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침대 맡에 딱 붙어 앉은 황태후는 엘레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뜨거운 열에 밭은 숨을 내쉬는 엘레인은 참으로 힘겨워 보여서 아이를 바라보는 황태후의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짙게 물들었다.
“이런. 한 번 갈아줘야겠구나.”
몸에 열이 많이 나기 때문인지 이마에 올려놓은 수건은 금세 미지근하게 변했다.
황태후는 엘레인의 이마에 얹어 놓았던 수건을 깨끗한 물에 한 번 빤 뒤 물기 없이 꽉 비틀어 짰다.
이후 다시 엘레인의 이마 위로 다시 곱게 갠 수건을 올려놓으려던 그때.
닫힌 문이 벌컥 열리며 황제와 오르칼이 튀어나왔다.
“잘 다녀왔느냐?”
“그렇습니다.”
짧게 대답한 황제의 손에는 웬 쟁반이 들려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죽을 끓여온 듯했다.
그렇게 황제와 황태후가 서로 인사하는 사이.
침대 맡으로 다가온 오르칼은 조심스레 엘레인의 상체를 일으켜주고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엘레인. 힘들겠지만 잠시 눈 좀 떠볼래?”
“으응….”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꿈속을 헤매고 있던 엘레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천천히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숟가락으로 무언가를 퍼서 후후 불고 있는 오르칼이었다.
원래라면 직접 먹여주는 사람은 누가 될 것인지 서로 싸워도 모자랄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맺어진 평화 협정인 것이다.
“자. 아~ 하자.”
“아….”
잘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자 알맞게 식은 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오물오물.
두 부자의 기대 가득 찬 시선을 느끼며 고소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간간이 느껴지는 죽을 꼭꼭 씹어 삼킨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다. 이거 무슨 죽이야?”
“원기 회복에 좋다는 전복죽이야. 맛있다니 다행이야.”
“내, 직접 가서 가장 싱싱한 놈으로 골라왔지.”
흡족하게 웃는 오르칼과 자랑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황제의 모습에 엘레인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복죽? 전복 그거 구하려면 자유도시까지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황궁에는 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으니까.”
황제는 별로 큰일도 아니라는 듯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엘레인이 생각하기엔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넘어갈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전복 하나 구하기 위해서 황제가 자기 자리를 비우고 황궁의 고급 인력을 이용해서 직접 자유도시에 행차했다는 말이잖아?’
늘어놓고 보니 더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를 위해 고생해준 두 사람의 마음도 크게 와닿았기 때문에 엘레인은 그저 고맙다며 옅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침 댓바람부터 시장을 돌아다니며 크고 실한 전복을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두 사람에게 최고의 보상이었다.
“자.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라. 건강해지려면 먹기도 잘 먹어야지.”
이번엔 황제가 정성스레 죽을 후후 불더니 엘레인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어째 아기 때로 돌아간 그 느낌에 엘레인은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고소한 전복죽을 천천히 받아먹었다.
“음? 라네즈 오빠?”
“아, 꼬맹아. 몸은 좀 괜찮아?”
한참 전복죽을 먹고 있을 무렵.
엘레인은 문가에서 기웃거리던 라네즈를 발견했다.
걱정은 되지만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 계속 그의 발목을 잡았는지 차마 방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것이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당연하지만 엘레인은 그런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오빠도 얼른 들어와. 나 그냥 몸살이라서 오빠한테 옮을 일은 없어.”
“아니,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니라 너 쉬는 데 방해될까 봐….”
“아니야. 전혀 방해 안 돼.”
몸은 여전히 불덩이 같았지만, 전복죽으로 배를 채운 탓일까?
조금은 기력을 회복한 엘레인이 웃으며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다가온 라네즈는 반 정도 남은 죽 그릇을 들고 있는 황제와 후후. 스푼 위의 죽을 식히고 있는 오르칼을 힐끔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이번엔 밖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인! 밥 다 먹었어?”
방 안에 가득한 고소한 냄새에 대충 식사를 마쳤겠거니 했던 아르닐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에 엘레인이 대답하기 전.
오르칼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넌 또 왜 왔지?”
“뭐야. 그 불청객을 바라보는 눈빛은. 내가 뭘 가져왔는지 알면 그런 시선은 못 보낼 텐데?”
오늘따라 아르닐은 매우 당돌했다.
오르칼은 지지 않고 콧대를 세우는 그를 보며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뭘 가져왔기에 그러는지 매우 궁금하구나.”
“그러려면 우선 식사를 마쳐야 해. 엘레인, 밥은 다 먹은 거야?”
“아, 으응. 이제 슬슬 배가 불러오던 참이야.”
엘레인은 볼록해진 배를 살살 만지며 답했다.
기껏 준비해준 오르칼과 황제에겐 미안하지만, 점보 사이즈의 그릇 안에 담긴 죽들을 모두 먹는 건 엘레인에게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엘레인이 미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자 황제와 오르칼은 조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대체 뭘 가져왔는데?”
“후후훗. 이름하여 체력 만땅 회복 물약!”
라네즈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자 아르닐이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그마한 병 하나를 꺼냈다.
이후 뿅! 소리와 함께 마개를 열자마자 맡아지는 달콤한 복숭아 향기.
엘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이자, 아르닐은 곧바로 분홍빛 액체가 든 병을 자그마한 손에 쥐여주었다.
“자, 쭉 들이켜 봐. 그러면 소모됐던 체력이 회복될 거야.”
“잠깐. 그거 제대로 인증된 거 맞나? 설마 인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걸 엘레인에게 먹이려는 거면….”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걸 엘레인한테 먹일 리가 없잖아. 오늘 황궁에 있는 사용인들이랑 기사들한테 전부 먹여서 확인해 본 거니까 부작용은 걱정하지 마. 바로 마탑 인증을 받아도 될 정도로 완벽한 물약이니까 말이야.”
아르닐은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했다.
부작용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소리에 엘레인의 입이 절로 벌어졌지만, 오르칼은 다르게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지.”
“자, 들었지? 한번 쭉 들이켜 봐.”
“알겠어.”
분홍빛 병을 어설프게 움켜쥔 엘레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병을 기울여 물약을 맛본 엘레인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르닐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맛이 이상해?”
“아니. 엄청 맛있어.”
이렇게 완벽한 복숭아 주스 맛이 나는 물약은 처음 먹어본다.
엘레인은 감탄사를 흘리며 체력 만땅 회복 물약을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어때? 힘이 좀 나는 것 같아?”
“으음. 원래는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는데 지금 상태면 왠지 가볍게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말이 맞지? 이 약이 아주 효과가 좋다니까?”
엘레인의 낯빛이 조금 좋아지자 아르닐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빠른 회복의 길을 찾은 황제와 황태후는 그런 아르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녀석. 간만에 큰일을 했군.”
“열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체력이 좋아지면 병세도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정말 장하다, 우리 손주. 고생 많았어.”
아르닐은 어깨를 으쓱였다.
비록 이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긴 했지만, 겨우 그 정도야 뭐.
우리 엘레인을 위해서라면 몇 날 며칠을 새울 수도 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혹시 그 약. 꾸준히 만들 수 있는 건가?”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하루에 한 병 이상은 안 돼. 물약 과다복용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매일 이 시간에 식후 복용을 하면 되겠군.”
“그게 가장 베스트야.”
아르닐의 확답에 엘레인의 물약 복용 시간이 정해졌다.
이대로만 간다면 엘레인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터.
희망을 찾은 그들은 조금씩 차도를 보이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했으니….
‘나는…. 엘레인에게 대체 무얼 해줄 수 있지?’
라네즈는 안색을 굳혔다.
그는 아버지와 첫째 형님처럼 싱싱한 전복을 볼 줄도 모르고 전복죽을 끓일 줄도 몰랐으며 아르닐처럼 체력을 회복시키는 물약을 만드는 건 더더욱 할 줄 몰랐다.
‘나도 오르칼 형님이랑 아르닐처럼 머리가 똑똑했으면 좋았을 텐데.’
평소 검만 휘두를 줄 아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라네즈는 굳은살이 콕콕 박인 손바닥을 내려다보고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을 우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없는 동안 엘레인을 잘 부탁하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바로 부르고. 알겠느냐?”
그때 황제와 황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위치에 있기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네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적막감을 깨고 아르닐이 말문을 열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어? 나갈 거 아니면 여기 와서 앉아.”
의자를 끌어와 앉은 아르닐은 멍하니 서 있는 라네즈를 쳐다보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네즈는 잠시 그런 아르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옆자리가 아닌 반대편 자리로 이동했다.
“바보 형. 왜 거기로 가?”
“꼬맹이 이마 위에 물수건 올려주려고.”
“형이? 잘 할 수 있겠어? 불안한데….”
“참 나,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거든?”
라네즈는 툴툴거리면서 엘레인이 눕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대야 위에 걸쳐 놓았던 수건을 깨끗한 물에 다시 적시고는 그대로 쭉 짜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자, 이제 올린다?”
“으응.”
엘레인이 살짝 긴장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라네즈가 꾹 짜낸 수건을 어떻게든 잘 접어서 동그란 이마 위로 올렸다.
그런데.
질퍽—.
“아, 형! 수건 제대로 짜야지. 물이 그대로 흘러나오잖아!”
“어?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너무 세게 짜면 수건이 망가지니까 적당히 짰는데.”
“적당히가 아니라 물기 없이 꽉 짜야 된다고.”
“아, 알았어. 다시 제대로 해 볼게.”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은 라네즈는 잠시 흠칫했다.
차가운 물이 그대로 흘러넘치는 수건 때문에 엘레인의 눈에서 마치 눈물이 흐르는 듯한 착시 현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챱 소리와 함께 허둥지둥 물수건을 다시 가져온 라네즈는 걱정스레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꼬, 꼬맹아. 괜찮아?”
“난 괜찮아. 대신 다음번엔 제대로 물을 짜서 올려줘야 해?”
“물론이지!”
엘레인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하자 라네즈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리고 이번엔 아주 제대로 힘을 주어서 물기를 꾹 짜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번에는 뿌드득 소리를 내며 수건이 말라비틀어진 지렁이처럼 쪼그라들더니 종국에는 뚝 하고 끄트머리가 끊어지는 게 아닌가?
“뭐야. 제대로 짜니까 이렇게 되는데?”
“아니, 힘을 대체 얼마나 줬길래 그게 뜯어지는 거야? 힘 조절을 제대로 했어야지.”
“힘 조절만큼 힘든 게 어딨다고…. 안 되겠다. 다른 걸 준비해 올게.”
“라네즈 오빠. 굳이 뭘 하려고 하지 않아도 난 괜찮은데.”
“네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 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해줄 테니까 꼬맹이 너는 편히 쉬고 있어.”
안절부절못하던 라네즈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다들 제대로 간병하고 있는데 나 혼자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라네즈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