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화 (271/417)

272화

플로스 영지로 가야 한다.

엘레인은 그리 결심했으나, 그렇다고 바로 영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저를 걱정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현재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 같이 모이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말하는 게 낫겠지. 플로스 영지는 내일 출발하는 게 좋겠어.’

편지를 고이 접은 엘레인은 최적의 시간대인 저녁 식사 시간에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는 평소대로 편히 휴식을 즐기도록 하자.

조만간 아주 바쁘게 움직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두는 편이 좋겠지.

“엘레인! 데리러 왔어!”

때마침 들려오는 아르닐의 목소리에 엘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일정인 세 황자들과 신나게 놀기를 실행하기 위해서. 환하게 웃는 낯으로 외쳤다.

“으응!”

* * *

황자들과 신나게 놀고 나니 해가 금방 떨어졌다.

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세 황자들과 함께 식당을 찾자, 황제와 황태후가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왔군.”

“후후.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도 재밌게 논 것 같구나. 배고플 텐데 어서 여기 앉으려무나.”

“네!”

서로 다른 반응에 히죽 웃으며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이블 위로 맛있는 요리들이 꽉 들어찼다.

오늘도 진수성찬인 저녁 식사 메뉴를 보며 눈을 반짝이던 엘레인은 오늘 그들에게 해야 할 말들을 떠올리곤 헤 벌어진 입을 딱 다물었다.

“왜 그러지? 메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때 황제가 엘레인의 표정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채고 시선을 보내왔다.

그에 신나게 고기를 씹어 삼키던 라네즈와 우아하게 방울토마토를 입안으로 쏙 집어넣던 아르닐.

그리고 엘레인에게 줄 요리들을 예쁘게 썰고 있던 오르칼과 황태후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엘레인은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할 말을 골랐다.

“그게…. 사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요.”

엘레인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리고 진지하게 말하자 황가 가족들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황태후는 왜인지 모르게 조금 긴장한 듯한 엘레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답했다.

“편하게 말하려무나. 어떤 고민이든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어디 들을 준비만 되어 있겠나? 든든한 나무처럼 의지가 되어줄 수도, 그 어떤 고민이든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해줄 자신도 있다. 그러니 걱정 말고 편히 털어놓도록.”

황태후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황제도 거들었다.

마치 무슨 고민이든 해결해줄 것 같은 그 뉘앙스에, 엘레인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었다.

“그럼 저 플로스 영지로 복귀해도 될까요?”

“뭐라고?”

뭐든지 이루어줄 것처럼 굴던 황제와 흐뭇하게 웃고 있던 황태후가 딱딱하게 굳었다.

플로스 영지는 생각할 틈도 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

설마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나?

아니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플로스 영지에서 사람이 왔다 간 건가?

혼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엘레인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내, 조심스레 질문했다.

“갑자기 플로스 영지에는 왜 돌아가려는 거지?”

“그래.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았잖느냐.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야?”

“어…. 그게 집사님한테서 연락이 와서요. 전서구로 편지를 받았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레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차분히 설명했다.

그 친절한 설명 덕분에 사건의 발단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아차 하며 이마를 짚었다.

이럴 수가. 하늘을 생각하지 못했다니.

그들은 전서구 사냥꾼이라도 고용했어야 했다고 뒤늦게 자책하며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네가 직접 가야 한다는 거지?”

“플로스 영지에 난민이 발생했대요.”

“그거 문제로군. 하지만 난민이 발생했다고 해서 네가 직접 관리할 필요가 있나?”

“물론이죠. 그 수가 만만치 않아서 플로스 영지에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후에 트러블이 생기지 않도록 조율할 생각이에요.”

그리 말하는 엘레인의 등 뒤로 광휘가 쏟아지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나 영지와 영지민들을 생각하는 참된 영주.

하물며 굴러들어온 난민들을 매정하게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데까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한다.

누가 보면 성녀가 따로 없다며 추앙할 정도로 가슴 따뜻한 영주님.

그러나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만큼은 우리의 엘레인이 가슴 따뜻한 영주님이 아니라 매정한 영주님이 되었으면 했다.

“난민을 모두 수용하는 건 좋지 못한 생각이다. 터전을 떠나 배를 곯는 그들은 무서울 게 하나 없는 놈들이지. 처음엔 너의 친절을 고맙게 생각하더라도 나중에 가서는 그것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데에 급급할 놈들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처음에 베풀었던 온정을 나중에 가서 주지 않을 때는 언제 살갑게 굴었냐는 듯 온갖 비난을 퍼부을 놈들이지.”

황제는 수많은 역사에서 거론되었던 난민들의 행동 패턴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엘레인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난민들을 받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일 테지.

“…그럼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엘레인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황제가 전하는 의도는 명백했다.

난민들을 수용하는 건 위험하니 그들을 모두 쫓아내라.

플로스 영지로 직접 갈 필요 없다.

그냥 여기서 명령만 내리면 될지니!

하지만 엘레인이 생각하는 황제의 의도는 조금 틀렸다.

“아니. 난 그저 난민들의 수용 문제를 다시 생각해줬으면 한다는 것뿐이다. 네가 플로스 영지로 돌아가는 것 또한 막을 생각이 없어. 딸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것이야말로 아버지로서 갖춰야 할 참된 덕목이 아닌가?”

“정말요…?”

엘레인은 웬일로 정상적으로 구는 황제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항상 쓸어버리자는 말부터 내뱉고 보는 그가 내 의사를 우선적으로 존중해준다니. 혹시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 아닌가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군. 난민들이 우리 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황제는 알고 있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엘레인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래서 그는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함께 가겠다.”

“네?”

두둥! 마치 그러한 효과음이 들리는 듯한 황제의 결정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얼마나 놀랐는지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오르칼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아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기사단은 두 개 정도만 데려가도 충분하겠지. 놈들이 너의 티끌 하나 건들지 못하도록 지켜줄 테니, 아빠만 믿어라.”

엘레인은 무려 직접 따라가서 몸소 지켜주겠다는 황제의 말을 들으며 벙쪘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정말이지 고마운데…. 생각해 보면 난민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바로 황제 아닌가?’

엘레인의 머릿속은 자동적으로 회귀 전 기억을 떠올렸다.

마왕이라고도 불리는 황제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달리지 않는 남자였다.

그러한 그는 냉혹했으며 실제로 난동을 부린 난민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전적이 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선 제국의 영지민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무리를 처단한 것에 불과하지만, 학살 루트를 탔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만약 난민들이 조금이라도 엘레인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그대로 주위를 피바다로 만들 수도….

“아, 아니에요. 아빠 바쁘잖아요. 그러지 말고 아빠는 여기 남아 있어요.”

피바다를 끝으로 생각을 멈춘 엘레인은 희게 질린 낯으로 도리질을 쳤다.

엘레인이 황제의 의무를 걸고넘어지자, 그는 난처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지? 내가 같이 가준다니까. 혼자 가는 건 너무 위험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 그러니까… 혼자 가는 게 걱정이라면 바쁜 아빠를 데려갈 필요 없이 여기 오빠랑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치?”

황제의 눈치를 보던 엘레인이 옆에 있는 황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라네즈와 아르닐.

그리고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맞이한 오르칼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당연하지!”

“구태여 아버지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아버지는 국정을 돌봐야 할 중요한 인물이니까.”

“그래. 엘레인 네 말대로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지.”

“네놈들….”

세 황자들이 사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자,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던 황제가 배신자를 보듯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실로 뒷일이 두려워지는 눈빛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물릴 만큼 황자들은 심약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 뿐인가?

오르칼은 오히려 반격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노려보실 것 없습니다. 어차피 아버지가 따라가 봤자 하실 일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무얼 할 줄 알고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거지?”

“기사단을 데려간다고 말한 순간부터 이미 아버지의 생각을 꿰뚫었습니다. 난민들이 엘레인을 건드리려 하면, 그들을 모두 쓸어버릴 심산이었겠죠. 제 말이 틀립니까?”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로군. 감히 내 딸을 건드린 놈들이다. 그럼 너는 놈들이 엘레인을 위험에 빠트렸을 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셈이냐?”

“물론 아니죠. 하지만 아버지처럼 무턱대고 그들의 목을 자르진 않을 겁니다.”

오르칼은 단호하게 말했다.

못된 놈들을 응징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인들의 목을 자르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첫째 형. 최소한 팔다리는 잘라야 하는 거 아니야? 엘레인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면 백마가 적토마로 바뀔 때까지 쓸어버리는 게 맞지. 나 그런 거 잘할 자신 있어!”

“둘째가 간만에 제대로 된 말을 하는군. 그때가 되면 놈들을 살려둘 가치도 없다.”

문득 의문이 생긴 라네즈가 순수하게 물었고 황제가 맞장구를 쳤다.

반면 엘레인은 라네즈까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경악하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라네즈도 요주의 인물이었네. 라네즈는 절대 데려가지 말아야겠다.’

엘레인이 그런 다짐을 하고 있을 거리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라네즈는 오랜만에 황제와 끈끈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물론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 엘레인이 정녕 그런 걸 원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

오르칼의 진지한 물음에 난민들을 어떻게 죽일지 작은 목소리로 논의하던 두 부자가 입을 다물었다.

오르칼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너희들 아직도 엘레인을 그렇게 몰라?’ 하는 눈으로 노려봐주었다.

그 동정심 가득한 눈빛에, 황제와 라네즈는 그제야 엘레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 혹시 지금이 타이밍인가?’

오르칼이 만들어준 황금 같은 기회다.

엘레인은 라네즈와 황제가 보내는 흔들리는 시선을 느끼며 재빨리 울상을 지었다.

“아빠랑 라네즈 오빠. 둘 그렇게 안 봤는데, 폭력으로만 해결하려고 하고. 정말 너무해요!”

이 악마들! 사탄이 사직서 쓸 것 같은 사람들!

이렇듯 질책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자 황제와 라네즈의 흔들리는 동공이 폭풍을 맞이한 돛단배처럼 더욱 요동쳤다.

“…엘레인.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놈들은 원래 죄를 지은 놈들이다. 원래 농민은 자기 땅을 벗어나면 안 돼. 그런 놈들이 무려 너를 건드리기까지 했다? 방금 내가 말한 건 전혀 과한 처사가 아니다.”

앞서 했던 말들로 설득할 수 없다고 여긴 황제는 아예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까지 끌고 와서 달래려고 애썼다.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뭐라고 말 좀 해 보라는 눈으로 황태후를 바라보자, 그녀도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렇고말고. 엄연히 신분제가 있는데 어디서 자기 본분을 저버리고 제 땅을 떠나느냐?”

아들의 SOS에 황태후는 최대한 발론드 공작의 말투를 따라 해 봤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엘레인의 어이를 상실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두 분, 엘레인 표정이 안 보입니까? 설득력 없는 설득은 거기까지 하시죠.”

오르칼의 한심하다는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그에 시무룩해 하며 입을 다물자 오르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제가 볼 때 난민 문제는 조금만 관점을 달리해 보면 평화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애초에 그들을 일반적인 난민으로 보는 것 자체가 틀렸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난민이 아닌 정령 신앙 숭배자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령 신앙?”

오르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 왕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정령 신앙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

하물며 플로스 영지로 흘러들어온 난민들은 대부분 토착 귀족의 영지에 살고 있던 영지민들이라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정령 신앙을 믿는 자들은 정령사를 무척 고귀하게 여깁니다. 건국왕이 정령사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그들이 엘레인이 있는 플로스 영지 인근으로 피난 온 겁니다.”

“그 말은… 설마. 그들을 엘레인의 편으로 끌어들이자는 말인가?”

황제의 말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르칼은 요점을 제대로 짚은 황제를 향해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정령 여왕의 환생이자 드워프 도시를 구한 정령사로 소문난 우리의 엘레인이 그들을 보호해주면, 정령 신앙 숭배자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오르칼의 은근한 물음에 엘레인을 비롯한 네 사람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들도 깨닫고 만 것이다.

이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일 아군을 대거 유입할 수 있는, 천군만마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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