?”
“당연하지. 요 녀석이 이번에 왕궁의 행정부로 들어갔는데, 거기 가려면 글 정도는 쉽게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평소 완고하기로 소문난 촌장이 껄껄 웃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멀뚱히 서 있는 아들의 어깨를 턱 하니 잡았다.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는 거냐?”
“그래. 빨리 좀 읽어 봐. 궁금해서 죽겠어 아주!”
“어휴. 잠시 좀 기다려 보세요. 어디 보자….”
촌장의 아들은 사람들의 재촉에 머리를 긁적이며 벽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공고문을 슥 훑어보더니 놀란 눈으로 제 아버지를 돌아봤다.
“왜? 뭐라고 적혀 있는데?”
“그게… 아버지. 아무래도 우리 올해 농사 망한 것 같은데요?”
“뭐시라? 갑자기 그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
“국왕님이요. 우리 페르비 마을에 목화를 심는다는데요?”
“으잉?”
아들이 말에 촌장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갑자기 목화를 심는다는 것도 뜬금없지만, 그게 기존에 짓던 농사가 망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자세히 좀 설명해 봐!”
“그… 이번에 찾아온 이방인들이 페르비 마을 주변 땅을 일궈서 목화를 심고 그걸로 옷을 만들 거라네요. 그러니까 페르비 마을 사람들은 전부 목화밭을 일구는 데에 적극 협조하라고….”
“어, 어억!”
“아, 아버지!”
아들의 말에 촌장은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다.
우리들의 생계가 걸려 있는 농사를 제쳐두고 해본 적도 없는 목화 농사를 짓는 데에 적극 협조하라니!
촌장의 분노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이방인’에게로 쏠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그란디스 왕국 내부.
일반 귀족들의 저택보다도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휴식을 취하던 엘레인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오빠? 전서구 잘 보냈어?”
“응. 보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오르칼은 엘레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 일정이 길어질 것 같아서 그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서구를 황궁으로 보내자는 것인데 솔직히 엘레인만 아니었으면 보내지도 않았다.
“내가 쓰라는 대로 썼어?”
“당연하지.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 꼭 써서 보냈고말고.”
참고로 그 뒤에 ‘엘레인은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 쓸데없이 끼어들지 마십시오. 특히 라네즈, 아르닐 너희 둘. 그란디스 왕국으로 찾아오면 너희들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따위의 협박성 짙은 멘트를 쓴 건 엘레인에게 비밀이다.
“그보다 엘레인. 산업단지를 세울 땅이 정해졌대.”
“벌써? 이제 겨우 하루 지났는데 진짜 빠르네.”
“그러게. 이런 건 좀 천천히 해도 되는데.”
“?”
엘레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오르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을 완벽하고 빠르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 오르칼이라면 지금 상황을 반길 줄 알았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의외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한편, 그저 여동생과 느긋하게 관광이라도 하고 싶었을 뿐인 오르칼은 이런 쪽으로는 쓸데없이 빠르게 행동하는 그란디스 국왕을 욕하며 혀를 찼다.
“도움 안 되는 녀석.”
“응? 누가?”
“그냥. 그런 게 있어.”
오르칼은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엘레인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은 조식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사 중이었구나. 미안해. 나 때문에 흐름 끊겼지?”
“아, 아니야. 식사는 이미 끝났어.”
“으음? 거의 손도 안 댄 것 같은데?”
“그, 그게….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엘레인은 괜히 오르칼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오르칼은 그런 엘레인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채고는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대부분의 요리에 말젖과 양젖이 들어가는 그란디스 왕국 식문화 특성상 비린 맛은 패시브로 들어가게 된다.
당연하지만 그러한 음식에 익숙하지 못한 여동생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나야 좀 굶어도 상관없지만, 엘레인을 굶길 순 없지.’
마침 우리가 확인하러 가봐야 할 동네는 드물게도 콩과 밀 농사를 하고 있다.
생각을 마친 오르칼은 자리에서 일어나 빙그레 웃었다.
“그럼 우리 페르비 마을에 가볼까? 가서 어디에 건물을 세우면 좋을지 확인해보자.”
“좋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엘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목화밭과 공장이 세워질 장소.
페르비 마을로 향하던 엘레인은 문득 오르칼을 바라봤다.
“근데 오빠. 이제야 생각난 건데. 목화는 심으면 지력이 꽤 많이 소모되지 않아?”
정령들이 매일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플로스 영지라면 몰라도 일반적인 땅에 목화를 심어 키우면 지력을 계속해서 소모하여 결국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때는 보통 퇴비를 뿌려주면 되지만, 넓은 평원에 퇴비가 될 만한 재료를 찾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즉, 땅을 개박살 내기 싫으면 윤작을 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걱정하지 마. 예전에 적색 마탑주님과 함께 목화 씨앗을 개량했었거든. 결과적으로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남은 물론이고 지력 소모 문제도 해결했어. 파종 전에 밭을 갈아엎은 뒤 콩 줄기를 태워 만든 퇴비만 뿌려주면 같은 밭에서 매년 일모작을 할 수 있어.”
오르칼의 설명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작물에 관해 공부도 많이 했고 새로운 종류의 꽃을 만들 능력마저 가진 그라지만, 목화라는 식물이 가진 단점마저도 해결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와아…. 오빠는 미래에 목화의 수요가 증가하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맞아. 그건 드워프가 재봉틀을 개발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과 다름없어.”
과연 카르텔 상인 길드를 시작으로 뒷세계를 지배하는 데에 성공한 남자답달까.
오르칼은 미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난 데다가 어마어마한 실행력과 결단력. 그리고 거침없이 투자하는 과감함까지 겸비했다.
이렇듯 그의 뛰어난 능력 덕분인지 ‘저런 사람이 내 가족이라서 천만다행이다.’ 따위의 생각이 절로 들곤 했다.
“그런데 원래 목화는 4월에 파종하지 않아? 지금 당장 씨앗을 심으면 잘 안 자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해결법은 간단해. 당분간은 목화를 수입해서 공장만 돌리는 거지.”
“아하? 아직은 값이 그렇게 많이 오르지 않았으니까?”
“역시 내 동생.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구나.”
오르칼은 깨알 칭찬을 하며 엘레인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엘레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목화는 나중에 자급자족하는 방향으로 바꾼다는 거지?”
“그래, 맞아. 그러니 우리는 공장 건설과 기술자 초빙, 그리고 기계를 들여오기만 하면 돼. 뭐, 이것 역시 드워프들에게 의뢰를 넣어놨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거야.”
오르칼은 씩 웃으면서 엘레인을 바라봤다.
얼마나 치밀한지 엘레인이 뭘 하기도 전에 일을 다 처리해버린 오르칼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 오빠가 다 해 놔서 내가 할 게 없네.”
“할 거 없으면 더 좋지. 나랑 느긋하게 쉴 수 있으니까.”
“그치만 내가 너무 미안한데….”
“아. 도착했다. 바로 여기가 페르비 마을이야.”
타이밍 좋게 페르비 마을에 도착하자 오르칼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르칼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린 엘레인은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운 콩잎을 보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농사 25에 목축업 75 비율을 차지하는 그란디스 왕국.
그중 농사에만 올인한 페르비 마을답게 잘 다듬어진 초록빛 물결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와. 콩밭이다! 근데 옆에 빈 땅은 뭐지?”
“밀밭이야. 파종일이 가을이어서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렇구나. 가을 되면 바빠지겠네.”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오르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 밭을 갈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참고로 왕이 내린 공고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목화밭을 일굴 때가 되면 그때쯤 페르비 마을 사람들은 전부 목화밭을 일구는 데에 적극 협조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국왕은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공고문 그 어디에도 ‘목화밭을 일굴 때’가 언제인지 적어놓질 않은 것이다!
“으음. 어째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꽤 따가운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원래 그란디스 왕국 사람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니까.”
기술에 대한 욕심이 커서 드워프 도시를 공격했다가 된통 당하고 굴욕적이게도 베네딕트 제국의 속국이 되어버린 그들이다.
당한 게 많으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긴 것은 물론이고 자존감 또한 많이 깎여 나갔겠지.
그 덕분인지 나름 호전적이던 그란디스 왕국민들은 이방인들을 우선 배척하고 보는 성향이 짙어졌다.
그럴수록 그들이 믿는 토착 신앙에 대한 믿음과 갈구하는 마음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보였던 반응보다 더 격하지 않나?’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엔 경계심과 약간의 적대감. 그리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이 뒤섞여 있었다면 지금은 마치 악당을 바라보는 눈빛과도 같다.
‘유독 이 마을만 이러는 건가? 아니. 생각해보면 성을 나올 때 사람들 시선도 비슷했던 것 같기도.’
엘레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룻밤 사이에 저들이 적개심을 보이는 이유가 대체 무얼까.
혹시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진 건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 등등.
복잡해지는 생각에 이마 사이의 골이 패고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만 갔다.
여동생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오르칼에게 지금의 상황은 정말이지 좋지 못했고 말이다.
“…….”
오르칼은 감히 엘레인에게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 원인들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덩달아 그 뒤를 따르던 그림자와 카론. 그리고 캐시가 살기를 날려 보내자 화들짝 놀란 주민들이 황급히 시선을 갈무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르칼의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뭐라도 좀 먹을까? 많이 걸어서 힘들지? 다리 안 아파?”
“음. 그러고 보니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사실 아침 식사를 깔끔하게 거른 엘레인은 현재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주린 배에 손을 얹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오르칼의 딱딱하게 굳은 입매도 부드럽게 풀렸다.
“여긴 밀과 콩이 자라는 곳이니까 다른 요리도 맛볼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럼 더 이상 말젖 요리를 안 먹어도 돼?”
환한 얼굴로 그리 외친 엘레인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침 식사를 거른 이유를 당당하게 말하고 만 것이다.
반면 처음부터 그 이유를 알고 있었던 오르칼은 모르는 척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하지. 종류가 많진 않겠지만 빵이나 콩 수프 정도는 있을 거야.”
“콩 수프에 빵 찍어 먹으면 고소하고 맛있겠다….”
“그렇지? 얼른 가보자.”
오르칼은 상냥하게 웃으며 엘레인과 함께 페르비 마을의 유일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서오십쇼!”
식당 주인은 엘레인 일행이 들어서자마자 바로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이방인이 오면 바로 쫓아낼 거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소녀를 호위하듯 선 네 사람이 풍기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곧바로 굴복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