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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화 (267/417)

268화

“이건 매실이잖아? 매실을 발효시킨 거 맞지?”

라네즈도 매실액이 뭔지는 알았다.

사제가 없는 발론드 공작가에서 차가운 음식을 과하게 먹었다가 배탈이 났을 때 날뛰는 속을 진정시켜준 게 바로 매실액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게 배탈 났을 때 먹는 거 아니었어? 몸살에 이걸 먹어서 낫는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제가 어렸을 때 몸살이 났는데, 부모님이 이걸 주니까 바로 낫더라고요. 우리 집 막내도 자주 몸살을 앓곤 하는데 이걸 먹으면 바로 나아요.”

매실액을 물에 타서 먹으면 더위 해소와 기력 회복에도 좋은 효과를 보일 뿐 아니라 감기나 몸살을 앓을 때도 열을 가라앉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의학적 지식도 없고 따로 연구해 본 적이 없는 베일리로서는 이처럼 정확하게 효능을 설명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직접 먹어 보고 겪어 본 경험으로 말할 수 있었다.

체내의 열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매실액만 한 것이 없다고!

“물론 이것만 먹고 끝내면 안 되죠. 먼저 황녀님께 이걸 먹이고 난 뒤에는 저 대신 옆에서 진득하게 간호해주셔야 해요.”

“어? 너 대신…?”

베일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고 있던 라네즈가 문득 이상한 걸 들었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아이쿠.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오고 말았군.

한 발짝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베일리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주제를 돌렸다.

“세상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러다가 황녀님께서 잠자리에 들겠어요. 그러기 전에 얼른 매실액을 드시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지. 얼른 서두르자!”

벌써 창밖으로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더 늦기 전에 빈 병에 매실액과 물을 적당히 섞어 챙긴 베일리와 라네즈는 서둘러 현관 앞으로 이동했다.

“벌써 가게?”

“그래야지. 외출증도 안 끊고 나와서 빨리 돌아가야 해.”

베일리의 말에 토니는 잠시 누나의 직장 동료인지 상사인지 모를 애매한 관계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뜨며 말하기를.

“그쪽. 행여나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말아요. 내가 다 지켜볼 거야.”

“…엥? 수작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느닷없는 경고에 라네즈가 의문을 표했다.

그에 토니가 무어라 더 대답하려던 순간.

베일리가 재빨리 토니의 말을 가로챘다.

“얘가 진짜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발 닦고 잠이나 자.”

“뭐? 내가 걱정을 해줘도 누난….”

“그래그래. 걱정하는 건 잘 알겠으니까, 난 이만 가 볼게. 그럼 다음에 보자!”

토니의 잔소리를 사전에 차단한 베일리는 다급히 라네즈의 등을 밀어댔다.

그 탓에 무어라 설명을 요구하려던 라네즈는 얼떨결에 문밖으로 밀려났다.

“언니, 잘 다녀와!”

“잘생긴 형아도! 다음에 또 와!”

“자, 잠깐. 누나, 나랑 얘기 좀…!”

상당히 귀찮아질 것을 예감한 베일리는 토니가 문 앞으로 달려들기 전에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토니의 철없는 행동을 사과하기 위해 라네즈를 돌아봤다.

그런데.

“?”

베일리는 가만히 서서 히죽 웃고 있는 라네즈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혹시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나오시는 건가?

그에 더욱 죄송스러움을 느낀 베일리가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그러던 그때. 흐뭇하게 웃고 있던 라네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네 동생들 눈이 꽤 높네.”

“네? …아, 혹시 잘생겼다는 말 때문에?”

설마 하며 물어보자 라네즈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솔직한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베일리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다행히 토니 말은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네.’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베일리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라네즈에게 다가갔다.

“그럼 얼른 돌아가 볼까요?”

“그래!”

힘차게 답한 라네즈는 매실액이 든 병을 꼭 끌어안았다.

* * *

라네즈와 베일리가 황궁으로 복귀하고 있는 한편.

오르칼은 엘레인의 열을 재어 보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

“이상하군. 아까보다 열이 더 올랐다.”

달이 뜬 밤.

조금 전까지 요지부동이던 체온은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올랐다.

“혹시 바보 형이 준 그 인삼 때문에 열이 오른 거 아니야?”

“흐음. 고작 한 입으로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 무시할 순 없겠지.”

“젠장. 그 인간은 애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대체 어딜 간 거야?”

아르닐이 분통을 터트리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에 열이 올라 힘겹게 눈을 깜빡이던 엘레인은 자그맣게 목소리를 내었다.

“너무 그러지 마…. 오빠가 알고 그런 건 아니잖아.”

“그래도 화나잖아! 최소한 뻔뻔하게 옆에 앉아서 간병이라도 하고 있으면 내가 말을 안 하지. 아무리 들 낯짝도 없다지만 냅다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아르닐은 평소처럼 뻔뻔하게 구는 게 아니라 상처받은 얼굴로 도망친 라네즈를 떠올리며 씩씩거렸다.

그 모습에서 선명한 걱정을 읽어낸 엘레인은 조용히 웃고 말았다.

“…수건이 벌써 미지근해졌네. 잠시만 기다려봐.”

엘레인의 미소에 흠칫한 아르닐은 괜히 애꿎은 물수건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건 그리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걱정되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수건을 짜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그리 편치 못했다.

그렇듯 아르닐이 속상해하고 있던 와중.

오르칼은 웬 두꺼운 책을 꺼내 들더니 파라락!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내용을 뒤적거렸다.

“형, 뭐해?”

“열을 내리는 데에 효과적인 식물을 찾는 중이다. 마땅한 약이 없으니 식이요법으로 방법을 찾아야지.”

하긴 체내의 열을 올리는 인삼도 존재하니 열을 내리는 데에 특출난 식물도 존재할 터다.

아르닐은 수많은 식물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물이자 약초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책을 뒤적거리는 오르칼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체력 만땅 물약을 만드는 게 아니었어.”

아르닐은 안일했던 제 선택을 탓하며 울상을 지었다.

열 정도야 시간이 지나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병을 회복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체력 회복 물약을 가장 먼저 만들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엘레인을 괴롭히는 건 부족한 체력이 아니라 온몸을 불덩이처럼 만드는 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력 회복에 좋은 물약이 아닌 해열제를 만드는 건데.

아르닐은 괜히 울적해져서는 꽉 잡은 엘레인의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파라락. 바쁘게 넘어가던 책장 소리가 드디어 우뚝 멈췄다.

“찾았다.”

“정말? 그래서 그게 뭔데? 열매? 이파리? 그것도 아니면 뿌리?”

아르닐은 희망을 가득 안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그는 한창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상인들을 모조리 깨워서라도 오르칼이 말하는 재료를 가지고 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오르칼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지금 엘레인에게 필요한 건….”

“꼬맹아! 나 다시 돌아왔어!”

“매실을 발효한… 음?”

설명을 끊어내는 우렁찬 목소리에 오르칼의 시선이 자연스레 등 뒤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한 채.

엘레인의 열을 내려줄 액체가 담긴 병을 꽉 쥐고 등장한 라네즈를 말이다.

“…뭐야. 대체 무슨 낯으로 돌아온 거야?”

어디선가 우울한 낯짝으로 궁상을 떨고 있을 줄 알았던 라네즈가 등장하자, 아르닐의 입에선 걱정했다는 말 대신 틱틱거리는 말투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뭐, 평소와 같은 쌍둥이 동생의 시비였기에 라네즈는 뻔뻔하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엘레인의 앞에 선 라네즈는 대뜸 그녀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외쳤다.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널 돕고 싶은 마음에 괜히 급해져서 너를 더 아프게 할 뻔했어.”

“라네즈 오빠….”

엘레인은 열이 올라 아픈 와중에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망칠 때까지만 해도 상처를 받아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는 현재 굳건한 의지로 강하게 반짝였다.

‘다행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구나.’

어떻게 해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그는 상처를 딛고 일어난 상태다.

엘레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아까는 잡지 못했던 라네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난 괜찮아. 오빤 나를 돕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꼬맹아….”

라네즈가 감격한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는 제 손을 잡은 엘레인의 손을 꽉 마주 잡더니 잠깐 발밑에 내려놓았던 병을 들어 올렸다.

“있잖아. 이거 매실액이라는 건데 네 열을 내려주는 데에 도움이 될 거야.”

“정말?”

엘레인이 놀라 묻자 라네즈가 이번엔 정말이라는 듯 눈을 빛냈다.

하지만 뒤에서 듣고 있던 아르닐은 그게 아니었는지 찌푸리고 있던 눈썹을 한껏 들썩였다.

“뭐? 그래놓고 이번에도 이상한 부작용을 달고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다.”

실로 그럴듯한 질문이었지만, 옆에 있던 오르칼이 바로 정정했다.

그는 그 말이 진짜냐는 듯 바라보는 아르닐에게서 시선을 떼고 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매실을 발효하여 만든 즙은 열을 내려주는 데에 탁월한 것은 물론이고 원액을 그대로 섭취하거나 과도한 섭취만 하지 않으면 이렇다 할 부작용도 발생하지 않는다.”

“아, 이거 이미 물로 섞은 거야. 한 잔 그대로 따라 마시면 돼.”

베일리와 함께 직접 물을 섞은 라네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에 오르칼은 협탁 위에 있던 깨끗한 컵을 바로 세워 물에 희석된 매실액을 쪼르르 따라냈다.

“자. 천천히 마셔.”

라네즈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엘레인은 천천히 매실액을 마셨다.

살짝 걸쭉하고 맛이 새콤한 것이 그냥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이걸 마셨으니까 아마 오늘 밤에 땀이 쭉 빠지면서 열이 확 내려갈 거야.”

“응. 고마워.”

라네즈의 친절한 설명에 엘레인은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것이 또다시 큰 위로가 되었는지 라네즈는 크게 감동한 얼굴로 엘레인을 곱게 눕혀주고는 대야에 있던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오늘 밤엔 내가 간병해줄게! 꼬맹이 너는 마음 편히 푹 쉬어.”

“잠깐. 그 말은 밤을 새우겠다는 말이야?”

엘레인이 놀라 묻자 라네즈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괜찮아. 나 사흘 내내 밤새운 적도 있거든. 하루 정도는 거뜬해.”

“그래도….”

“어허. 괜찮다니까 그러네?”

결국, 라네즈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엘레인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르닐과 오르칼도 오늘 그가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허허롭게 웃기만 할 뿐 크게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훨씬 더 섬세해진 라네즈의 간병을 받으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밤이 깊어져 갔다.

* * *

다음날.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난 엘레인은 열이 모두 내린 것은 물론이고 몸살 기운까지 싹 날아갔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엘레인은 이른 아침부터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던 라네즈와 아침 일찍 찾아온 황태후. 그리고 황제와 남은 두 황자에게 제 몸 상태를 알리며 쾌차를 선언했다.

물론 쾌차했다고 해서 침대 밖으로 바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엘레인에게 연신 다행이라고 말하던 황태후는 아직 몸살 기운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침대 생활을 하루 더 권유했고, 황제는 기력 회복이 더 필요할 것 같다며 각종 귀한 식재료를 죽으로 만들어서 대접해주었다.

그 극진한 간호 덕분에 엘레인은 병세로 푸석해졌던 피부가 다시 탱탱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아프기 전보다 더욱 건강해진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자유를 찾은 엘레인은 오르칼과 함께 산책을 즐기는 중이다.

“음~ 신선한 공기.”

“밖으로 나오니까 기분 좋아?”

“당연하지. 안에서 맡는 공기랑 밖에서 맡는 공기는 차원이 다르다고.”

양팔을 벌리고 폐부 가득 신선한 공기를 마시던 엘레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 같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어쩌면 엘레인이 건강해졌다는 이유로 자꾸만 웃음이 터지는 걸지도.

‘…내가 방금 웃긴 말을 했던가?’

반면 갑작스럽게 터진 오르칼의 웃음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한 엘레인은 훈훈하게 웃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뭐, 아직은 바람만 불어도 웃길 나이니까.’

엘레인은 대충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어? 라네즈 오빠! 나 지금 산책 중인데 같이 갈래?”

몸살이 빨리 낫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라네즈.

그에게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가니, 라네즈가 미안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미안. 나 지금 갈 데가 있어서. 베일리한테 전해줘야 할 게 있거든.”

“그건… 고기 파이? 베일리한테 고기 파이를 주려고?”

“응. 내가 신세 진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듣자 하니 하녀가 하는 일들이 은근히 힘이 많이 든다던데 이거 먹고 힘 좀 내라는 의미로 준비해왔어.”

라네즈는 고기 파이가 든 바구니를 들고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엘레인은 ‘두 사람, 언제 이 정도로 친해진 걸까?’ 궁금해하며 그의 말에 답했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같이 산책하자.”

“그래. 나중에 또 봐!”

엘레인은 힘차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라네즈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미소 지었다.

멀어지는 라네즈의 발걸음이 왜인지 모르게 무척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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