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엘레인은 가장 먼저 집사의 안내에 따라 의원들이 있는 곳을 찾았다.
놀라운 것은 엘레인이 그란디스 왕국에 가 있는 동안 병원이 전부 지어졌다는 것.
드워프가 하루 만에 집을 짓는 것도 무척 놀라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병원의 크기가 무척 웅장했던지라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우와. 이거 어지간한 황궁 별채 크기랑 맞먹는 것 같은데?”
엘레인은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새하얗고 거대한 병원은 깔끔한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주변에 공원까지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건물을 한층 싱그럽게 만들어주었다.
“바로 앞에 공원 만드는 건 누구 아이디어야?”
“레눔 씨입니다. 아무래도 재활 활동이 필요한 사람 같은 경우에는 갑갑한 실내에서 하는 것보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더군요.”
“외관뿐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까지 생각해서 만든 거였구나. 역시 레눔 아저씨의 센스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엘레인은 엄지손가락까지 척 올리며 레눔을 칭찬했다.
아마 그 자리에 레눔 본인이 있었더라면 쑥스럽다는 듯이 뒷목을 쓸며 풍성한 꼬리를 붕붕 흔들었을 터였다.
“확실히 대단하네. 이렇게 깔끔한 이미지라면 의원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도 믿고 제 몸을 맡길 수 있겠어.”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엘레인이 데리고 온 사람이라서 그런지 실력 하나는 확실한 것 같아.”
엘레인의 귀여운 주접에 곁에 있던 오르칼과 아르닐도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평소에 잘 놀라지 않는 오르칼과 남에게 칭찬이 인색한 아르닐마저도 감탄사를 흘릴 정도니 말 다 했다.
엘레인은 두 사람의 칭찬에 괜히 제 어깨가 으쓱거리는 걸 느끼며 집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병원은 이미 개업한 거야?”
“예. 열흘 전에 이미 문을 열었습니다.”
“아쉽다. 개업식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엘레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황소들이 대이동을 하는 것처럼 수십 개의 구둣발이 딱딱한 지면을 박차며 걸어오는 소리.
그에 놀란 엘레인이 번쩍 고개를 들자, 병원 입구에 있는 문이 활짝 열리며 수십의 의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영주님! 정말 돌아오셨군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이럴 수가. 완전히 반쪽이 되셨어!”
깔끔한 병원의 이미지처럼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의원들이 엘레인의 주위를 둘러싸며 저마다 외쳤다.
엘레인은 갑자기 나타나 당장 진료를 봐야 한다며 호들갑을 떠는 그들에게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잠깐! 나 완전 건강해요! 따로 상처 난 곳도 없고요.”
엘레인의 외침에 정신없이 떠들어대던 의원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참으로 다행이게도 그란디스 왕국에서 복귀 후 엘레인이 몸살로 쓰러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가 싶었던 그때.
의원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외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라넬 할아버지…?”
엘레인의 눈이 절로 커졌다.
한쪽 다리 대신 의족을 달고 있는 노인.
그는 다름 아닌 베스 마을의 라넬 의원이었다.
“허허. 반갑습니다, 황녀님. 못 본 사이 훌륭하게 성장하셨군요.”
“앗, 네. 할아버지는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동안 가끔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건 그날의 전염병 사건 이후로 9년 만이다.
엘레인이 무척 반가워하자 라넬이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요. 황녀님 덕택에 매일매일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할 따름이지요.”
“에이.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라넬의 진심 어린 감사에 엘레인은 한껏 쑥스러워했다.
그리고 엘레인과 싱글벙글 웃고 있는 라넬 의원을 번갈아 보던 젊은 의원들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경악했다.
“헉. 저 깐깐한 협회장님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어?”
“나도 저렇게 웃으시는 거 처음 봐….”
“역시 황녀님.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구나.”
의원들의 감탄에 엘레인은 의아함을 느꼈다.
라넬이 활짝 웃는 모습이야 9년 전에도 봤었고, 그의 성격이 깐깐하다는 말은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가끔 보내는 편지글도 정중하긴 하지만 이웃집 할아버지의 다정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할아버지. 어느 협회의 수장이세요?”
“예? 황녀님 모르셨어요? 라넬 의원님, 의원 협회의 수장이세요.”
“네? 정말요?”
다른 의원들의 설명에 엘레인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라넬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라넬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다른 이들이 제가 협회장을 맡아야 한다고 하도 사정을 해서 말입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그래도 지금은 나름 잘 이끌어나가고 있습니다.”
“와아. 대단하세요. 그럼, 여기도 협회장으로서 잠시 들르신 거예요?”
“그… 실은 며칠 전부터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랜 친우 녀석이 이 녀석들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하. 그래서 여기에 계셨던 거구나.”
엘레인은 그제야 그가 병원에 있는 이유를 알아채곤 깊이 수긍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럼, 이왕 여기 오신 김에 병원장도 할아버지가 맡으시는 게 어때요?”
“예? 아니, 그런 엄청난 자리를 왜 제게….”
“이미 협회장을 하고 계실 정도로 좋은 실력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협회 일로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라넬 할아버지한테 맡기고 싶어요.”
엘레인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했다.
갑자기 부여된 막중한 직책에 부담을 느끼며 머뭇거리던 그는 신뢰가 가득 담긴 그 목소리에 결심을 굳혔다.
“그렇군요. 황녀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최선을 다해 병원장의 일을 해내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엘레인과 라넬 의원이 서로 악수를 나눴다.
새로운 직책.
병원장의 탄생에 함께 있던 의원들은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아.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흴 보자고 하셨는지요?”
한참 환호하던 의원들에게 조용하란 사인을 보낸 라넬은 엘레인을 향해 질문했다.
그에 흐뭇하게 웃고 있던 엘레인은 그들을 찾은 주목적이 무엇인지 떠올리며 낯빛을 굳혔다.
“그게 플로스 영지로 넘어온 난민들 중 부상자가 많다더라고요. 직접 상처를 보고 병원에 데려갈 사람들과 사제에게 보여야 할 사람으로 분류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저보다는 전문가들이 직접 확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제가 가장 체력이 좋고 실력도 좋은 녀석들로 골라드리겠습니다.”
“괜찮으면 지금 당장 차출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금방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라넬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몇몇 의원들을 뽑아내었다.
저 많은 의원들의 실력과 체력 등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니.
벌써부터 병원장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그의 모습에 엘레인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렇게 점점 파견할 의료진이 꾸려지고 있을 무렵.
문득 저 멀리서 달음박질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헉헉. 영주님!”
“…응? 아르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멀리서부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던 아르헤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서 엘레인의 앞에 도착했다.
“영주니임!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 그러게요. 그보다 괜찮은 거예요? 물이라도 드릴까요?”
“괜찮아요. 저 완전 팔팔해요!”
주먹을 불끈 쥔 아르헤는 여전히 밭은 숨을 내뱉으며 외쳤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서 또 다른 인영이 걸어오더니 엘레인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영주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네요. 엘녹도 잘 지냈어요?”
“그럼요. 건강한 노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아주 건강해요!”
엘녹이 조금 더 굵직해진 팔을 접으며 예쁘게 자리 잡은 근육을 자랑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아르헤의 눈이 샐쭉해졌지만, 딱히 무어라 타박하지는 않았다.
만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싸우더니….
왜인지 모르게 묘해진 분위기에 엘레인은 ‘두 사람. 어느 정도 성장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또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두 분 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조금 있으면 제가 신전에 간다고 언질을 넣었는데.”
“그야 영주님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죠!”
“그래서 무슨 일로 저흴 부르셨어요?”
아르헤가 꺄꺄거리며 난리를 쳤고 엘녹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뭐, 일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야 전혀 나쁠 게 없었기에, 엘레인은 라넬에게 했던 말들을 두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렇게 모든 설명을 들은 아르헤는….
“어맛. 난민들까지 생각해주는 영주님은 역시 천♥ㅅr….”
“…….”
뭐지? 되게 평범한 대사였는데 갑자기 왜 소름이 돋는 거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엘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치부했다.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할까요?”
“고작 해 봐야 천여 명이니까요. 의원님은 셋. 사제 측은 저희 둘이면 충분해요.”
라넬의 말에 아르헤가 맞받아쳤다.
그런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끝으로 엘레인은 주위를 한번 쫙 돌아보았다.
회포를 푸는 모습을 멀찍이 구경하고 있던 황자들과 카론 그리고 기사 단원들.
마지막으로 젊은 의원 셋과 각 교단의 교주인 아르헤와 엘녹까지.
난민을 만나러 가는 것치곤 무척이나 화려한 일행이 드디어 결성을 마쳤다.
* * *
생각 외로 인원을 차출하는 과정은 무척 순조로웠다.
하지만 난민들이 자리 잡은 곳까지 가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황자들이 당장 출발하려는 엘레인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엘레인. 설마 직접 가려는 건 아니지?”
“설마. 그런 곳엘 직접 갈 필요가 어디에 있다고?”
엘레인은 오싹하게 웃는 오르칼과 두 눈을 치켜뜨는 아르닐을 보며 흠칫했다.
여태 가만히 있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 그냥 인원만 직접 뽑는 건 줄 알았나 보다.
엘레인은 괜히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반론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오빠들이랑 카론도 가고 기사단도 따라가는데? 게다가 어차피 위험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면서. 오르칼 오빠가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네가 직접 숲을 거니는 건 또 다른 말이야.”
“?”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엘레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오르칼이 세상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음울하게 말했다.
“숲처럼 험난한 곳을 지나가다가 나뭇가지에 긁히거나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어… 어차피 운디네도 있으니까 딱히 상처 나도 상관없는데.”
“아니. 아니지. 아예 다치는 것 자체를 생각하면 안 되지. 안 그래도 최근에 몸살 때문에 고생했는데 네 몸을 위해서라도 힘든 일은 피해야지.”
“네? 영주님 최근에 몸살 걸리셨어요?”
“헉! 어떻게 그런! 그래서 피골이 상접하셨구나!”
저기요? 이렇게 통통하고 윤기가 좌르르한 얼굴이 피골이 상접한 거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해골인뎁쇼?
오르칼의 말에 눈치를 보고 있던 아르헤와 의원들이 화들짝 놀라 외치자 엘레인은 제 이마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기를.
“하지만 오빠.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지.”
“그거야 그렇지만….”
“알았어. 그렇게 내 몸이 힘든 게 걱정이라면 아르닐 오빠랑 같이 양탄자 타고 갈게.”
“!?”
“앗! 그러면 되겠네!”
엘레인을 험한 곳에 데려가지 않으려던 오르칼은 오히려 제 말에 허를 찔렸다.
언제 반대했냐는 듯 주섬주섬 양탄자를 꺼내는 아르닐을 보며 오르칼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싱글벙글 웃느라 그 서늘한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와. 양탄자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마법의 양탄자였군요?”
“셋째 황자님은 엄청난 마법사라더니, 저런 걸 탈것으로 이용하시는구나.”
양탄자 위에 엘레인과 함께 자리 잡은 아르닐은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된 엘레인은 적지 않은 행렬을 이끌고 숲을 헤쳐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윽. 이게 무슨 냄새야?”
후각이 예민한 아르닐이 가장 먼저 코를 막았다.
이어서 일행은 멀리서부터 풍겨오는 악취에 놀라며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다.
사방에는 오물들과 둘둘 말린 거적때기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위생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그 모습을 일단은 외면하며.
숲을 헤치고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른 공터가 튀어나왔다.
“아.”
“세상에….”
그렇게 도착한 일행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기저기 물이 고여 썩은 웅덩이와 끔찍한 악취를 뿜어내며 쌓여 있는 오물 덩어리들.
그리고 그 위에서 서로 부대끼며 생활하고 있는 난민들까지….
앞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심각한 환경에 모두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