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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화 (272/417)

273화

엘레인 베네딕트. 정령 여왕의 환생이면서도 드워프 도시를 구한 위대한 정령사.

심지어 이 정령사는 비록 모습은 어릴지언정 뛰어난 영주로서의 능력과 재량까지 갖춘 팔방미인이었다.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정령사가 모든 것을 잃고 피난 온 난민들을 보듬어준다면.

정령 신앙 숭배자인 그들은 엘레인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령 신앙 숭배자들의 정령사 사랑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그러한 이들을 내치지 않고 보듬어준다면 그들은 분명 굳건한 신뢰로 보답할 겁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아니라 굴러들어온 호박이라는 건가.”

황제는 턱을 매만졌다.

영지를 키우고 나라를 키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인구수다.

인력은 곧 국력.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인구의 유입이 늘어나는 것 자체는 호재였다.

이번 같은 경우에는 그 인구가 하필이면 차후 높은 확률로 도적이나 산적이 될 난민이라는 점에서 경계하고 나선 거지만, 그런 그들이 엘레인에게 호의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비폭력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겠죠?”

거만하게 그리 말한 오르칼이 얌전히 턱 끝을 내리고 엘레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오르칼은 지난번 그란디스 왕국에서 엘레인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그 방식이나 엘레인의 기본적인 성향 등을 모조리 다 파악했다.

즉, 위와 같은 말들은 모두 엘레인의 취향에 맞춰서 내놓은 평화로운 해결 방안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덕택일까?

엘레인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르칼을 선망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오빠 진짜 멋지다. 최고로 짱인 것 같아.”

“뭐…?”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황제와 쌍둥이 형제의 몸이 흠칫 굳었다.

가만히 앉아서 몇 마디 거들었을 뿐인데 엘레인의 사랑을 모조리 독차지하다니.

세 쌍의 사나운 시선이 오르칼에게 콕하고 박혔지만, 오히려 그는 승리자의 미소를 씨익 지으며 여상스레 말했다.

“정말 내가 최고로 짱인 것 같아?”

“응! 나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못 했는데 오빠는 해냈잖아. 진짜 대단한 것 같아.”

“그렇구나. 그럼 따라가는 사람은 내가 돼야겠네. 그렇지?”

“응?”

헤죽 웃고 있던 엘레인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오르칼은 그런 엘레인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어주며 턱을 괴었다.

“설마 우리 세 명을 모두 데려가려고 했던 건 아니지? 거추장스럽게 다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알짜배기만 데려가는 게 좋잖아. 기왕이면 나처럼 최고로 대단하고 멋지면서 똑똑한 오빠가 가는 편이 좋지 않겠어?”

오르칼은 그리 말하며 좌중을 슥 훑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쌍둥이 형제가 흠칫했지만, 아르닐은 이내 꿀릴 것 없다는 듯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오르칼 형 말이 맞아. 어차피 갈 거면 엘레인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가야지. 예를 들면 마법에 능통한 나처럼 말이야. 내 말이 맞지?”

“으, 응. 그렇긴 한데….”

엘레인은 갑자기 저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아르닐에게 저도 모르게 긍정했다.

뒤늦게 이 상황에서 고개를 끄덕인 것이 과연 맞는 건가 아닌 건가 깊이 고뇌하고 있던 와중.

문득 들고 있던 포크를 툭 하고 떨어트린 라네즈가 발끈하며 외쳤다.

“아니, 나는 왜 쏙 빼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검술에 능통하거든? 우리 꼬맹이 호위 기사 역할로는 아주 딱이거든?”

“형은 불안해서 안 돼.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백마를 적토마로 만드니 뭐니 하면서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었잖아? 평화롭게 해결하려는 자리에 형처럼 무시무시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가겠어?”

“뭐? 그, 그치만 그건 꼬맹이를 생각해서….”

“결과적으로 우리 엘레인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발언이었지. 그리고 호위 기사로는 카론 경이 있는데 굳이 형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잖아?”

계속해서 이어지는 팩트 폭격에 라네즈는 파르르 눈가를 떨었다.

결국, 말빨에 패배한 라네즈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무렵.

황태후와 황제 또한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마음만 같아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붙잡아두고 싶지만, 우리 아가는 한 영지의 영주이기도 하니까.”

“오르칼과 아르닐이 잘 지켜줄 거라고 믿지만, 조심하도록 해라. 아니지. 저 둘만으로는 부족하니 기사단을 붙여주마.”

“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기사단이 못 미덥다면 내 직접 따라가도록 하지.”

“그냥 기사단으로 할게요!”

더 이상 거절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갈 것처럼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 엘레인은 냉큼 답했다.

“…아쉽군.”

그에 황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황제를 보며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다음날.

엘레인은 오르칼과 아르닐, 카론. 그리고 무려 제1 기사단, 제2 기사단과 함께 플로스 영지로 복귀했다.

제1 기사단장인 파르망과 제2 기사단장인 메르토.

두 사람 모두 오랜만에 모시게 되었다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게 얼마나 부담스럽던지.

특히나 엘레인의 직속 기사단장인 메르토의 눈빛은 더했다.

황녀님을 지키는 기사단인데 정작 황녀님을 지키는 일이 없으니.

설마 우리가 필요 없는 건 아닐까? 하고 우울한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엘레인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차마 그런 그의 앞에서 부담 섞인 표정을 지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엘레인은 두 기사단장.

특히 메르토에게 잘 부탁한다며 그를 환영했다.

“화, 황녀님…. 제 한 목숨 다 바쳐 황녀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대단했다!

무엇에 그리 감명받았는지, 메르토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엘레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 오르칼과 아르닐의 눈썹이 들썩거렸지만, 두 황자의 무시무시한 눈길로도 메르토의 벅차오르는 가슴을 막을 순 없었다.

“목숨을 바칠 것까지야…. 그냥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해 지켜주세요. 목숨은 소중히 해야죠.”

“넵! 그럼 최선을 다해서 지키겠습니다!”

메르토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치자 뒤에 서 있던 파르망이 영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냉큼 말을 바꾸다니.

역시 줏대 없는 녀석이다 싶었던 것이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얼른 출발할게요.”

“예!”

어수선해지려는 분위기를 다잡은 엘레인은 이동 마법진 앞에 대기하고 있던 황실 마법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렇게 발밑에 피어오르는 환한 빛을 느끼며.

엘레인은 배웅을 나온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우울한 낯빛의 라네즈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으으… 꼬맹아!”

그때 한껏 울적해 있던 라네즈가 마법진 위로 껑충 뛰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한 돌발 상황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아오는 라네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켁! 끄앙대!”

하지만 어림도 없지!

너만큼은 엘레인의 곁에 보내지 않겠다는 듯 심술궂은 얼굴의 황제가 라네즈의 뒷목을 잽싸게 낚아챘다.

그렇게 라네즈의 절망 어린 외침을 뒤로하고.

엘레인의 시야가 확 바뀌었다.

“…방금 뭐였지?”

“바보 형이 또 바보 한 거지 뭐. 라네즈 형은 신경 끄고 얼른 들어가자.”

“아, 으응. 그러자.”

엘레인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영주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마침 밖으로 나오던 집사와 딱 마주쳤다.

“집사 아저씨!”

“영주님? 몸조리는 어찌하고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집사 아저씨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놀아. 그리고 내용을 보니까 아무래도 직접 와야 할 것 같아서.”

엘레인은 그리 말하며 몸은 이미 다 회복됐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

그에 확인하듯 오르칼과 아르닐에게 시선을 준 집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을 보며 크게 안도했다.

“날이 아직 덥습니다. 다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근데 집사 아저씨, 밖으로 나가려던 거 아니었어? 다시 들어가도 되는 거야?”

“예. 어차피 영주님께 먼저 보고 드려야 하는 일이라….”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했지만 어차피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알게 될 일이다.

“알겠어. 얼른 들어가자.”

엘레인은 대충 그리 말하며 집사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뒤.

집사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에 도착한 엘레인은 간만에 그가 내려준 차를 마시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집사 아저씨가 만들어 준 차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그리 말씀해주시니 참으로 기쁩니다. 어떻게… 두 분께서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뭐, 괜찮네.”

“우연이군. 내 입에도 딱 맞다.”

집사의 질문에 아르닐이 ‘내가 더 잘 만들 수 있는데’라고 적힌 얼굴로 퉁명스레 답했고, 오르칼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그리 답했다.

두 사람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답변에 집사는 허허 웃고 말았다.

적어도 둘 중 누가 영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지 알게 된 그였다.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지? 편지 읽어 보니까 되게 잘했더라.”

“영주님이 하던 걸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인걸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게 많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뭘. 이미 가장 급한 것들은 다 해결했잖아.”

엘레인은 집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들이 이렇다 할 난동을 부리지 않은 건 모두 집사 덕분이니까.

당장 급한 주거 문제와 식량 수급을 원활히 돕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들은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당장 먹고 사는 거니까 말이다.

“이미 편지로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건 또 다르겠지.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해줄래?”

“물론이지요.”

집사는 고개를 푹 숙인 뒤 난민들이 플로스 영지에 유입되고 난 후 있었던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추가로 알게 된 건 유입된 난민의 숫자가 천여 명에 다다랐다는 것과 그들 사이에 부상자들이 꽤 있다는 것.

그리고 난민들이 사는 환경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거였다.

“차례대로 짚어 보자. 우선 식량 수급은 계속 가능한 거지?”

“유리온실에서 나오는 수확량이 엄청나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합니다. 난민 숫자가 2천여 명이 되어도 문제없습니다.”

“그럼 식량 수급 문제는 걱정 없고. 식수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어?”

“당장 우리 영지민들이 마시고 있는 상수를 나누어주고 있는데 이건 그리 여유롭지 못합니다.”

“그렇구나. 그럼 일단 그런 걸로 알고 아까 부상자들이 많다고 했지? 난민들이 사는 환경이 좋지 못하면 감염될 위험이 있는데….”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밀집되면 병이 생기기 마련인데 하물며 머물고 있는 장소가 숲이라서 제대로 씻지도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 다친 사람까지 많으니 이미 그들의 상처 부위는 모두 감염되었을 겁니다.”

“나에게 먼저 보고해야 한다는 게 그거였구나?”

“예. 아무래도 의원들과 사제들을 모두 동원해야 할 일이라….”

하긴 집사 개인이 그들을 모두 움직일 순 없으니까 영주인 엘레인의 허락이 꼭 필요했다.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엘레인은 미간을 좁히고 침음을 흘렸다.

“상황이 많이 위급하네. 지금 당장 가서 병원으로 이송해야겠어.”

“그럼 의사들과 사제들을 함께 데리고 가는 게 어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외상과 상처 감염이 심한 사람들은 치료가 시급할 거 아니야.”

“확실히….”

“그리고 이왕 데려가는 김에 환자들을 분류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외상뿐만이 아니라 병에 걸린 사람도 있을 테니까.”

아르닐과 오르칼이 차례대로 조언해주었다.

특히 오르칼의 말처럼 환자 분류는 필수였다.

사제들과 의원들의 전문 분야는 다르니까 말이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엘레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선 의원들과 사제들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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