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시간을 돌려, 카론과 심각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던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이 범람한다니? 내 눈엔 멀쩡해 보이는데?”
물이 불어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넘쳐나고 있지는 않았다.
카론은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밖을 살피는 엘레인을 향해 고개를 내젓고는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동쪽 끝에서부터 물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군요.”
“산사태? 아니, 그보다 저 멀리 있는 게 보이는 거야?”
엘레인은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그냥 산등성이만 보일 뿐.
강물이 범람하고 있는 건지는 전혀 모르겠다.
“안경을 맞추고 난 다음부터는 저렇게 멀리 있는 것까지 보이더군요. 어쨌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마을이 물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뭐? 그 정도란 말이야?”
엘레인이 놀라 묻자 옆에 있던 오르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경의 말대로 산사태가 크게 터진다면 거대한 해일처럼 순간적으로 치솟아 오른 강물이 이 일대를 덮칠 수도 있어. 원체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기 때문에 산사태로 갑자기 수위가 확 늘어나면 그만큼 피해도 커질 거야.”
“그런….”
오르칼의 자세한 설명에 엘레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그의 말대로 된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드워프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것만큼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기에 엘레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내가 막을게.”
“뭐? 그건 너무 위험해!”
깜짝 놀란 오르칼이 바로 반발하고 나섰다.
아마 다음 이어질 말은 ‘당장 이동용 스크롤을 사용해서 이곳을 벗어나자!’겠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마을에 남겨진 드워프들과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걸 원치 않는 엘레인은 걱정스레 바라보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싱긋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가뿐하게 해결할 수 있어. 아까 오빠도 봤잖아? 빗물을 어떻게 막아내는지.”
“…하지만 엘레인. 떨어지는 빗물을 막아내는 것과 밀려오는 강물을 막아내는 건 궤를 달리하는 일이야. 널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위험해.”
“전혀 위험하지 않아. 우리 운디네가 조종하지 못하는 물은 없거든. 여긴 우리 운디네의 홈그라운드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줘.”
쏟아지는 빗물과 차오르는 강물.
두 가지 환경이 갖춰진 이곳은 물의 정령이 활개치기에 너무나도 좋은 장소다.
보아라.
안 그래도 강한 운디네의 주변에 물의 기운이 가득하니, 운디네의 피부도 평소보다 더욱 매끈해지지 않았는가?
-무우웃! 무뭇무웃!
(걱정 마라 주인 오빠 되는 인간! 고작 강물 따위는 날 막을 수 없다!)
운디네가 물근육을 만들며 이리저리 자세를 취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끝을 모르는 자신감을 느낀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엘레인의 눈에서 물러서지 않는 의지를 느낀 것일까?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한숨을 푹 내쉰 오르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나도 따라갈게.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스크롤을 찢을 거야.”
“알았어!”
오르칼의 허락을 받은 엘레인은 곧바로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오르칼과 그림자 그리고 카론과 캐시가 뒤따르며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했다.
그런데 그때.
콰르르르—!
불안한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는지 기어코 무언가 사달이 난 모양이다.
천둥소리라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에 흠칫 놀란 엘레인은 다급히 동쪽 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장대한 광경.
“강물이 밀려오고 있어!”
“여기서 조종할 순 없는 겁니까?”
“너무 멀어. 좀 더 가까워야 조종이 가능해.”
그림자의 물음에 답한 엘레인은 계속해서 달렸다.
하지만 강가까지의 거리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고 시커먼 강물은 점점 더 몸집을 키우며 빠른 속도로 마을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카론!”
결국, 엘레인은 카론을 불렀다.
이러다간 늦겠다 싶어 그를 쳐다보니 카론이 대번에 원하는 것을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카론은 엘레인을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든 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마찬가지로 탐욕스럽게 주위를 먹어 치우며 한 아이를 향해 덮쳐오는 강물도 가까워진다.
“운디네!”
-무우웃!
서서히 정령력을 일깨우며 준비하고 있던 운디네가 엘레인의 신호를 받자마자 가진 힘을 퍼트렸다.
그리고 천만다행이게도 아이를 집어삼키기 직전에 범람하는 강물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카론의 품에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엘레인은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을 훔쳐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아, 네에. 가, 감사합니다.”
소년 조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멍하니 답했다.
강물은 여전히 눈앞에서 일렁거리고 있었으며, 이방인의 머리 위에는 웬 슬라임처럼 생긴 새파란 녀석이 손을 쭉 늘려 강물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싹 들어올려서 다른 곳에 뿌리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근데 그냥 뿌리기엔 부피가 너무 크니까 잠시만 기다려 봐.”
그리 말한 엘레인은 우선 운디네에게 멈춰 세운 강물을 들어올려 달라고 부탁했다.
터무니없는 말에 옆에 있던 조지의 동공이 잘게 떨렸으나, 이어서 보이는 광경은 그를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무우뭇!
(그 정도쯤이야 식은 수프 먹기지!)
그 말을 끝으로 운디네는 범람하던 강물을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조지의 곁을 그대로 지나쳐 강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위로 옮겼다.
“좋아. 이제 그대로 물과 분리시키자.”
-무웃!
운디네가 짧은 기합 소리를 내자 공중에 떠오른 거대한 물 덩어리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콰르르 쏟아졌다.
뿌리째 뽑힌 나무와 돌덩이. 그리고 엄청난 양의 토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좋아. 그다음엔 옆으로 좀 옮겨서 비처럼 물을 떨어트리면 될 것 같아.”
-무뭇!
주문을 접수한 운디네는 곧바로 투명하게 맑아진 물 덩어리를 옆으로 옮겨 후두둑. 비처럼 뿌렸다.
쏴아아—.
언제부턴가 바람이 잦아들고 빗줄기가 약해진 하늘 아래에 새로운 소리가 덧씌워졌다.
엘레인의 뒤를 따라온 오르칼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조용히 입을 다물며,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이동용 스크롤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엘레인. 어디 다친 덴 없어?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고?”
“응. 난 괜찮아.”
“다행이다.”
오르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근데 그 미소가 이상하게 위협적이어서 엘레인의 어깨가 절로 움츠려졌다.
“…오빠?”
“있잖아, 엘레인. 다음엔 위험하게 나서지 말고 안전하게 몸을 빼도록 해. 굳이 그런 위험한 일에 끼어들 필요는 없잖아?”
“엥?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그들의 목숨을 모두 합쳐도 너 하나만큼 소중하지는 않아.”
오르칼이 환하게 웃는 낯으로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다.
물론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가족이 더 중요하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너만 생각하라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로 인해 꾹 참고 있었던 무언가가 터진 듯하다.
“그래서 대답은?”
“…노력해 볼게.”
“그냥 노력만으론 안 돼. 열심히 노력해야 해.”
“넵.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엘레인은 재빨리 몸을 바로 하며 절도 있게 외쳤다.
그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됐는지 오르칼도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휴. 이러다가 황제처럼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엘레인은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못해 철철 넘치는 시나리오에 울상을 지었다.
뭘 하든 꽁꽁 싸매려는 사람이 둘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연해진 엘레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다, 당연하지. 그냥 잠깐 무서운 상상을 했을 뿐이야.”
“무서운 상상?”
오르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질문하려던 순간.
저 멀리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지! 내 손주!”
“하, 할머니.”
몸을 일으킨 조지가 허둥지둥 달려오신 할머니를 부축했다.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숨이 넘어갈 정도로 달려오다니.
이런 분을 혼자 두고 죽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기도 무서운 생각을 훌훌 털어낸 조지는 가쁜 숨 때문에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할머니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전 괜찮아요. 저분들이 절 구해주셨거든요.”
“아이구우. 고마워라. 우리 손주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
손주를 마주 끌어안은 노인이 엘레인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에 엘레인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오르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걸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고마우이. 고마우이….”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그런 말을 건넨 건데도 노인은 감사의 인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엘레인은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매만지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상에나. 이게 다 무슨 일이래.”
멀리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강물을 멈춰 세우고 그것을 그대로 옮겨 처리하는 과정까지 빠짐없이 목격한 마을 사람들이 홀린 듯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에는 언제 비바람이 몰아쳤냐는 듯 조용했고 모든 강물을 처리한 운디네는 이미 모습을 숨긴 지 오래였다.
그래. 그랬기 때문일까.
“아, 아아.”
마을 주민들은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질퍽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느닷없는 그들의 행동에 엘레인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뒤.
가장 선두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촌장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아! 마운틴파파시여!”
“???”
뜬금없는 그의 외침에 엘레인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한 그들의 모습에 엘레인은 다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왜, 왜 이러세요. 다들 일어나세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마치 광신도와 같은 그들의 광기 어린 눈빛에 엘레인의 두 눈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엘레인이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촌장의 맛탱이가 간 눈도 엘레인을 따라갔다.
그리고는 넙죽 절을 하며 말하기를.
“마운틴파파시여. 우리 마을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마운틴파파가 아니에요!”
“아, 그러고 보니 아리따운 여성이시죠? 그러면 마운틴파파가 아니라 마운틴마마이신 건가…?”
엘레인이 격렬하게 부정하자 촌장이 괴상한 쪽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파란이 되어 마을 주민들에게도 퍼져나갔다.
“내 생각에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마마께 파파라고 해서 화가 나신 게 틀림없어요.”
“당장 염소의 배를 갈라서 제물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 저쪽으로 염소들이 도망치던데. 당장 가서 잡아 옵시다!”
엘레인은 당장이라도 조지가 구한 염소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것처럼 구는 주민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자들은 봤어도, 멀쩡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은 처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