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엘레인이 지나치듯 모비 그란테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해당 주인공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하아. 상황이 어쩌다 이리된 건지….”
모비 그란테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솔직히 그는 느닷없이 왕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놈이 결국엔 가버렸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더랬다.
뭐, 불경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요즘 왕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누가 등 뒤에서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욕심이 지나치게 높으며 어질지 못한 왕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는 결국 토착 귀족 중 한 명인 로렌스 차일드 후작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딜런 아스터가 왕권을 잡으면서 토착 귀족 사냥이 시작됐다.
그런데 하필이면 모비 그란테 역시 토착 귀족이었다.
즉, 아버지의 죽음에 눈이 돌아버린 딜런 아스터에게 숙청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하필이면 왜 거기서 국왕을 죽인 건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모비 그란테가 시선을 돌려, 수심 가득한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바론 아스터를 죽인 장본인으로, 오랜 친우인 모비 그란테를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왕을 죽이지 않았네.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왕의 목이 휭! 하고 날아간 거란 말이네. 설마 자네, 내 말을 믿지 않는 겐가?”
“…….”
오랜 친우의 답답함이 가득 섞인 호소에 모비 그란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보아하니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하긴 먼저 무장해서 찾아온 것도 국왕이고 자네는 불시에 그를 맞이했을 뿐이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갑자기 나보고 반역자라고 하질 않나. 느닷없이 돌개바람 같은 것으로 우릴 공격하지 않나! 심지어 저 혼자 목이 떨어져 죽어 놓곤 이젠 내가 죽였다고 억울한 누명까지 씌워졌네!”
“잠깐. 갑자기 돌개바람 같은 걸로 자네를 공격했다고?”
로렌스의 흥분 섞인 하소연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려던 모비 그란테는 두 눈을 홉떴다.
그에 로렌스는 지난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떠올려 냈다.
“뭐, 그렇지. 다행히 내 옆으로 비껴가서 무사했지만, 옆에 있던 기사는 크게 다쳤었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으니 확실히 우릴 노리고 공격한 거야.”
“그래…? 그럼 혹시 왕의 목이 날아갈 때도 주위의 깃발 같은 것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가?”
“흐음. 생각해 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깃발이 크게 펄럭거렸었지. 칼날이 날아온 것도 아니요. 보이지 않는 공격에 잘린 머리가 공중에 꽤 오랫동안 체류했으니 아무래도 바람 계열 공격에 맞은 모양이야.”
“그래! 바로 그게 문제야!”
“?”
모비 그란테의 외침에 로렌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는 매우 화가 난 것 같은 친우를 보며 질문했다.
“무슨 문제 말인가?”
“바람 계열 공격 말이야. 왕실 마법사 중에 바람 계열 공격에 특화된 마법사는 없어. 심지어 바로 옆에 있던 기사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면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건데. 왕의 목을 깔끔하게 자르고 자네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날린 마법이 마나의 파동 하나 없이 생성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자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설마 이 모든 걸 귀신이 했다는 소린가?”
“귀신보다 더한 게 바로 사람이지. 듣기론 정령술은 마나의 파동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더군.”
“!!!”
로렌스는 경악했다.
만약 모비의 말대로 정령술이 공격 수단이었다면 충분히 모두의 눈을 피하고 공격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아스터 왕국 내에서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기도 했었다.
“그 말은 딜런 왕자가 제 아비를 죽였다는 겐가?”
“내가 보기엔 그래 보여. 기다렸다는 듯이 왕권을 휘어잡고 과감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음을 알 수 있지.”
“하지만 어째서? 왕자는 부족한 게 없지 않았나.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왕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러한 패륜을….”
“베네딕트 제국의 사촌을 신경 썼던 거겠지. 최근 드워프 도시를 구하면서 황녀가 정령사라는 게 알려지지 않았나. 그는 저보다 뛰어난 황녀가 제 왕위를 빼앗아갈 것을 염려하고 이런 일을 벌인 거야.”
“그렇군. 그래서 딜런 왕자는 그 대안법으로 정령 신앙을 축출하려는 건가? 그래서 우리 토착 귀족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려는 거고?”
“그런 거지.”
모비 그란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니랄까 봐, 딜런 아스터는 불안감을 없애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고작 그러한 이유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로렌스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감히 나를 제물로 쓰려 하다니!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인가!”
“진정해. 토착 귀족 중 자네 가문의 군사력이 가장 강해서 미리 치워버리려던 거지, 손쉬운 먹잇감이라서 먼저 건드린 게 아니야.”
“…어쨌든 내게 누명을 씌운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내, 이 전쟁에서 기필코 이기고 말 거네!”
“물론 그래야지.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니까.”
모비가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주먹을 불끈 쥐고 역정을 내던 로렌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불같이 타오르던 기세를 조금 누그러트리며 조심스레 한쪽 구석에 밀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자네… 아들은 찾았나?”
“아니. 아들이 머물던 마을은 박살 난 상태였어.”
“그, 그럼….”
“걱정 말게. 듣자 하니 전쟁에 휘말린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더라고. 내 아들은 아마 그 행렬에 함께했을 거야.”
그리 말하는 모비 그란테의 얼굴은 걱정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아직 아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로렌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대부분 난민이 된 사람들이 플로스 마을 영지로 가고 있다지.”
“안 그래도 그게 걱정이야. 딜런 아스터가 미워하는 사촌이 하필이면 그곳 영주니까 말이야. 어쩌면 난민들을 가지고 무언가 트집을 잡을지도 모르겠군.”
“설마. 다른 곳도 아니고 베네딕트 제국을 상대로 그럴 수야 있겠어? 우리랑 내전을 벌이기도 바쁜데 말이야.”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수도 있는 법이잖나.”
모비의 말에 로렌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왜인지 모르게 설득력이 있어서,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 * *
“영주님. 배수로 공사가 모두 끝났답니다.”
“응. 수고했어. 그럼 남은 건 이제 상수 만들기지?”
집사에게 소식을 전달받은 엘레인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아르닐은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땅 파는 건 나도 잘하는데….”
“안 돼. 오빠가 직접 하면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리잖아. 난민들에게 일하는 욕구를 조금이라도 더 자극해주려면 아무래도 선배들이 직접 공사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그럼 상수는? 호수 만들기는 내가 해도 되는 거 아니야? 구덩이 안에 물을 만들어서 채우는 건 노마스족도 못하는 거잖아.”
찻잔을 내려놓은 아르닐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여동생 앞에서 활약하고 싶은데 이제야 꺼리를 찾았다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엘레인은 그런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했다.
“하긴 노마스족 중에서 마법사는 없으니까. 그럼 그건 오빠가 맡는 걸로….”
“잠깐.”
엘레인이 결단을 내리려던 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오르칼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에 아르닐이 뭐냐는 듯 눈을 치켜뜨자, 오르칼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말했다.
“설마 우리 목적을 벌써 잊은 거야?”
“목적? 난민들을 도와주는 거 말고 다른 목적이 있었어?”
“물론이지. 이왕이면 얻는 이득이 많을수록 좋잖아. 그러니 난민들이 우리 엘레인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만들어야지.”
오르칼의 말에 엘레인과 아르닐의 얼굴 위로 의문이 절로 떠올랐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하기만 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오르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냥 갈등이 생기는 걸 막는 것밖엔 안 돼. 플로스 영지의 영주가 정령사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니 결국엔 불신이 생기겠지. 그럼, 여기서 우리 엘레인이 해줘야 하는 건 뭘까?”
“어… 정령사의 힘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거야!”
오르칼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답했던 아르닐이 인상을 찡그렸다.
결론은 제가 활약할 자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난민들 앞에 엘레인을 또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까 숲을 정화할 때 우리 운디네를 보여줄 걸 그랬다. 그치?”
-무우!
(그러게 말이야!)
엘레인의 머리 위에서 뒹굴던 운디네가 퐁퐁 뛰어오르며 격하게 공감했다.
덕분에 우리 주인이 험난한 숲에 다시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어서 그런지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오르칼은 그런 운디네를 달래듯 동그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을 걸었다.
“운디네 너의 역할이 아주 커. 네가 퍼포먼스를 크게 해줄수록 난민들은 엘레인과 너를 우러러볼 거야.”
-무우?
(정말?)
“그럼. 물론이지. 너도 주인의 편이 많이 늘어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지?”
-무뭇! 무뭉무!
(그야 당연하지! 좋아, 내가 아주 제대로 해줄 테니까 나만 믿어!)
“착하다. 역시 우리 운디네는 믿음직스럽다니까?”
엘레인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운디네와 오르칼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외치길.
“오빠. 설마 우리 운디네 말 알아듣는 거야?”
“그럴 리가. 나는 정령사의 자질이 전혀 없는걸?”
“그럼 어떻게….”
“눈치껏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쯤이야 내겐 아주 쉬운 일이거든.”
확실히 오르칼이라면 독심술 정도는 가뿐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니, 그건 인간에게나 통용되는 거 아닌가요.’
오르칼이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으나, 엘레인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머리 위에 있는 운디네를 집어 든 뒤, 연신 콩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쳐다보아도 귀여운 콩눈과 오물거리는 입이 다인 운디네의 표정을 읽는 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엘레인은 새삼스런 얼굴로 오르칼을 쳐다보며 뺨을 긁적였다.
“음…. 어쨌든 운디네로 호수를 만든다 치고. 그다음은 어쩌지?”
“뭐가? 호수 만들기만 끝내면 난민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거 아니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아르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그의 말대로 식수 수급만 문제없이 흘러간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 식수가 시간이 갈수록 오염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이지. 고여 있는 물은 쉽게 오염될 뿐만 아니라 어쨌든 썩게 되거든. 심지어 그 호수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 호수잖아? 그럼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풀이 썩어서 부유물이 될 거고 대량 번식하는 날파리나 각종 벌레 등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결국, 깨끗한 수질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는 거네.”
엘레인의 말을 이해한 아르닐은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며칠 전 숲을 정화했던 것처럼 운디네로 모든 일을 해결하면 되는 거지만, 엘레인이 매일 이곳을 찾아와서 관리해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그럼 지금까지 플로스 영지민이 사용하고 있는 식수는 뭐야? 그것도 호숫물이잖아.”
“그야 거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호수잖아. 중앙에 커다란 정화석도 있고. 식수로 사용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오르칼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아르닐을 질타했다.
그럼 결국 기존의 호수처럼 커다란 정화석을 이용하면 될 일이지만, 주문하면 연금술사들이 정화석을 만드는 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린다.
한마디로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물을 정화하느냐가 관건인데….
“굳이 정화석일 필요는 없지. 뭐든지 간에 꾸준히 물을 정화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정화석을 대체할 뭔가가 있던가?”
엘레인의 말에 아르닐과 오르칼이 의아해했다.
그에 엘레인은 운디네의 볼살을 쪼물딱거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연히 있지.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