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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258/417)

259화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을 주민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에 시퍼런 칼날을 집어넣은 카론은 낮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마을 아이가 우리보고 나쁜 놈이라고 하던데 저런 오해를 하고 있었군요.”

“난감했겠네. 듣자 하니 국왕님이 전달을 잘못한 것 같은데…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람?”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오르칼이 두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는 음산하게 중얼거리기를.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놈이 일을 잘못 처리했기 때문에 그동안 이유 없는 적대를 받은 거잖아?”

“오빠 말이 맞아. 그냥 넘어갔다가는 나중에 똑같은 실수를 하고 말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맞아.”

이번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엘레인이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그러자 오르칼이 그 말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안 그래도 바쁜데 이런 데에까지 신경을 쓸 순 없잖아?”

“정말?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앞으로 그란디스 국왕이 어떤 협박을 받을지 알 도리가 없는 엘레인은 흔쾌히 그의 의견을 수락했다.

그리고 오르칼은….

“잘 생각했어.”

빙긋 웃는 모습이 그렇게 산뜻할 수가 없었다.

가장 높은 산인 여동생의 허락까지 받아낸 그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저기….”

그때 서로 수군덕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마을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자기네들이 잘못을 저지른 걸 잘 아는지 죽을상으로 다가온 그들은 거침없이 먼저 고개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촌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국왕이 실수로 중요한 내용을 몇 가지 빼고 전달한 거란다.

그가 직접 대경실색한 얼굴로 실수를 인정했다고 하니 여지없는 진실이다.

심지어 밀밭에 산업단지인지 뭔지를 세우자고 한 것도 국왕이라고 했다.

땅이 고르게 돼 있어서 건물을 세우기 좋다나 뭐라나.

뭐, 밀밭을 빼앗기긴 했지만 대신 국왕이 준다는 보상은 오늘의 고된 노동이 달콤한 꿀처럼 느껴질 만큼 좋았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즉, 이방인 때문에 그들이 얻은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전무할 뿐인가?

결과적으론 좋은 마음으로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러 오신 분들이니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랐다!

“저희는 여러분들이 우리의 살길을 막으려는 건 줄 알고….”

“어처구니없는 오해지만 사실입니다!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뒤늦은 촌장의 등장으로 모든 오해를 풀게 된 마을 사람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엘레인 일행을 향해 사과했다.

그들의 진실 어린 사과에 멍하니 오르칼과 시선을 주고받던 엘레인은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개 드세요. 솔직히 모든 원인은 국왕님한테 있고, 무엇보다도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한편 엘레인은 허허.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적개심을 내비쳤던 것도 아니고 오해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니까 충분히 이해한다.

게다가 이번 일에 대한 대가는 오르칼이 톡톡히 받아낼 것 아닌가?

때문에 이 정도 진실 어린 사과면 됐다. 그러한 마음으로 그리 말하자 천천히 고개를 든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처, 천사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여쁜 얼굴만큼 마음씨도 참 고우십니다!”

세상에 어쩜 이리도 착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엘레인의 하해와도 같은 마음에 깊이 감복한 마을 사람들은 존경과 감격이 한데 섞인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우러러보았다.

당연하지만 그러한 눈빛에 여전히 면역이 없는 엘레인은 멋쩍게 뺨을 긁적일 뿐이다.

‘어쨌든 이걸로 모든 문제는 해결된 건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마을 사람들의 적개심이 해소되었으니 이제는 정말로 마음 편히 단지를 건설할 수 있다.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니, 헤죽 웃고 있던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목공소에 들르시던데… 혹시 목자재 필요하세요?”

“아, 네! 건물을 지을 때 꼭 필요해서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바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거 전부 예약이 잡혀 있다던데요?”

엘레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슬쩍 나서서 한다는 말이.

“실은 제가 거기 예약한 사람 중 한 명인데요. 생각해 보니까 굳이 지금 구입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저, 저도요. 나중에 해도 돼요!”

“그렇게 급한 게 아니라서 그쪽이 먼저 써도 돼요!”

너도나도 양보한다고 외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에 엘레인은 벙쪘다.

그도 그럴 게 목재를 예약한 사람들이 여기에 다 몰려있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장에서 예약 취소를 외쳤기 때문이다.

“어,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쇼!”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외치는 마을 사람들.

어처구니없는 오해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주민들과의 갈등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 * *

며칠 뒤.

그란디스 왕국을 찾은 일련의 무리가 너른 초원을 노려보았다.

“으으. 내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개중에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짜리몽땅한 키의 주인공. 몰디스는 여느 때처럼 한탄을 늘어놓았다.

오래전 우리 드워프 도시를 먹기 위해 더러운 야욕을 드러냈던 그란디스 왕국.

그곳에 직접 발을 들여놓게 되자 속이 절로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끄응. 그래도 유명한 황녀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

몰디스는 며칠 전 드워프 도시의 왕이 된 절친. 툴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녀님이 그란디스 왕국에서 공장을 세울 모양이야. 거기로 갈 드워프를 뽑고 있는 중인데 총책임자로 네가 가 보는 건 어때? 드워프 중에 건축으로 너를 따라갈 녀석은 없잖냐.

-헉! 저, 정말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저번에 유명한 인간이랑 대화 제대로 못 해봤다고 찡찡거렸잖아.

-뭐? 내, 내가 언제 찡찡거렸다고 그래? 이 드워프가 오해할 말을 막 하네.

-대충 그런 걸로 치고.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당연히 갈 거다!

뭐, 대충 이렇게 된 거다.

더러운 습격자 그란디스 왕국민들은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었지만, 우리들의 영웅인 베네딕트 제국 황녀는 어떻게든 돕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일을 도와주는 김에 최근 건축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수인족. 레눔이라는 자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다.

“물건은 잘 운반되고 있지?”

“넵! 문제없습니다!”

총책임자 몰디스의 말에 뒤쪽에서 열심히 풀을 베고 있던 드워프들이 빠릿하게 답했다.

그란디스 왕국은 대부분의 길이 야생 그 자체였다.

자칫 잘못하면 수레바퀴에 초원의 풀들이 엉겨 붙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일이 눈앞의 풀들을 베어 넘기면서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

“고지가 눈앞이다! 조금만 더 힘내라!”

“예!”

뛰어난 건축가와 기술자들로 이루어진 드워프들이 강인하게 외쳤다.

지겨운 풀베기도 이제 끝이라는 말은 지친 드워프들의 몸에 힘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다.

* * *

한편 엘레인은 너른 땅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나무 자재들을 보고 곤란한 낯을 띠고 있었다.

“이거 큰일이네. 일단 필요한 자재는 다 모으긴 했는데 보관할 데가 없네.”

마을 주민들이 사태를 바로 잡아준 뒤로 목공소에 있던 자재들은 전부 엘레인네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추가로 그림자가 어마어마한 양의 재료들을 가지고 왔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덕분에 너른 부지를 빼곡하게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재료를 모두 모을 수 있었지만, 보관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먹구름이 낀 게 날이 영 심상치가 않은데.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을 걸까?”

“흐음. 나무에 최소한의 방수 처리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면 물을 먹어서 못 쓰게 될 거야. 물 먹은 목재는 내구도가 대폭 하락해서 골조로 쓸 수 없거든.”

“그럼 털가죽으로 꽁꽁 싸매면 어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방법으로도 기계는 지킬 수 없을 거야. 이번에 가져올 드워프제 방적기와 방직기는 정밀 기계라서 습도에 약하거든.”

“아, 기계! 그러고 보니 지금쯤 한창 기계를 옮기고 있겠구나.”

오르칼의 말을 들은 엘레인은 아연해졌다.

마차처럼 입구가 작은 것에 커다란 기계를 싣고 왔을 리는 없으니 높은 확률로 지붕이 없는 수레에 기계를 실어 올 것이다.

안 그래도 습기에 민감한 게 기계인데 오는 길에 비라도 왕창 맞았다가는 사용도 하지 못하고 망가질 수도 있다.

“어떡하지? 목재소에 기계를 잠시 맡아 달라고 할까?”

“그건 어려울 거야. 우리가 목재를 빼간 뒤 목공소 주인이 새로 발주를 넣어서 빈 공간을 다시 채웠거든. 게다가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아서 서른 대가 넘는 기계를 전부 보관할 수 없어.”

“이거 진짜 큰일이네….”

목재는 그렇다 쳐도 기계를 안전하게 보관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초원은 강수량이 그리 많지 않아 공사를 진행할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크나큰 패착이었다.

심지어 이번에 오는 비는 일반적인 비도 아니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은 게 어쩌면 이번에 오는 게 태풍일 수도 있겠어.”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 초원은 특이하게 4년에 한 번씩 태풍이 오거든. 하필이면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지만,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않으면 곤욕을 치를 거야.”

안 그래도 비에 젖어 망가질 기계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질 수 있다는 말에 엘레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쩌지? 마을 사람들한테 기계 한 대씩만 맡아 달라고 부탁할까?

하지만 그건 너무 민폐인데….

하물며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눈에 봐도 이곳저곳 기워 놓은 티가 나는 나무집들은 4년에 한 번씩 오는 태풍을 맞이할 때마다 어떤 곤경에 처했을지 대충 짐작 가게 만들었다.

‘어떡하지? 운디네한테 부탁해서 기계 주변에만 물이 가지 않도록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하나?’

엘레인은 머리 위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며 침음을 흘렸다.

우리의 운디네라면 충분히 가능하기는 한데. 바람까지 막아 줄 순 없으니 그게 문제다.

“휴. 바람의 정령이랑도 계약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우! 무무웃!?

(주인!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응? 오, 오해야. 나한텐 당연히 우리 운디네밖에 없지!”

-무웃…?

(그게 정말이야…?)

“그럼. 물론이지. 그냥 태풍을 더욱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하다가 잠깐 생각했을 뿐이야.”

엘레인은 다급히 변명했다.

그에 게슴츠레하게 콩눈을 뜬 운디네는 특별히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리고 ‘물로 쉴드를 치면 바람 따위 쉽게 막을 수 있어!’라며 대안법을 말하려던 순간.

“유명한 황녀님!”

“어? 몰디스 씨?”

드디어 등장한 몰디스가 드워프들을 이끌고 페르비 마을에 당도했다.

풀 내음을 가득 머금은 채.

기름칠 안 된 기계처럼 삐걱삐걱 다가온 그는 축축한 땀을 옷자락에 슥슥 닦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엘레인에게로 내밀었다.

“다, 다시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몰디스입니다!”

“앗. 몰디스 씨. 저야말로 반가워요.”

내밀어진 손끝과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지난번처럼 제대로 된 답도 하지 않고 호들갑만 떨던 모습에 비해선 많이 나아졌다.

그에 엘레인은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몰디스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런데 몰디스 씨가 여기에 있다는 건, 혹시 방적기나 방직기와 관련된 기술자이신 건가요?”

“아, 아뇨. 전 기술자가 아니라 건축가로 왔습니다. 제가 드워프들 사이에서 건축을 제일 잘하거든요.”

엘레인의 물음에 몰디스는 언제 잔뜩 긴장했냐는 듯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장인 정신과 그만의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모습에 엘레인이 흐뭇하게 웃자, 몰디스가 헤벌쭉하게 따라 웃었다.

“…인사는 그쯤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건지 상의해 보죠.”

조금만 더 있으면 엘레인의 손을 잡고 거친 수염에 비빌 것 같은 모습에 오르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불쾌한 그의 표정에 움찔한 몰디스는 슬그머니 꼭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며 괜히 시선을 깔았다.

참고로 소심한 그의 모습은 오르칼이 원하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과 딱 맞아떨어져, 험악한 오르칼의 눈빛이 금세 누그러졌다.

“그, 그런데 문제라는 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흠.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요.”

드워프답지 않은 공손한 물음이 마음에 든 오르칼은 방금 전 엘레인과 나누었던 내용들을 간략하게 추려서 몰디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오르칼의 말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몰디스는 생각보다 매우 간단한 해결법을 제시했다.

“그런 거라면 그냥 기계 보관소를 먼저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네? 하지만 오늘 당장 비가 내릴 수도 있는데….”

몰디스는 당황해하는 엘레인을 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하루.”

“?”

“딱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기계 보관소를 뚝딱 만들어 내겠습니다. 정령사 황녀님이라면 그 안에 비가 내려도 기계를 지켜줄 수 있죠?”

어마어마한 확신과 자신감이 느껴지는 몰디스의 두 마디.

그리고 그가 보내는 무한한 신뢰에 엘레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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