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5화 (274/417)

275화

“이거. 예상보다 더 심각한데….”

충격적인 광경에 모두들 할 말을 잃었을 때.

오르칼의 목소리가 정신을 깨워주었다.

그의 말대로 이곳의 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하필이면 난민들이 자리 잡은 곳은 우물조차 없는 곳이라 간단히 씻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즉, 병이 안 걸릴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안 되겠어요. 아픈 사람 치료뿐만 아니라, 배수로를 빨리 만들어야겠어요.”

“그러네. 이 정도면 건강한 사람도 병에 걸리겠어.”

엘레인이 진중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아르닐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더러운 물이라도 흘러가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떤 괴상한 전염병이 돌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저어… 당신들은 누굽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드니, 수백의 난민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겁을 먹고 경계하고 있는 듯한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양탄자에 올라타 있는 엘레인과 아르닐. 그리고 그 뒤로 죽 늘어선 기사들에게서 특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난민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몰랐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엘레인은 허둥지둥 양탄자 위에서 내려왔다.

아르닐 또한 덩달아 내려와서 아공간 주머니 안에 양탄자를 보관하자, 그제야 제대로 그들과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곳 플로스 영지의 영주예요.”

난민들을 쭉 돌아본 엘레인은 마지막으로 제게 말을 걸었던 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에 남자는 깜짝 놀란 듯 파드득 몸을 떨었고 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 황녀님이십니까?”

“네? 그렇긴 한데…. 엇!?”

엘레인은 그다음 이어지는 남자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마치 오랫동안 동경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 사람처럼.

두 눈 가득 감격의 물결이 일렁거리는 그가 더러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엘레인을 올려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남자의 정수리를 보게 된 엘레인은 두 번 놀랐다.

‘헉.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벌써 탈모가 생겼네.’

엘레인은 동그랗게 까져 있는 남자의 정수리를 힐끔 보며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대체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 나이에 벌써 탈모가 왔을까.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문득 그의 얼굴이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왠지 낯이 익은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 저는 로돌프 그란테입니다!”

남자는 엘레인이 제게 말을 걸어줬다는 것 자체가 기쁜 듯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엘레인은 그런 그의 반응보다 그가 말한 이름에 더욱 신경이 갔다.

“그란테? 설마 아버지 이름이 모비 그란테인가요?”

“역시 아버님을 알고 계셨군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로돌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진짜 모비 그란테의 아들이라는 말에 엘레인은 다시 놀라기보다,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렇구나. 머리가 왜 까졌나 했더니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거였구나…!’

안 그래도 측은했던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그란테 공작가는 탈모가 집안 내력이다!’ 따위의 쓸데없는 TMI를 얻은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로돌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로돌프 씨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

로돌프는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꼬질꼬질한 몰골이었다.

아마 난민들과 함께 피난 온 듯싶은데….

설마 전쟁 때문에 그란테 공작가가 풍비박산된 것일까?

“그게… 왕국을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있던 와중 하필이면 제가 있던 마을에 병사들이 들이닥쳐서 말이죠. 어떻게 도망을 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

로돌프는 애써 밝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정도로.

정말이지 그는 여러모로 딱하고 가엾은 감정이 들게 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건 엘레인뿐인지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오르칼이 싸늘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듣자 하니 우리 엘레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냥 알고 있는 거라면 상관하지 않는다. 원체 우리 엘레인이 유명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놈은 마치 오랜 기간 흠모해온 존재를 만난 것처럼 엘레인이라는 존재를 인식한 순간 표정부터 달라졌다.

그 부분을 생각해 대놓고 떠보니, 로돌프가 쑥스러운 얼굴로 헤죽 웃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저도 처음엔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거긴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알게 됐을 거예요. 지금 아스터 왕국에선 어딜 가든 황녀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거든요. 워낙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하시어서 황녀님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가자는 게 제 모토입니다!”

“아, 그렇구나. 아하하. 좋게 봐줘서 감사합니다.”

로돌프의 반짝거리는 시선을 애써 피한 엘레인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회귀 전 좋은 기억이 하나 없는 왕국에서 나에 관한 얘기로 가득하다니….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 참으로 묘했다.

반면 지금 같은 일이 터지기 전에 아스터 왕국에서 엘레인의 얘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오르칼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져 갔다.

‘설마설마했는데 귀족들 사이에서 엘레인을 다음 대 아스터 국왕으로 올리자는 얘기가 나돌았던 건가…?’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딜런 아스터가 이리 급하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된다.

딜런 입장에선 최대한 빨리 왕위를 물려받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욕심 많은 바론이 일찍이 왕위를 물려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고 만다.

어쩌면 바론 아스터가 죽은 것도 딜런 아스터의 계략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여기엔 웬일이십니까? 집사님께 식량을 받은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실은 여기 있는 난민들 모두 진료를 받게 하고 싶어서요.”

“네? 그게 정말인가요?”

로돌프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크게 놀랐다.

진료라 함은 의원들이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를 해준다는 건데, 아무리 사제에게 치료받는 것보다 싸다곤 해도 그 비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물며 다른 누구도 아니고 허락도 없이 자신의 영지를 불법 점거한 난민들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주다니.

보통의 귀족들이라면 하는 수 없이 난민들을 방치하거나 칼을 들고 내쫓기나 하지.

절대 엘레인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물론이죠. 환자가 있는데 이대로 계속 내버려둘 순 없잖아요. 먼저 가장 위급해 보이는 사람부터 병원으로 안내해드릴 테니까 다들 협조 좀 부탁드릴게요!”

로돌프에게 답하던 엘레인은 나중에 가서 난민 모두에게 외쳤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준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쇼크사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나 이대로 뒀다간 피부가 괴사하고도 남는 환자도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경계는 할지언정 엘레인의 호의를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환자 분류부터 들어가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다행히도 제대로 협조해주는 난민들 덕분에 의원들과 두 교주의 환자 분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특히 상처가 극심한 사람은 의원 한 명과 아르헤가 붙어 상처를 소독하고 바로 신성력을 뿌려주었는데,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상처가 치료되는 것을 보고 나니 그나마 남아 있던 경계심마저 모조리 날아간 듯했다.

엘레인은 연신 감사하다고 외치는 난민들을 보며 옅게 미소 지어주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분명 득과 실을 따지다가 때를 놓치고 난민들의 원성을 샀을 텐데…. 황녀님은 어떻게 망설임 없이 이처럼 엄청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거죠?”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득실을 따지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을걸요?”

엘레인은 희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앞서 엘레인이 해온 일들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로돌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어쨌든 그럴 만한 힘을 기른 것 또한 엘레인 본인이었기에.

하물며 그 과정조차도 황녀님의 뛰어난 능력과 따뜻한 베풂. 그리고 숭고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아, 그리고 여기에 배수로를 좀 만들 생각이에요.”

“예? 배수로를… 말입니까? 솔직히 좀 지저분하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로돌프가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사실 좀이 아니라 ‘엄청 많이’이긴 한데, 평민들과 부대껴 살며 공부하고 난민들의 틈에 섞여 생활하기도 한 로돌프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것만으로도 난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그런 상황에서 배수로까지 만들게 할 순 없는 노릇.

뭐,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물길을 낼 필요까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에겐 조금 귀찮더라도 좀 멀리 가서 싸라고 시키면 되고 정 심각하면 자리를 옮기면 될 일이니까 말이다.

어느 왕국이든 촌구석 마을만 가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아무리 공작 아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고 해도 그리 이상한 생각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오늘 엘레인으로 인해 완전히 깨어졌다.

“배수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데요. 전염병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보통 전염병은 이렇게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니까요.”

“그런… 가요?”

“그런 거다. 당장 저들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나? 안 그래도 벌어진 상처가 곪고 썩는 데에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이 가장 크다.”

엘레인의 말에 오르칼이 덧붙였다.

처음 엘레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로돌프는 직접적인 오르칼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표정을 굳혔다.

“듣고 보니….”

아무리 의학적 지식이 없는 그라지만, 상처 부위가 감염되면 해당 부위가 더욱 악화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전염병 건 또한 그랬다.

역사서를 조금만 뒤적거려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전염병은 난민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먹고 살기 바쁜데 개인위생이나 주변 환경 따위에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결국, 영주가 난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갈등 문제든, 전염병 문제든.

어쨌든 서로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이러한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군요. 황녀님께선 이러한 것까지 모두 상정하고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시는 거군요?”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민들을 도우려는 것은 맞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뭘 잘못 먹었는지 로돌프가 부담스러우리만치 두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그냥 황녀님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요! 괜찮으시면 저랑 악수 한 번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봐, 당신! 징그럽게 우리 엘레인한테 치근덕거리지 마!”

곁에 있던 아르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로돌프를 떼어냈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죽지 않아서 엘레인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뭔가. 아르헤 같은 광신도가 하나 늘어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니, 아니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가 뒤통수 맞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럴 때일수록 빨리 떼어내는 게 상책이다.

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는가?

그러므로 엘레인은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로돌프 씨도 진료받으러 가는 게 어때요?”

“예? 하지만 저는 아픈 곳 하나 없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여기에 있는 사람은 아프지 않아도 하나도 빠짐없이 진료받게 할 거예요. 혹시 자기도 모르는 병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아프면 안 되잖아요. 얼른 다녀오세요!”

“아, 넵!”

원래라면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은 나중에 진료를 보게 하려고 했으나 로돌프 그란테는 예외였다.

당장 병원으로 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그를 밀어 넣은 엘레인은 흡족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우리 남은 얘기는 진료 다 마치고 해요. 그럼 파이팅.”

“파, 파이팅!”

몸이 아파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선 로돌프가 어색하게 손을 마주 흔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느껴지는 죄책감에 환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1차로 분류된 난민들은 병원 진료를 받기 위해 기나긴 행렬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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