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여기가… 진료를 받는 곳이라고요?”
의원들의 안내를 받아 플로스 영지 안으로 들어선 로돌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많은 인원들을 데려간다는 것에서부터 ‘아. 플로스 영지의 진료소는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넓은가 보구나.’하고 예상할 수 있었지만, 웬만한 귀족의 저택만큼 커다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의원들을 사제들만큼 대우해주는 베네딕트 제국이라지만, 이만큼 커다란 진료소를 지을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기에 이렇게 커다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거지?”
로돌프는 필시 의원들이 여태껏 모은 돈을 모두 합쳐 병원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엘레인이 병원을 짓는 데 필요한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니, 황녀님은 혹시 기부 천사이십니까!?’하고 소리쳤을 것이다.
“이런… 내부는 더 미쳤잖아?”
병원 내부로 들어선 로돌프는 안 그래도 벌어졌던 입을 더욱 크게 벌렸다.
겉으로만 봐도 커다랗고 웅장했던 병원 내부는 훨씬 넓었으며 또 체계적인 질서가 잡혀있었다.
가장 먼저 번호표를 받는 곳이 있었으며 그 뒤로는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기재하는 접수처와 그 앞에 가져다 놓은 의자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각각 특정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의들이 대기하고 있는 방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해독 전문. 피부병 전문. 근육통에 탈골 접합 전문의까지?”
방마다 짧게 소개되어 있는 의원들의 프로필을 확인하던 로돌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앞의 것은 저명한 공작가의 아들로서도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다.
사람이 다치거나 아플 수 있는 곳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그 수많은 것들 중 저만큼 많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전문의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이처럼 놀라움이 느껴지는 한편, 지금껏 수많은 의원들이 돌팔이 취급을 받는 이유가 따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각각 잘 아는 분야는 따로 있는데 병의 종류는 많으니까 전문 지식이 없는 것들은 엉터리로 대처할 수밖에.”
로돌프는 허허롭게 웃었다.
벼락같은 깨달음 뒤로 다가온 것은 황녀님을 향한 무한한 존경과 경외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관련법을 만들게 한 것도 황녀님이고, 의원 협회가 만들어진 계기 또한 황녀님이었으니까 말이다.
“황녀님은 정말이지 대단하시구나. 아마 의원들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바로 파악하고 그들이 모였을 때 생기는 파급 효과 또한 미리 상정하고 계셨던 거겠지. 그러니까 앞서 그런 행동들을 하신 거고 말이야!”
숫제 감탄을 터트리던 로돌프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력하면 황녀님의 발끝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오만이자 자만이었다.
로돌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조만간 큰 파란을 일으킬 병원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은 자신의 번호표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제동이 걸렸다.
* * *
“아, 나오셨어요?”
“황녀님? 설마 기다리고 계셨어요?”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까의 눈빛을 생각하면 로돌프는 지금도 멀리하고 싶은 사람에 속했지만, 집사에게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럴 수 없게 됐다.
‘여태 집사가 식량과 식수를 가져올 때마다 솔선수범해서 사람들에게 적정량을 나눠줬다지.’
워낙 리더쉽이 뛰어나고 공정한 사람이라서 난민들 사이에서 그는 가장 신뢰도가 높았다.
따로 정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한마디로 로돌프 그란테는 난민들의 대표인 것이다.
그리고 엘레인은 난민들의 대표와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치료는 잘 받으셨어요?”
“아, 넵. 저도 모르는 자잘한 상처가 여럿 있었더라고요. 그거 좀 치료받고 별다른 증상은 따로 없어서 밥만 제때 잘 챙겨 먹으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 로돌프의 눈빛을 어색하게 피하며 말을 이었다.
“배수로 공사는 한창 진행 중이에요. 땅 파는 데에 엄청난 전문가들이 계셔서 이틀 정도면 공사가 끝날 거예요.”
“엄청나게 빠르군요…. 그런데 이왕이면 자리를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미 그곳은 상당히 더러워져서….”
“그 부분은 해결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예?”
엘레인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로돌프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로돌프가 행렬을 따라가고 있을 때 엘레인은 운디네의 힘으로 온갖 오물들을 깔끔하게 정화했었다.
난민들은 엘레인 측에서 무슨 마법을 쓴 건가? 싶은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공사는 그 자리 그대로 진행할 거고.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으음. 그러니까 난민들의 차후 처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무리 엘레인의 재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들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공급해줄 순 없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배려가 권리를 침해해버리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하니까 말이다.
“하긴 노력하지 않아도 계속 무언가가 들어온다면 저들도 한없이 나태해지겠죠. 그렇다고 식량 공급을 멈추면 폭동이 일어날 테니…. 어떻게든 그들이 제힘으로 딛고 일어설 발판을 만들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로돌프의 의견은 정확했다.
난민 상태가 굉장히 위험한 이유는 미래가 없다는 거다.
‘난 오늘만 살 거니까 뭔 짓을 해도 상관없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선 난민들의 생활 수준을 전반적으로 올려주고 일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아주 좋은 말이!
“제 생각도 그래요. 그래서 하는 이야긴데, 난민들에게 자기가 살 공간을 개간하게 만드는 건 어때요? 물론 고용비는 지급해줄 생각이에요. 그럼 그 비용으로 난민들은 자기 집을 지을 수 있을 테고 그들의 생활 수준도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승할 거예요.”
“그렇군요. 황녀님 말씀은 즉, 동기부여와 목적의식. 그리고 금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그들을 도와준다는 거군요.”
그리 말한 로돌프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까슬까슬한 턱을 매만졌다.
이곳으로 피난 오기 전, 마을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내가 살던 집은 우수수 무너져 내렸고 지금까지 살아온 터전은 불타 없어졌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안전한 나의 집이다.
그런데 내가 살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땅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돈까지 준다고?
심지어 그 돈으로 내 집도 지을 수 있어?
로돌프는 생각했다.
난민들에게 있어서 이만큼 엄청난 동기부여는 없을 거라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오면 안전한 집이 더욱 간절해질 그들에겐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라고 말이다.
“이건 무조건 됩니다. 제가 따로 설득하지 않아도 난민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선례로 영지민 등록을 진행하러 갈까요?”
“예?”
“에이. 왜 그렇게 놀라세요. 대표가 먼저 영지민 등록증을 들고 뙇! 나타나 줘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하죠. 우선은 소속감부터 가지게 해주는 게 먼저 아니겠어요?”
어차피 우리 플로스 영지에서 살 거, 영지민 등록은 필수다.
하지만 신뢰와 믿음의 아이콘인 로돌프가 먼저 영지민 등록증을 가지고 나타나면 난민들도 하루빨리 영지민 등록증을 가지고 싶어 할 거다.
그렇게 되면 일 처리가 더욱 빨라지니, 엘레인으로서는 적극 추천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전 아스터 왕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괜찮을까요?”
“그럼, 국적 두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치죠, 뭐.”
“그, 그래도 되는 거였군요.”
긴가민가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로돌프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법적으로 문제 되는 것만 아니라면야….
아니, 법이고 자시고 사실 그는 플로스 영지에 뼈를 묻고 싶었다!
동경하는 이와 조금이라도 같은 구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니까 말이다.
“좋습니다. 꼭 하게 해주십시오!”
“…….”
엘레인은 광적으로 눈을 빛내는 로돌프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또 어디서 스위치를 눌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저러는 걸 보면 아르헤보다 더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잠시 뒤.
병원에서 나온 엘레인은 로돌프와 함께 영지민 센터를 찾았다.
“여기가 영지민 등록증을 만들어주는 곳입니까?”
“맞아요. 그것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행정 업무나 민원 업무 처리도 진행하고 있어요.”
“허어. 그런 기관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혹시 베네딕트 제국에는 모두 그러한 기관이 존재하는 겁니까?”
“아뇨. 우리 영지에만 있는 거예요. 우리도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그 말씀은 이 기관 또한 영주님께서 생각하고 만드셨단 겁니까?”
“그렇죠…?”
아. 여기선 아니라고 해야 했나.
엘레인은 아까보다 더욱 반짝이다 못해 번뜩이기까지 하는 그의 눈을 피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아무래도 로돌프 그란테는 엘레인이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못 신기한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저 정도로 신기해할 일인가.
엘레인은 부담스럽게 헤죽 웃는 그를 보며 뺨을 긁적였다.
“어쨌든 여기선 1차적으로 민원을 해결하고 여러 가지 복지를 맡아서 하고 있어요. 여기서 해결 못 하는 건 영주인 저한테 오기로 되어있어요.”
“자잘한 건 이곳에서 걸러주는 거군요. 매우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엘레인은 그의 칭찬을 대충 넘기며 센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접수처에 앉아 일하고 있던 직원이 엘레인을 발견하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닛! 영주님 아니십니까!?”
“어? 예전에 앞장서서 피켓 들고 시위하던 그분 아니세요?”
“헉.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영주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저는 코피를 흘려가며 주구장창 필사만 하고 있었겠죠.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몸도 마음도 편해서 살맛이 납니다!”
과거, 필사가에서 센터 직원으로 직업을 옮긴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확실히 눈 밑이 거무죽죽하니 걸어 다니는 좀비 같던 그가 지금은 햇살을 가득 머금은 싱그러운 풀잎 같았다.
“직장 스트레스가 없다니 다행이네요.”
“네! 그나저나 영주님께선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아오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영지민 등록을 좀 하고 싶어서요. 여기 이분이 하실 건데, 오늘을 기점으로 다른 난민들도 모두 영지민 등록을 할 거니까 알아두셨으면 해요.”
“오오. 알겠습니다. 요즘 우리 영지가 너무 평화로워서 민원도 잘 안 들어오고 할 일도 없었는데 간만에 바빠지겠군요!”
그는 파이팅 넘치는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로돌프는 시위대를 직원으로 활용. 민원이 거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플로스 영지 등.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중얼거리며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 * *
“에휴. 그렇게 좋아요?”
센터에서 나온 엘레인은 로돌프를 보며 짜게 식은 눈을 했다.
그에 로돌프는 갓 만든 따끈따끈한 영지민 등록증을 제 뺨에 부비던 것을 멈추고 헤죽 웃었다.
“네! 엄청 좋습니다! 제 가보로 삼을 생각입니다!”
우렁찬 대답에 엘레인의 얼굴이 한층 더 어처구니없어졌다.
그냥 일반적인 신분증인데 그걸 왜 가보로 삼는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대답에 엘레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아까 저희가 나눴던 이야기들 난민들에게 모두 전달해주세요. 등록증 보여주는 것도 잊지 말고요.”
“물론이죠! 제대로 수행하겠습니다!”
로돌프가 힘차게 대답하고는 숲을 향해 내달렸다.
상당히 발이 빠른 그를 보며 감탄하고 있자, 곁에 있던 카론이 한 걸음 다가와서 말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군요.”
“경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카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인은 이미 점처럼 작아진 로돌프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모비 그란테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얍삽한 면이 없지 않아 있을 줄 알았다.
엘레인이 알고 있던 회귀 전 모비 그란테는 나름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었고, 실제로 이런저런 뇌물을 받아먹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아들을 보면 그러한 생각도 사라지게 된다.
‘황제가 모비 그란테의 약점을 잡고 흔들면서 그의 성격에도 무언가 변화가 생긴 건가? 그것도 아니면 로돌프가 나를 롤모델로 삼고 있어서 아버지의 성격에 영향을 받지 못한 걸까?’
뭐가 됐든 로돌프는 엘레인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아버지인 모비 그란테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