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황궁으로 떠나기 전, 엘레인 일행은 그란디스 국왕을 찾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함인데, 그란디스 국왕은 껄끄러움만 가득했던 첫 만남 때와 달리 아주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다들 고생 많았네! 어서 이리 와서 앉으시게.”
국왕은 우선 그들을 푹신한 소파 위로 안내했다.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달콤한 오렌지 주스와 과자를 테이블 위에 세팅했고 엘레인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으음. 그런데 자네 어디 아픈가?”
예전과 달리 멍하면서도 힘이 없어 보이는 엘레인을 보고 의아함을 내비쳤다.
어째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 걱정이 되어 묻자 엘레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그러면서 하핫 웃는 모습은 영 힘이 없어 보였다.
오르칼은 그런 엘레인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낯을 띠었다.
아침부터 엘레인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캐치한 오르칼은 국왕에겐 나 혼자 다녀오겠다며 말렸으나, 엘레인은 괜찮다며 따라나섰다.
무작정 막아 세울 수 없었던 오르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엘레인과 함께 국왕을 알현하며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황궁으로 돌아가길 요망했다.
“큼큼. 그렇군. 어쨌든 수고 많았네.”
그리고 그러한 오르칼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란디스 국왕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며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덕분에 성공적으로 산업 단지 설립을 시작할 수 있었네. 아, 그런데 자네들 드워프들과 친한가? 우리 왕국에 드워프들을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그들만큼 실력이 좋은 자들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설마 드워프들을 건들려는 생각인 건 아니죠?”
“나는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답습할 생각이 없네. 오히려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뿐이지. 물론 그러고 싶어도 감정의 골이 워낙 깊어서 시도조차 못 하고 있었지만…. 자네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게 됐지 뭔가.”
국왕의 말에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마음으로 접근하고 싶다는데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충분한 배상을 주어 지난 잘못을 깔끔하게 청산하는 편이 나았다.
“하여튼. 많은 걸 도와줬으니 우리도 대가를 내놓아야지.”
그란디스 국왕은 씩 웃으며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도시화의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물론이고, 드워프들에게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것도 모자라 태풍이 발생했을 때 페르비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이건 뭐, 왕관을 내려놓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국.
천천히 눈을 내리감은 국왕은 진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맙네.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하지.”
그 누구에게도 자의적으로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나라를 살려주고 내 국민들을 살려준 자들에 대한 압도적인 감사.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국왕은 심드렁한 얼굴의 오르칼과 환하게 웃고 있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여기. 자네들이 원하는 것이네.”
그가 꺼낸 것은 운하 개설에 동의하는 내용의 서류였다.
그란디스 왕국을 찾은 본래 목적.
그것을 받아든 엘레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 *
필요한 것을 모두 얻은 엘레인 일행은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이동용 스크롤을 찢었다.
드디어 황궁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익숙한 우리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묘한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고 눈을 뜨자 반가운 장소가 눈에 보였다.
그런데.
“어? 여긴 집무실 아니야?”
아무래도 이 이동 스크롤. 황제의 집무실이 목적지인가 보다.
반가운 장소이긴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장소 선정에 멍하니 눈을 끔뻑이자 뒤쪽에서 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한창 일을 하고 있었는지 책상에 앉아 있던 황제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빠?”
“엘레인. 드디어 돌아왔….”
“아가야!”
황제가 무어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번엔 뒤쪽에서 누군가가 엘레인을 확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무실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는지, 홍차 향이 물씬 풍기는 황태후가 엘레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응?”
“물론이죠.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요. 그리고 이거.”
“…그놈이 용케 동의서에 사인을 했군. 역시 내 딸이야. 믿고 있었다.”
엘레인이 동의서를 꺼내 들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황제가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딸아이가 고생해서 가져온 결과물을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둔 황제는 다시금 엘레인을 바라보며 작은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간만에 딸아이와의 재회를 만끽하려던 그때.
“엘레이이이인—!”
멀찍이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르닐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벌컥—!
“엘레인! 드디어 돌아왔구나!”
창문을 열고 황제의 집무실로 무단 침입한 아르닐이 환하게 웃으며 엘레인에게 다가왔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양쪽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아르닐은 엘레인의 손을 잡고 두 눈을 불쌍하게 떴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오르칼 형만 아니었으면 바로 쫓아가는 건데….”
“어…. 오르칼 오빠가 뭐라고 했어?”
엘레인이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묻자 아르닐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오르칼을 노려보았다.
“역시 형 혼자서 결정한 거였구나?”
아르닐이 따지고 들자 오르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더 이상 말하면 죽이겠다는 듯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런 그에게 아르닐이 반항을 할지 말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던 와중.
이번에는 두두두두! 커다란 말 한 필이 달려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꼬맹아!”
“아니, 우리 아가가 왔다는 소식도 전하지 않았는데 다들 어찌 알고 온 게야?”
엘레인의 옆에 꼭 붙어 있던 황태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아르닐과 라네즈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아르닐이 별거 아니라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집무실에 이동식 스크롤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마나의 흐름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바로 날아왔죠.”
“그럼 라네즈 너는?”
“저는 아르닐 저 녀석이 ‘엘레인!’하고 부르면서 날아가는 게 보여서 같이 달려왔는데요?”
“응? 그렇구나. 본의 아니게 우리 셋째가 알람 역할을 하고 말았구나?”
황태후가 후후 웃으며 말하자 아르닐은 아뿔싸! 하며 제 입을 막았다.
너무 기뻤던 나머지 요놈의 입이 주책을 떨어서 바보 형을 부르고 말았다.
제 손으로 라이벌을 늘리고만 아르닐이 한숨을 푹푹 내쉬자 라네즈는 그쪽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엘레인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하기를.
“치사하게 형만 우리 꼬맹이랑 놀러 가고 말이야. 나도 꼬맹이랑 같이 놀러 다니고 싶단 말이야.”
“라네즈, 우린 놀러 간 게 아니라 일하러 간 거다. 뭐, 그래도 무턱대고 달려오지 않고 참은 건 칭찬해주도록 하지.”
“그야 형이 그란디스 왕국으로 찾아오면 우리들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면서 협박했으니까 그렇지.”
“…어휴. 저 바보.”
당당하게 말하는 라네즈의 모습에 아르닐은 제 이마를 짚었다.
엘레인의 앞에서 그런 사실을 밝혀버리다니.
저 바보는 첫째 형한테 평생 괴롭힘을 당하면서 살고 싶은 건가?
“너….”
아르닐의 예상대로 오르칼은 자신이 썼던 편지 내용을 숨김없이 밝혀낸 라네즈를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봐주었다.
아마 엘레인은 제가 동생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실망할 테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에, 오르칼은 퍽 당혹스러운 얼굴로 엘레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엘레인?”
쌔액. 쌔액.
오르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밭은 숨을 내쉬는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심각한 오르칼의 표정에 마찬가지로 엘레인의 상태를 확인한 황태후와 황제. 그리고 쌍둥이 형제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엘레인!? 괜찮은 건가?”
“나, 난 괜찮….”
풀썩. 황태후의 품에 안겨 있던 엘레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황가 가족들은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 * *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내용은 황가에서 가장 사랑받는 황녀님이 쓰러졌다는 것으로, 덕분에 황궁의 분위기가 깊게 침잠했다.
한편, 황제는 엘레인의 방에 모여든 사제들과 의원들을 바라보며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쓰러진 이유를 알겠나?”
“으음. 아무래도 몸살인 것 같습니다.”
“몸살?”
“예. 일을 많이 해서 몸에 무리가 간 거지요. 여태까지 계속 피로가 축적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번에 쌓여 있던 것이 뻥 터진 것 같습니다.”
사제의 진찰 내용에 황제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황태후와 오르칼, 쌍둥이 형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아서 엘레인의 몸에 피로가 축적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매번 일이 끝나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며 환하게 웃던 엘레인이었기에 더 그랬다.
“내,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거늘….”
“그란디스 왕국에는 어떻게 해서든 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나….”
“억지로 황녀님의 자유를 막으면 심적 스트레스를 주게 됩니다. 몸살은 심적 스트레스를 받아도 발생할 수 있으니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의 성장에 그리 좋지 못하고 말이죠.”
곁에 있던 의원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결국, 아이의 행동에 대한 자유를 막지 않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곁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황제는 의원의 말을 깊이 새겨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몸살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지? 신성력으로도 치료가 가능한가?”
“그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신성력으로 외상은 치료할 수 있지만, 몸살처럼 어떤 증상이나 병은 치료하기 힘들거든요.”
“그럼, 아예 방법이 없는 건가?”
“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사제가 난감한 기색으로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던 와중.
조심스레 첨언했던 의원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런 그에게 황제가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자, 의원은 잔뜩 긴장한 낯으로 끙끙 앓고 있는 엘레인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아마 황녀님께선 지금 몸이 무척 쑤시고 아플 겁니다. 고열에 시달리고 계시니 두통도 상당할 테죠.”
의원의 말에 황가 가족 모두가 우울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좋은 것만 보고 먹으며 살아도 모자랄 판에 아이가 이렇게 아파하니 가슴이 아플 수밖에.
의원은 그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몸살은 다른 게 없습니다. 우선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고, 탈수를 막기 위해 꾸준한 수분 섭취가 필수입니다. 아, 물론 찬물은 금지입니다. 따뜻한 물이나 미지근한 물을 자주 마셔야 합니다.”
“그것만 지키면 되는 건가?”
“아뇨. 충분한 휴식은 물론이고 충분한 수면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영양이 풍부하거나 면역력 회복에 필요한 음식을 드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것만 지키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의원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방법은 이미 의원 협회에서 직접 공유한 내용으로, 몸살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안타깝게도 처방약은 아직 개발하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황녀님의 병세는 금세 회복될 것이다.
“좋다. 그대의 말을 따라 엘레인을 간호하도록 하겠다.”
의원의 확신에 가득 찬 대답에 황제와 다른 네 사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엘레인의 몸살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슨 일이든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